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18화 (218/303)

218화 #39 – 그녀와의 기억 (3)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 느낌.

송유나의 손길이 내 이마에 닿는 순간.

나는 처음 느껴보는 듯한 감정과 동시에 긴 터널 속으로, 아주 어둡고 깊은 곳으로 몸이 가라앉고 있었다.

“어… 어?”

이곳은 심해인지, 혹은 어둡고 습한 동굴 속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희미해지는 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어딘가를 향해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저벅… 저벅.

어디로 향하는지,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황폐한 사막 같은 이곳.

주변은 모래바람 때문인지 붉은 공기가 가득했다.

“으윽….”

내 눈으로 다가오는 세찬 모래바람.

손으로 겨우 눈과 얼굴을 막은 채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걸었고.

한순간 거짓말처럼 드넓던 사막이 온데간데없어졌다.

“이게 대체 뭐야…?”

붉은빛을 쏟아내던 주변은 온통 검은색의 벽으로 뒤바뀌었고.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검은 벽들 사이에 갇혀버렸다.

그리고 이 방 한가운데 아주 커다랗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두꺼운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아주 두꺼운 책이 실로 이어진 듯한.

한 권의 책이 아니었다.

몇십, 아니 적어도 백 권에 가까운 듯한 책들.

그 책들이 하나의 책처럼 보이도록 엮여 있었고.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책의 중간쯤을 펼쳤다.

타앗-.

책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펼쳐졌고.

그 안에는 너무나 익숙한 글씨가 새겨진 글들이 보였다.

“이거… 내 글씨 아닌가?”

눈에 익은 필체.

내가 쓴 것들이 분명했다.

그 필체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고.

서둘러 펼쳐진 페이지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1만 년의 벌, 그 지옥이 끝나려면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언제쯤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용을 소리 내어 읽는 순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책으로 엮인 두꺼운 이 책은 내가 쓴 회고록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깨닫자마자 곧장 페이지를 앞뒤로 넘기며 내용을 읽어갔다.

펄럭.

두껍고 커다란 페이지가 넘어가고.

“나는 벌써 수십 번, 아니 적어도 수백 번의 결혼을 반복했다. 새로운 삶을 가지게 될 때마다 현재의 생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생의 사람들과 섞이기 위해서였지.”

나는 글자를 읽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최근의 기억 속에는 ‘결혼’에 대한 기억이 없었으니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집중을 이어갔다.

“그리고 내가 온 마음과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한 여인. 그 여인과 그날의 일이 있었던 이후로 나는 다시는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건….”

끝나버린 페이지에 마른침을 크게 삼켰고.

서둘러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겼다.

“그건… 그녀를 다시 만나버린 이후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똥그랗게 떴다.

“…그녀와 다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다음 내용을 읽었다.

“나의 1만 년의 기나긴 지옥 같은 삶에 빛을 밝혀준 한 사람. 그녀가 환생한 모습을 보고, 그리고 그녀의 옆에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있다는 것을 본 순간… 나는 다시 누구를 만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정리하자면, 내가 어떤 한 여인과 진심을 다한 사랑을 했고.

안타까운 이별 후.

후에 그 여인이 환생한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옆엔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있다는 건데….

그 이후로 내가 다시는 사랑 따위를 하지 않는다… 이 말인가…!

팟-!

눈앞에 보이던 회고록도.

검은 벽, 사막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앞에는 내 이마에 손을 올리고 있는 ‘송유나’의 걱정이 가득 담긴 모습뿐.

“이마에 열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송유나는 자신의 이마와 내 이마의 열을 비교하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때.

그녀의 눈과 내 눈이 허공에서 불꽃처럼 마주쳤고.

촤아악-.

순식간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송유나의 반짝이는 두 눈망울.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흩어졌던 모든 조각들이 내게로 빠르게 다가왔고.

순식간에 그 조각이 하나로 맞춰졌다.

즉, 내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아….”

송유나의 얼굴.

내 예전 기억과 오버랩이 되며 떠올랐다.

…9·11테러.

또다시 내 눈앞에는 당시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무역 회사.

1만 년의 삶 중 일부를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내 이름은 알렉스였고, 내 옆에는 로라가 있었다.

그리고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로라가 지금 송유나의 전생이라는 것을.

로라는 내 친한 직장 동료이자, 내가 가깝게 지내는 여자였다.

이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

송유나, 그러니까 로라는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사랑을 해 결혼했고.

그 둘에 사랑의 결실로 아이가 태어났지.

9월 11일, 이날.

끔찍한 테러가 일어났고.

로라는 이 무역 회사 건물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나는 오열하고 있을 틈도 없이, 한 아이의 목숨을 지켜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윌리엄.

로라의 아이였다.

…….

“아악….”

다시 눈앞에는 로라, 아니 송유나가 보였고.

로라와 송유나의 얼굴이 겹쳐지는 순간.

극심한 두통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희성 씨, 괜찮아요?”

바로 앞에 있지만, 희미하게 들려오는 송유나의 목소리.

“하아… 하아….”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두통이 심한 건 처음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나는 가빠오는 호흡에 거친 숨을 내뱉었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무겁게 감겨오는 눈꺼풀을 이겨내려 애썼다.

하지만 점점 더 감기는 눈.

문득문득 보이는 로라의 모습.

아니, 로라가 환생한 송유나의 모습.

시야는 빙빙 돌듯 앞이 점차 보이지 않았고.

“희성 씨, 정신 차려요. 내 말 들려요?”

나를 애타게 부르는 송유나의 목소리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밝은 대낮이었지만, 내 앞은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고.

쿵-!

나는 그대로 온몸에 힘이 촤악 풀린 채 이성을 놓아버렸다.

“희성 씨…!”

송유나의 울부짖는 목소리.

“희성 씨, 정신 차려요. 진희성!”

***

깜빡, 깜빡.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주고 눈을 뜨자, 보이는 하얀 천장.

이내 눈은 다시 스르르 감겨왔고.

주변은 아무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하아….”

어느새 탄식이 터져 나왔고.

“희성아, 정신이 들어?”

희미하게 주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희성아, 진희성. 나 보여? 내 목소리는 들려?”

귀가 떨어질 듯 소리치는 목소리.

내 몸을 붙잡고 흔드는 이 느낌에 별안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팟-!

다시 눈을 뜨자, 아까까지만 해도 흐릿하게 보였던 천장과 모든 것들이 선명해졌고.

“희성아!”

희미하던 이 목소리 역시 귓가에 분명히 들렸다.

“희성아, 이거 몇 개야. 보여?”

“두… 두 개.”

“맞아. 정신이 좀 들어?”

그랬다.

아까부터 내 몸을 흔들던 사람.

귀가 떨어져 나가도록 소리친 사람.

매니저 김 실장이었다.

“…형.”

내 부름에 그는 서둘러 물 뚜껑을 열어 조심스레 내게 건넸고.

“그래, 나야. 어휴… 진짜 나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김 실장이 건넨 물병을 받아 타들어가던 목을 황급히 축였다.

그는 내가 마시고 난 후 건넨 물병을 받아 챙겼고.

“나 좀 일어나고 싶은데.”

“잠시만, 아직 벌떡 일어나면 안 되고, 침대만 조금 올려줄게.”

김 실장은 침대 등 부분을 조심스레 일으켰다.

“이 정도면 괜찮아?”

“응, 고마워.”

메말라 있는 내 입술.

축축하게 젖은 등줄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누가 땀을 닦았는지 뽀송한 모습이었다.

“형,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내 물음에 김 실장은 그제야 침대 옆 작은 의자에 착석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응?”

“대체 그렇게 피곤한 몸으로 유나 씨는 왜 만나러 간 거야. 좀 쉬지.”

근심 걱정이 가득한 그의 얼굴.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유나 씨 만난다고 나갔다가 쓰러졌어. 기억 안 나?”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이 찌푸려졌고.

이내 쓰러지기 전의 일이 모두 떠올랐다.

내 이마를 짚었던 송유나의 손길.

그리고 쓰러진 내 모습.

거기에 그녀의 손길과 동시에 떠오른 과거의 송유나.

그리고 내 모든 기억….

“아아…!”

기억이 떠오름과 동시에 머리가 다시금 지끈거렸고.

“희성아, 괜찮아?”

내 팔을 붙잡는 김 실장의 손길에 나는 숨을 빠르게 내쉬었다.

“하아, 하아.”

“천천히 호흡해.”

“응, 괜찮아. 형.”

김 실장은 심려 깊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했다.

“너 과로래.”

“내가?”

그는 또다시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유나 씨 없이 길거리에서 혼자 쓰러졌으면 큰일 날 뻔했어.”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래서 송유나 씨는?”

내 물음에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유나 씨는 아까 자기 호텔로 돌아갔지.”

“아, 그래?”

나는 김 실장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송유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고.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전날 촬영장에서 나를 기다렸지만 함께 저녁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그래서 오늘 내가 LA 하루 가이드를 해주겠다며 불렀던 것인데.

내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일들로 정신을 잃고 LA 한복판에서 쓰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유나는 나를 병원으로 데려왔고.

고맙게 나를 이 자리에 입원시킨 후 호텔로 갔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송유나는 나와는 다르게 여행을 위해 시간 내어 LA에 왔을 텐데.

내가 그녀의 여행 중 하루를 망친 것만 같은 느낌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어떻게 이 일을 사과하고 보답해줄 수가 있을까?

송유나를 떠올리자 드는 그녀의 전생.

그 전생에서 나는 송유나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비록 그녀의 옆에는 내가 아닌, 다른 남자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까 정신을 잃기 전, 내가 봤던 나의 1만 년의 회고록.

그 일기와 같은 책에서 내가 쓴 내용이 있었다.

너무나 사랑했지만, 그녀가 다른 이와 사랑에 빠진 것을 본 후.

나는 다시는 사랑을 할 수도, 연애를 할 수도 없었다는 것.

그렇다면 내가 2001년.

9·11테러를 겪었던 그 삶 이후.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내가 기억하는 최근의 기억에서는 누군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송유나와 그녀의 전생.

그리고 나의 과거, 1만 년을 돌아보며 머리가 어지럽던 그때.

“희성아.”

김 실장이 혼란스러운 나를 불렀고.

나는 정신을 차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응?”

“몇 번 불렀는데,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렇게 넋을 놓고 있어?”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왜?”

“유나 씨, 호텔 간 지 얼마 안 됐어.”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다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병원 온 지는 얼마나 됐는데?”

“너는 족히 3시간은 넘었지.”

김 실장의 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유나 씨가 거의 3시간을 있었다는 거야?”

내 말에 그는 입술을 말아 넣고 어깨를 들썩였다.

“응, 그리고….”

한국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병원이었지만.

그럼에도 김 실장은 주변을 살펴 눈치를 보고는 내게 작게 속삭였다.

“유나 씨가 울고불고 완전 난리 났었어.”

나는 김 실장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미간을 팍 찌푸렸다.

“송유나가 울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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