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17화 (217/303)

217화 #39 – 그녀와의 기억 (2)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

평소 촬영을 하며 시간이 늦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할리우드는 근무 시간과 날짜가 철저한 편이었으니까.

다만 간혹 날씨의 영향으로 촬영 중간에 휴식이 길어진다든지.

혹은 배우나 촬영 장비의 이상으로 휴식이 길어진다면, 그날 해야 할 촬영 때문에 퇴근이 늦어지기도 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자주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필 그날이 오늘일 줄이야.

“하아… 아까 찍었던 신에서 바스트 샷을 다시 찍어야 할 것 같은데.”

제프리 감독의 탄식.

그는 짜증이 조금 섞인 말투와 표정으로 스태프를 향해 말했고.

“어떤 신에서의 바스트 샷을 말씀하실까요?”

“조금 전에 찍었던 세 개의 장면 전부.”

그러자 스태프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되물었다.

“전부요?”

“어, 웬만하면 넘어갈까 했는데,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나는 제프리 감독 주변에서 그 이야기를 슬쩍 듣게 되었고.

하필 그 세 개의 장면 중 두 개가 내가 찍었던 신이었다.

“연기가 잘못된 게 아니라, 구도가 다 마음에 들지 않아. 내일 이어서 찍게 되면, 배우들 감정선도 그렇고 헤어, 의상 다 다시 준비해야 하니까… 오늘 다시 찍는 게 나을 것 같지?”

제프리 감독의 말에 스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이야기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촬영 늦어질 것 같으니까. 끝난 배우들은 들어가도 된다고 하고.”

“네.”

그리고 이내 스태프는 내게 다가와 상황을 설명했고.

이미 엿들어 알고 있던 내용이기도 했고.

당연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그에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하필 송유나를 이곳에 데려온 날, 촬영이 길어지다니.

그녀를 촬영장에 데려와 할리우드를 구경시켜 준 후.

다시 LA로 돌아가 저녁을 함께하려 했다.

그녀와 저녁을 먹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송유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큰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촬영이 끝날 때까지 함께 기다렸다가 저녁을 먹자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게, 연기였으니까.

더군다나 평소 다른 이들의 촬영을 지켜보지 않는 것을 알기에.

이미 하루 내내 이곳에 있던 그녀를 더 이상 붙잡아 두기는 미안한 마음이었지.

나는 송유나에게 가기 전, 김 실장을 불렀다.

“형.”

그는 내 부름에 트레일러에서 나와 내게로 다가왔고.

“우리 촬영이 늦게 끝난다고 하던데, 형도 들었을까 해서.”

“아니, 아직 못 들었어.”

“바로 이야기하실 거야. 왜냐면 내가 감독님 옆에 있다가 먼저 들었거든.”

김 실장이 어두워진 하늘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형이 유나 씨 좀 LA에 먼저 데려다줄 수 있어?”

그는 저 멀리에서 촬영장을 구경하고 있는 송유나를 흘긋 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응, 당연히 되지. 근데 유나 씨랑 저녁 먹기로 한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내가 너무 늦게 끝날 거 같아서. 오늘은 먼저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이제 유나 씨한테 말하려고.”

“그래, 희성이 너 편할 대로 하고 나한테 알려줘.”

“오케이, 고마워.”

나는 김 실장에게 미소를 보낸 후.

촬영 시작 전, 서둘러 그녀에게로 향했다.

“유나 씨.”

내 부름에 송유나가 고개를 돌렸고.

“네, 끝났어요?”

“아, 그게….”

“여기는 시간도 철저하다면서요. 얼른 가요, 배고픈데.”

송유나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자신의 배를 문질렀고.

나는 양손을 맞댄 채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답했다.

“미안해요. 하필 오늘 촬영이 너무 길어져서, 같이 저녁을 못 먹을 것 같아요.”

“뭐라고요?”

화가 난 목소리가 아닌, 당황한 표정과 말투였다.

“아까 찍었던 바스트 샷이 다 잘못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 부분을 재촬영하면… 유나 씨도 알다시피, 끝나는 시간이 정해지지가 않아서요.”

그녀 역시 이 업계의 일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짧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기다리죠, 뭐.”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당연히 짜증을 내거나 퉁명스럽게 투정을 부릴 줄 알았던 그녀인데,

기다렸다가 함께 밥을 먹자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럼에도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미안해서 안 돼요. 지금 저기에 매니저 형이 차량 준비해둘 거예요. 호텔로 데려다드릴게요.”

“아….”

“제가 너무 미안해서 안 될 것 같아요.”

그녀는 내 말에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주억거렸고.

나는 서둘러 미소를 지은 채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너무 미안해서, 대신 내일 저 촬영 없는데 같이 LA 구경할래요?”

송유나는 내 말에 검지로 자신의 턱에 대고 고민하는 듯 보였고.

“그럼 오늘 저녁에는….”

그때.

“희성 씨, 촬영 지금 들어갈게요!”

내게 소리치는 스태프.

나는 그 소리에 스태프를 향해 몸을 돌려 소리쳤다.

“네, 바로 갈게요!”

그러고는 송유나를 바라보고 손을 모은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진짜 미안해요. 대신 제가 내일 LA 일일 가이드 해줄게요. 저기 매니저 형한테 이야기해 뒀으니까, 저기로 가면 돼요.”

“…네.”

“유나 씨, 조심히 가고. 내일 아침에 연락할게요!”

나는 그녀를 뒤로한 채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진희성의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는 송유나의 시선.

그녀는 그 모습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그냥 끝나고 밥 대신에 술 마시자고 말하려했는데….”

점점 멀어져가는 진희성을 보며,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코를 찡긋거렸다.

“뭐… 어쩔 수 없지.”

***

휘이, 휘이-.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며, 장대비가 내 온몸을 순식간에 적셨다.

겨우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

이 바람과 굵은 빗줄기에도 발길을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빗방울.

“하아….”

그저 내가 내뱉을 수 있는 건 한숨과 이 빗방울에 섞인 눈물뿐.

이곳은 현실이 아닌, 내 꿈속이다.

쏴아아-.

점점 더 무게가 실리는 이 빗줄기.

잿빛 하늘은 내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나를 어둠으로 누르고 있었고.

나는 그저 하늘을 원망하며 소리칠 뿐이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는 내 두 뺨을 적신 물줄기.

어느새 나는 분통함을 느끼며 찰박한 흙바닥에 온몸을 주저앉혔다.

쾅쾅-.

온 마음을 다해 분노를 표출하듯 땅을 내려쳤고.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여기가 지옥이지,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나는 눈물을 절절 흘렸고.

죽을힘을 다해, 아니 죽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내 몸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목이 찢어져라 울부짖었다.

“차라리 날 죽여줘.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나를 없애 버리라고…!”

콰쾅-.

내 말에 대답하듯 천둥 번개가 몰아쳤고.

여전히 내 몸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다만 심적인 고통이 배가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손가락과 발가락이 퉁퉁 불도록, 나는 이 잿빛의 비를 맞으며 세상을 향해 원망하고 목이 쉬어라 울부짖었다.

팟-!

눈을 뜨자마자 천장을 확인한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그 탓에 침대 시트 역시 땀이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꿈에서 눈이 아프도록 울었던 터라 지금 내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몽롱한 정신으로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 프레임에 몸을 기댔고.

“아악.”

지근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휘몰아치는 기억들.

방금 꿈에서 보았던, 그리고 그 당시 겪었던 모든 장면들이 꽤나 선명하게 뇌리에 박혔다.

너무나도 소중한 내 삶의 일부 같은 사람을 잃었다.

그녀를 잃은 후, 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린 것이지.

그 모든 게 내게는 지옥 같은 순간들이었다.

“1만 년을 사는 것 자체가 지옥 같은 일이지만….”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을 떨쳐내려 했지만.

쉽사리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떠오르는, 힘들고 아픈 기억.

지옥이라 부를 만큼 힘든 것들은 전부 현생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즉, 내가 직접 겪은 일들이라는 뜻이지.

1만 년을 살아오며, 행복한 순간도 있겠지만.

지옥 같은 경험의 연속이었다.

애초에 1만 년이라는 벌을 내린 신이, 내게 행복을 줄 리가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자꾸만 떠오르는 하나의 기억.

바로 ‘그녀’였다.

불현듯 떠오르는 한 여성의 기억.

누구인지 얼굴도, 그녀에 대한 작은 단서도 뚜렷한 것은 없지만.

분명한 건 그 여성이 내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 역시.

그녀를 잃었음에서 나오는 슬픔과 분노였지.

“대체 그 사람이 누구인 거야….”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내 목숨을 잃어도 좋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

그녀를 떠올리기 위해 나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

송유나를 만나기로 했기에, 과거에 머물며 침대에 누워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준비를 마친 후 호텔을 나섰고.

하지만 내게는 아직 꿈속의 기억이, 그리고 내게 남아 있는 이 기억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지쳐버린 몸과 마음.

자꾸만 떠오르는 아련한 마음과 그녀를 떠올리려는 기억.

현생과 과거의 충돌로 계속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지금.

하지만 호텔에 누워 있다고 해도 힘들 것 같았고, 전날의 일로 송유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기에.

오늘도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하아… 그래도 바깥 공기를 쐬면 괜찮겠지.”

서둘러 송유나에게로 향했고.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희성 씨, 여기!”

“네, 유나 씨. 어제는 미안해요.”

내 말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답했다.

“어휴, 그놈의 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좀 그만해요.”

“하하, 미안… 아니, 알겠어요.”

나는 계속해서 울리는 머릿속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배고프죠? 먼저 점심부터 먹을래요?”

“그래요.”

나와 송유나는 LA에 있는 한 식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그녀는 나를 흘긋거리다 갑자기 발길을 멈춰 세웠다.

“희성 씨.”

그녀의 부름에 나 역시 제자리에 멈췄고.

송유나는 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야, 무슨 일 있어요?”

“네?”

“안색이 영 말이 아닌데?”

그녀의 말에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 제가 어젯밤에 좀 뒤척이느라… 잠을 못 잤어요. 그래서 그렇게 보이나 봐요.”

내 말이 끝나자 그녀는 뾰로통한 얼굴과 함께 언성을 높였다.

“뭐예요. 오늘 LA 일일 가이드도 해주고, 완전 열심히 돌아다니려고 했는데!”

그녀의 걱정 섞인 퉁명스러운 말투.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살펴보며 말을 이어갔다.

“어? 근데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해요! 나 엄청 LA 다 구경하려고 했는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녀의 태도였지만.

내가 평소와는 너무나도 달랐기에.

나는 고개를 푸욱 숙인 채 그녀를 향해 읊조렸다.

“진짜 미안해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그렇게 사과하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요.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하라니까….”

“아….”

송유나는 그제야 살짝 누그러든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래서 잠만 못 잔 거예요? 아니면, 몸도 안 좋아요?”

나는 계속해서 지끈거리는 머리 탓에 손바닥으로 머리를 꾹 누르며 답했다.

“심하지는 않고, 두통이 살짝 있어요.”

“그럼 오늘은 그냥 들어가서 쉴래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배가되기 전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애써 만났는데, 이렇게 들어갈 수는 없죠. 얼른 밥 먹으러 가요.”

“음….”

송유나가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긴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열이 있는 건가?”

송유나는 양손을 들고, 한 손은 자신의 이마에.

그리고 반대 손은 내 이마에 가져다 댔다.

순간.

송유나의 손이 내 이마에 닿자마자 나는 모든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잠깐만.

물밀듯이 떠오르는 기억들.

내가 애타게 찾던 하나의 기억.

그간 몇 번이고 꿈에서 반복하며… 내가 잃었던 사람…!

송유나의 손길에 나는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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