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39 – 그녀와의 기억 (1)
LA 중심에 위치한 호텔.
푹신한 매트리스.
그리고 그 위에는 새하얀 이불이 송유나를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하암… 잘 잤다.”
송유나는 손을 더듬거려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고.
울리기 직전의 알람을 끄며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드디어… 간다!”
♪♬-.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는 LA에서 머문 지난 일주일 중 가장 행복한 듯싶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설렘에 눈을 떴다는 것.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을 움직인다는 것이 그 행복감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송유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활짝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 피부 컨디션도 좋네. 어제 자기 전에 팩 하고, 크림 듬뿍 바르길 잘했다.”
톡톡-.
그녀는 자신의 피부를 살포시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콧노래를 부르며 화장을 시작했고.
그사이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켜둔 휴대 전화 영상.
그 영상은 진희성이 나오는 시트콤이었다.
송유나는 눈 화장을 하는 중간에도 흘긋거리며 시트콤을 바라보았고.
“뭐, 한국에서부터 보던 거니까. 저 에피소드는 끝까지 봐야지.”
진희성이 아닌, 시트콤을 본다는 것을 강조하는 그녀.
“게다가 여기는 할리우드니까. 가서 영어도 들으려면 미리 귀 좀 열고 가야 하니까….”
화장을 하던 그녀는 어느새 시트콤에 집중했고.
문득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소리쳤다.
“아, 빨리 화장해야 해. 바쁘다, 바빠.”
송유나는 서둘러 휴대 전화 화면을 닫았고.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내가 오늘 이렇게 화장에 공들이는 건, 진희성을 만나서가 아니라!”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온 신경을 집중해 마스카라를 하며 읊조렸다.
“할리우드 배우들… 아니, 배우들이 아니라. 브루노 실물을 영접해야 하니까. 더 예쁘게 꾸며야지.”
송유나는 미소를 지은 채 화장을 이어갔다.
***
“형, 여기 호텔 주소.”
나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김 실장에게 주소를 보여주었고.
그는 내가 건넨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으며 말했다.
“응, 여기 얼마 멀지는 않네. 근데 유나 씨가 LA에는 대체 무슨 일이래?”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겠어. 그냥 놀러왔다가 온 김에 할리우드 현장도 구경하고 싶었나 봐.”
“너랑 유나 씨가 할리우드에서까지 만날 정도로 친분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서.”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맞지.”
그러고는 의자에 기댄 채 말을 이어갔다.
“근데 내가 한국에서 저번에 말했거든. 다음에 LA 한번 놀러오라고. 할리우드 구경시켜 준다고 했어.”
김 실장이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말했다.
“진짜 의외다. 아무리 그래도 유나 씨가 할리우드 구경하러 온다는 게 말이야. 한국에서는 생전 다른 배우들 연기하는 거 절대 본 적이 없잖아.”
“그러네.”
“응, 지금까지 현장에서 자기 촬영 끝나면, 항상 바로 차 타는 모습만 봤지. 다른 사람 연기하는 거 보러, 그리고 남의 촬영장에 구경 온다는 게 신기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근데 유나 씨가 브루노 배우 진짜 팬이라더라.”
김 실장은 그제야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구나?”
“그런가 봐. LA에 놀러온 김에 겸사겸사.”
“하긴, 나 같아도 할리우드 배우 팬인데 이렇게 볼 기회가 있다면 무조건 보러 오지.”
김 실장은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니다. 근데 그게 유나 씨라니까, 또 신기하네. 절대 그런 성격이 아니니까.”
송유나를 떠올리며 말하는 김 실장의 태도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브루노의 엄청난 팬인가 봐.”
내 말에 김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아무튼, 유나 씨는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어.”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흐르고.
차는 금세 송유나가 머무는 호텔에 도착했다.
그리고 로비에서 걸어 나오는 그녀의 모습.
나는 창문을 열어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유나 씨, 여기요!”
내 부름에 그녀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내 인사에 송유나는 차에 올라탔고.
김 실장과 우리는 서로 짧은 인사를 나눈 채 곧장 현장을 향해 출발했다.
송유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내게 말했다.
“근데 놀러오라고 해놓고, 왜 연락도 안 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게… 저도 여기 와서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뭐… 그래도 내가 LA에 볼일이 있어서 왔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근데 유나 씨, LA에는 무슨 일이 있어서 온 거예요?”
내 말에 그녀는 서둘러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그냥 휴식이요. 다음 촬영까지 한참 남아서, 리프레시하러 왔어요.”
“오오, LA 좋죠.”
송유나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년부터 휴가 때 혼자 여행으로 꼭 LA 오고 싶었거든요. 진희성 씨가 없었어도 LA로 여행 왔을 거예요.”
랩을 하듯 속사포로 쏟아내는 그녀의 말.
나는 그녀의 답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답했다.
“아, 저는 제가 놀러오라고 해서 LA로 고르신 줄 알았어요.”
그러자 송유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허공에 가로저었다.
“제가 희성 씨 보러 왔겠어요?”
“하하, 농담이에요.”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팔짱을 꼈고.
나를 곁눈질로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브루노 배우님은 오늘 현장에 나오신대요?”
“모르겠어요. 가봐야 알 것 같아요.”
내 말에 그녀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한숨을 삼키고 있었다.
“…없으면 어쩔 수 없긴 한데. 근데 희성 씨는 브루노 배우님이랑 친해요?”
“저는….”
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잘라냈다.
“아니다. 브루노 배우랑 친할 리가 없지.”
“왜 안 친하다고 생각해요? 그럼 저 이따가 브루노랑 인사 안 시켜줘도 돼요?”
내 말에 그녀는 나를 쏘아보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아, 그 말이 아니고요…!”
그녀의 표정에 나는 피식 웃음을 보였다.
“우선 현장에 가서 있으면 같이 인사하러 가요.”
“네, 뭐.”
몇십 분 뒤.
현장에 도착한 차.
나는 차에서 내리는 송유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예요. 이쪽이 촬영 현장이고, 여기가 트레일러….”
“와아….”
송유나는 내 말을 듣기도 전에 현장을 바라보며 입을 떡 벌린 채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곤 잔뜩 상기된 얼굴로 내게 말했다.
“할리우드 스케일이 생각했던 거보다 더 대박인데요?”
그녀의 말에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리고 여기 트레일러가 대박이에요.”
나는 그녀에게 내가 처음 왔을 때, 그때의 그 기분을 다시금 끄집어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쪽은 식사하는 공간인데, 저기서….”
늘 차갑던 송유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견학 온 어린아이처럼 입을 떡 벌리며 내 말에 누구보다 흥미롭게 집중하고 있었다.
“우와! 장난 아니다.”
“그리고 더 대박인 거 보여줄게요. 트레일러 안은 영화에서 보던 거랑 똑같아요.”
나는 내 트레일러로 그녀를 데려왔고.
송유나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감탄을 내뱉었다.
“허얼… 이게 배우마다 있는 거예요?”
“모든 배우한테 다 제공되는 건 아니고. 주연이랑 조연, 몇몇 배우한테만이요.”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희성 씨한테도 이걸 제공해 줬다고요?”
송유나의 말에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럼요. 저 그래도 이 작품에서 꽤 비중 있는 조연이거든요? 하하.”
내 말에 그녀는 아랫입술을 내민 채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 그렇다고 하죠.”
나는 손뼉을 부딪치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브루노 보러 갈래요?”
“뭐야, 우리 브루노 배우님 오늘 왔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답했다.
“그럼요.”
“근데 왜 아까는 모른다고 했어요?”
“유나 씨 브루노 팬이라면서요. 그래서 미리 체크해 놨어요.”
“…대박.”
처음 보는 송유나의 천진난만한 얼굴.
나는 그 모습에 연신 미소를 보였다.
“일부러 장난쳤죠. 촬영 시작 전에 얼른 인사하러 가요. 소개시켜 줄게요.”
그녀는 넋을 놓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똑똑.
“들어오세요.”
브루노의 목소리가 트레일러 밖으로 새어 나왔고.
나는 송유나와 함께 브루노의 트레일러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희성 씨, 왔어요?”
그는 손을 뻗어 나를 반겼고.
나는 그와 악수를 하며 말했다.
“네, 제가 저번에 말했던 동료 배우. 한국에서는 저보다 유명하죠.”
“오오, 희성 씨보다 유명한 분이라니.”
브루노는 미소를 지으며 송유나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내 뒤에 숨어 브루노를 수줍게 보고 있었다.
“여기는 송유나 배우예요.”
“안…녕하세요. 송유나라고 합니다.”
송유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브루노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런 그녀의 생경한 모습에 나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반갑습니다. 브루노라고 해요.”
송유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브루노를 향해 말했다.
“저 브루노 배우님 팬이에요. 이렇게 만나게 돼서 너무 영광입니다.”
유창하지 않은 영어였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하는 것이 느껴졌다.
“오우, 감사해요. 한국에서 유명한 배우님이 제 팬이라니, 저도 영광이네요.”
송유나는 배시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저 브루노님 영화 다 봤는데, 작년에 나왔던 영화랑….”
그녀는 자신이 브루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통역해 달라는 듯 내게 말했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브루노에게 전달하며, 우리 셋은 대화를 이어갔다.
“아, 그리고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사진도… 찍을 수 있냐고 물어봐주면 안 돼요?”
“알겠어요.”
나는 고개를 돌려 브루노를 바라보며 물었다.
“브루노, 유나 씨랑 같이 사진 찍어줄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우리의 대화를 알아들은 송유나는 긴장하던 모습은 뒤로한 채.
반색하며 내게 자신의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여기요. 이걸로 찍어줘요.”
“그럴게요.”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은 그녀.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브루노와 함께 대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촬영을 하기 위해 트레일러를 빠져나왔고.
송유나는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저 희성 씨 촬영할 때, 아까 그 트레일러에 있으면 돼요?”
“네, 편하게 계셔도 돼요.”
“아….”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이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요, 트레일러 불편해요?”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촬영 구경해도 되나 싶어서요.”
평소 다른 이들의 촬영은 절대 보지 않는 그녀였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촬영을 보고 싶어서요?”
“네, 안 되겠죠?”
“아니요. 봐도 돼요. 제가 혹시 몰라서 감독님한테 허락은 받아뒀는데, 유나 씨가 안 보고 싶어 할 줄 알았거든요.”
그녀는 자신의 손을 맞잡아 깍지를 낀 채 활짝 미소 지었다.
“오오, 그럼 저도 가서 볼래요!”
***
북적이는 촬영 현장.
카메라가 돌기 전, 제프리 감독은 진희성과 리암에게 디렉팅을 하고 있었다.
“그럼 희성 씨가 이 부분에서 리암에게 다가가면 될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좋아요. 바로 촬영 들어갈게요.”
리암이 진희성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희성 씨가 편할 대로 해줘요. 내가 이쪽에서 그대로 있을게요.”
“그럴게요.”
그는 진희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고.
진희성은 리암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송유나는 먼발치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와아, 리암 엄청 유명한 배우인데, 희성 씨는 리암이랑도 친한 건가?”
제프리 감독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조용해진 현장을 확인한 뒤 소리쳤다.
“레디, 액션!”
이내 진희성과 리암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빠르게 배역에 몰입했고.
현장을 압도하는 연기력에 다들 숨을 죽인 채 진희성을 바라보았다.
‘뭐야… 진희성, 영어로도 연기 진짜 잘하네?’
송유나는 진희성의 연기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컷, 오케이!”
이내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진희성은 고개를 숙이며, 송유나에게로 다가갔다.
그럼과 동시에 리암이 그녀에게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유나 씨라고 했죠?”
“아, 네. 저를 어떻게….”
“희성 씨 지인이라고 들었어요. 오늘 희성 씨 촬영하고 있을 때, 필요한 거 있으면 저한테 편하게 말해도 돼요.”
그의 말에 진희성은 놀란 듯 리암을 바라보았고.
리암은 눈썹을 들썩이며 진희성의 어깨를 툭 쳤다.
“제가 희성 씨한테 잘 보이고 싶거든요. 하하.”
며칠 전.
리암이 진희성에게 사과를 하고, 둘의 관계가 회복된 후.
그는 진희성에게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듯 보였다.
송유나는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리암이 진희성에게 친절한 모습을 보며, 진희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진희성… 오늘 좀… 뭐,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