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15화 (215/303)

215화 #38 – 똑같은 사람 (5)

네바다주에서 보낸 첫 주말.

리암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던 후유증이 아무래도 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나 역시 긴장한 채로 온몸을 움직였던 터라, 주말에는 온전히 나를 위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시 밝아온 월요일.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

네바다주에서 촬영하는 내내 좋지 않았던 하늘.

항상 우중충한 잿빛 하늘과 시도 때도 없이 내리던 비.

하지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화창한 하늘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번 주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려나?”

새파란 하늘을 보며 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나는 서둘러 촬영장에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몇십 분 뒤.

“형.”

문 앞에서 기다리던 김 실장과 만난 후.

“오늘 날씨 좋더라.”

“어, 나도 눈 뜨자마자 날씨부터 봤어.”

김 실장은 내 방 앞, 리암의 호실을 곁눈질로 쓰윽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오늘 촬영장 가면 리암의 태도가 좀 바뀌었으려나?”

그의 말에 나는 쓰읍, 소리를 내며 답했다.

“그러게. 저번에 나한테 룸서비스에 쪽지까지 줬는데, 이제 좀 바뀌지 않았을까?”

리암을 구해준 날.

그가 내게 건넸던 쪽지와 음식.

그 이후 주말이 되었기에, 그와 마주칠 수가 없었다.

호텔에서도 평소 로비나 복도에서 마주칠 일이 굉장히 적은 편이었지.

나오는 시간이 겹치지 않았으니까.

나 역시 오늘 리암을 만나게 되면, 분위기가 어떨까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는 항상 나를 깎아내리기 바빴고.

그 행동은 홀로 있을 때를 떠나, 다른 배우들에게도 내 뒷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고는 했다.

그랬던 리암이 이제는 나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에 대해 너무나 궁금할 수밖에.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제프리 감독과 스태프들.

그리고 먼저 도착한 배우들에게 인사를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내 인사에 제프리 감독이 서둘러 다가왔다.

“희성 씨, 몸은 좀 괜찮아요?”

지난 일에 대해 심려가 깊었던 모양이다.

그는 눈썹을 길게 늘어뜨린 채 내게 물었고.

나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주말에 푹 쉬었더니 컨디션도 아주 좋습니다. 오늘 날씨처럼요.”

“하하, 다행이네. 혹시나 몸이 불편하거나 힘들면 이야기해요.”

나를 배려해주는 제프리 감독의 말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제프리 감독이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내가 고맙지. 그날 희성 씨가 아니었으면 우리 영화 촬영이 중단됐을 테니까. 언제든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알겠습니다.”

그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다시 현장으로 향했고.

그때 저 멀리서 걸어오는 한 사람.

리암이었다.

나는 리암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며 그를 바라보았고.

순간 우리의 시선은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러자 평소와는 달리, 그는 내 시선을 피해 마른침을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내게 사과와 감사 인사를 보냈지만.

이렇게 마주치니 민망한 모양.

내가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어 구해준 것은 맞지만.

항상 내 욕을 하고 멸시하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를 했으니, 지금 이 순간이 어색할 수밖에.

나는 그런 리암을 피하지 않고, 서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그의 발길을 기다렸다.

이내 리암은 내 앞에 멈춰 섰고.

우리는 그렇게 처음으로 살가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리암의 살가운 표정이 처음이었지.

나는 그가 동양인을 무시하기 전까지, 그에게 적대적인 마음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안녕하세요.”

리암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했고.

나는 그의 인사를 차갑게 거절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내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 반성하는 것까지는 좋았고.

그렇다고 리암에게 복수랍시고, 똑같이 그를 멸시하고 무시할 마음은 없었으니까.

그건 이전의 리암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리암, 좋은 아침이에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다시금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번에 촬영 끝나고 보내준 룸서비스 잘 먹었어요.”

“아… 다행이네요.”

그의 말에 나는 주변을 쓰윽 훑어보며 데시벨을 낮췄다.

“쪽지도 잘 받았고요.”

내 말에 리암은 메마른 입술을 혀로 훑으며 눈을 깜빡였고.

이내 턱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잠시 저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리암이 내게 공손한 말투로 이야기하자고 한 것도, 역시나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그간 자신의 행실이 있기에.

많은 배우나 스태프들이 보는 곳에서 단둘이 이야기하기는 민망한 듯싶었다.

나는 입을 꾹 닫은 채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현장 한쪽에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현장의 모든 사람이 보였지만, 거리가 있어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는 위치였다.

자리에 멈춰 서자 리암이 내 시선을 피한 채 입을 열었다.

“희성 씨, 그동안 내가 정말 미안했어요. 동양인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무례했던 거 인정할게요.”

그의 말에서 적어도 거짓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진심 어린 사과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리암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사실… 몇 년 전에 동양인 여자 친구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리암에게 되물었다.

“리암이 동양인 여자 친구를요?”

동양인을 무시하는 그였기에, 당연히 그런 과거가 있을 줄은 몰랐지.

“네, 그런데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죠. 그때부터였어요. 무작정 동양인을 싫어했던 게…. 그건 그냥 사람 대 사람이었던 건데 말이죠.”

리암의 고백에 나는 한숨을 삼켜냈다.

과거 연인과의 결별로 동양인을 무작정 싫어했다는 그의 말.

사과를 인정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이 온전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사과하는 그의 마음을 거절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

“맞아요. 그건 그냥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지. 그 일로 동양인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 제가 너무 힘든 시기를 보냈어요.”

리암은 구구절절 그 당시의 일들을 내게 늘어놓았고.

그의 말을 종합하자면, 결론은 내게 동양인 비하에 대한 사과와 내게 몹쓸 짓을 했다는 사죄의 이야기였다.

리암의 고해 성사가 끝나자,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앞으로는 동양인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그저 같은 인종으로, 모두 소중한 사람으로 대해줬으면 해요. 제가 아니더라도 말이죠.”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제가 유치했죠. 미안해요.”

그는 뻗은 내 손을 맞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지난 일은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그 누구도 희성 씨처럼 몸을 던져 동료를 구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우리는 맞잡은 손을 흔들었고.

나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앞으로 남은 촬영 잘해봐요.”

그제야 리암도 울상이던 표정을 환하게 바꿨다.

“제 사과를 받아줘서 고마워요, 희성 씨.”

***

“감독님, 카메라 세팅 10분이면 끝납니다.”

“아까 이야기한 대로 구도 잘 잡고.”

“네.”

제프리 감독은 스태프에게 지시를 보낸 뒤, 몸을 돌렸고.

그의 시선 끝에는 진희성과 리암의 투샷이 보였다.

“뭐지, 저 새로운 둘의 장면은…?”

제프리 감독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 그들을 흘긋거리며 바라보았다.

대화를 쉬지 않고 주고받고 있지만.

그들의 대화는 제프리 감독에게까지 들려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평소 진희성을 싫어하고 미워하던 리암이 그에게 사과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진희성… 진짜 대단한 물건이기는 하네.”

그의 말과 동시에 저 멀리에 있던 진희성과 리암은 악수를 주고받았고.

그 모습에 제프리 감독은 입꼬리를 길게 휘었다.

제프리 감독의 표정을 본 스태프 마테오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감독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테오를 향했다.

“진희성 말이야. 한국인이나 동양인이라서가 아니라, 진희성이라는 저 사람 자체가 좀 특이한 것 같아.”

마테오는 늘 제프리 감독과 모든 작품을 함께했기에.

그의 말을 곧장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좋은 뜻으로 말이시죠?”

“응, 사람을 끌어들이고 자신의 편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아.”

마테오는 제프리 감독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희성 배우는 사람 자체가 좋은 것 같더라고요. 모든 이에게 늘 관대한 사람이요.”

하지만 제프리 감독은 그의 말에 반대하듯 손을 허공에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렇다고 모두에게 잘해주는 건 아니더라고. 캐스팅하면서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찾아봤어.”

“제임스 감독이랑 작품하려고 했던 것들이요?”

“응, 진희성 저 친구는 데려갈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편으로 만드는 거야. 그게 아닌, 적이라면 딱 헷갈리지 않게 잘라내고.”

그의 말에 마테오는 입을 떡 벌린 채 머리를 흔들었다.

제프리 감독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처음에는 단순히 제임스가 택한 배우이기도 하고, 브라이언의 추천이기에 같이 작품하려고 데려온 건데. 이번 작품이 끝나고 나서도 또 함께 일해보고 싶은 친구야.”

평소 작품에 대해서, 배우를 보는 눈이 냉철한 제프리 감독인 것을 알기에.

마테오는 진희성을 보는 시선이 다시금 바뀐 듯 보였다.

“감독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진희성 배우가 더 대단해 보이네요.”

제프리 감독이 진희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진희성… 할리우드에서도 더 성장할 것 같아. 앞으로 더 눈여겨봐야겠어….”

***

며칠간 좋은 날씨가 유지되었고.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쉬었다가 다음 신 들어가겠습니다.”

스태프의 외침에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트레일러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

지이잉.

손에 들고 있던 휴대 전화에 진동이 울렸고.

나는 서둘러 화면을 바라보았다.

[발신인: 송유나]

송유나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나는 놀라 걷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뭐야, 유나 씨가 무슨 일로 나한테 전화를 했지?”

나는 서둘러 시간을 확인했다.

“이 시간이면 한국은 새벽일 텐데…?”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은 마음에 나는 서둘러 수신 버튼을 클릭했고.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지금 어디예요?

다짜고짜 내가 어디 있냐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눈썹을 들썩였다.

“송유나 씨 맞죠…?”

-제 번호도 없어요?

“아… 아니요. 있는데, 갑자기 이 시간에 전화를 했길래 혹시나 해서요.”

-희성 씨 촬영하고 있죠?

“네,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이 아니라… 아무튼, 지금 희성 씨 어디예요?

“저 지금 네바다주에 와 있어요.”

내 말에 송유나는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야, 할리우드가 아니라?

“예, 촬영이 있어서 네바다주에….”

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금 외쳤다.

-아니, 왜 말도 없이 네바다주로 갔어요!

“네? 그게 무슨….”

-희성 씨가 나한테 LA에 놀러오라고 했잖아요!

“아… 저는 또 뭐라고. LA에 놀러오세요. 저도 며칠 뒤에 촬영 마무리라 LA로 돌아가거든요.”

내 말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는 듯했고.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유나 씨 지금 LA예요?”

내 말에 그녀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답했다.

-뭐… 그냥 왔어요. 희성 씨를 보러 온 게 아니라, LA에 온 건데 놀러오라고 했던 게 기억나서 연락해본 거죠.

“오오, 잘됐네. 언제까지 있는 거예요?”

-정하고 온 건 아닌데, 아마 열흘 정도 있을 예정이요.

“그럼 저 LA로 다시 가면, 다음 주에 한번 볼래요?”

-음… 그러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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