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38 – 똑같은 사람 (4)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트레일러 밖에서 들려오는 스태프의 목소리.
“물어보니까, 너는 다음 신이라서 한참 뒤에 나가도 될 것 같더라.”
“알겠어.”
나는 말과는 달리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걸쳤고.
그 모습에 김 실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나가서 촬영하는 거 보려고?”
“응, 리암도 괜찮아졌는지 확인도 해보고.”
그는 심려되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래도 조금 쉬었다가 가지. 너도 아까 많이 놀랐을 텐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 나 완전히 멀쩡한데?”
“비 오니까, 조심히 다녀와. 나도 이거 하던 것만 마저 하고 나갈게.”
“알겠어.”
나는 김 실장을 뒤로한 채 트레일러를 나섰고.
여전히 주룩주룩 내리는 비.
우산을 쓰고 현장으로 걸어가자, 찰스와 브루노.
그리고 멀쩡해진 리암이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
이전까지는 나도 리암에게 좋은 마음이 없었기에,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지 않았지만.
그를 구하고 난 이후.
리암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라 그런지, 그에게 자꾸만 시선이 가게 되었다.
그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오전과 마찬가지로 연기에 몰입했다.
“레디, 액션!”
제프리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리암은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마치 저 배역으로 살아왔던 사람인 듯.
리암 자신이 겪은 조금 전의 일마저 전혀 없었던 사람처럼 말이다.
특별한 것 하나 없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리암은 연기를 펼쳤고.
나 또한 그와의 일을 잊은 채.
리암의 연기에 빠져들었다.
“컷, 오케이!”
제프리 감독의 오케이 사인.
그와 동시에 비는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어요.”
오늘도 그들의 연기를 보며 공부하던 나는 배우들이 카메라 앞을 빠져나오는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래서 연기가 끝난 그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자리였지.
브루노가 먼저 현장을 나섰고.
나는 그와 눈을 맞춘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브루노, 고생하셨어요. 오늘도 연기가 대단하던걸요?”
내 말에 그는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고마워요. 희성 씨, 아까 대단한 일 있었다는데. 정말 멋있어요.”
그는 내게 조용히 엄지를 치켜들었고.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유, 별거 아니었습니다.”
“별거 아니긴. 다 들었어요.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 생각보다, 아니 그런 사람 정말 없어요.”
그는 내게로 얼굴을 가까이 밀어 작게 읊조렸다.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요.”
브루노의 말에 나는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너무 좋죠.”
그는 나와 악수를 한 뒤에 자리를 떠났고.
그 뒤로 찰스와 리암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장을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지.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찰스와 리암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촬영이 끝난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당연히 주고받는 인사였을 뿐.
평소 리암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에도 늘 인사는 했으니까.
내 인사에 찰스는 활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희성 씨는 오늘도 연기 보고 계셨네요.”
“네, 저도 곧 촬영이라서, 일찍 나와서 공부했습니다. 하하.”
내 말에 찰스는 코를 찡긋거렸다.
“역시 대단해요.”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리암.
그는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이.
오늘도 내 인사를 못 들은 체하며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를 구했다고 해서 그와 친해지거나, 그동안의 일을 사과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럴 생각과 계획을 세워 구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차갑고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그의 태도.
그 모습에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따져 묻거나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았지.
다만, 나에게 갈릭이네, 시트콤에 출연했냐는 둥.
나를 깎아내리고 싶어 하던 이야기를 하지 않는 리암을 보며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이제 좀 민망하기는 한가 보네….”
저 멀리 멀어져가는 리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사람을 구해줬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감사 인사를 듣기 위해 한 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쌀쌀맞은 그를 보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
베이지색의 리클라이너 소파.
새하얀 벽지와 대리석 바닥.
벽에 걸린 스크린 같은 TV.
부유함이 뚝뚝 묻어나는 집.
출입문을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액자 하나.
송유나의 사진이었다.
“하암… 뭐야, 오늘이 그 시트콤 하는 날인가?”
그녀는 소파에 널브러진 채로 휴대 전화를 검색했다.
“오오, 맞네. 진희성이 출연한다는 시트콤, 지금 뜨는 것 같은데?”
송유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 한쪽에 마련된 자신의 홈 카페로 발길을 옮겼다.
♬♪-.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커피를 내리는 그녀의 모습.
“흐음… 오늘 커피 향기 좋네.”
커피 한 잔을 내린 그녀는 서둘러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뭐, 동료 배우 모니터링은 해줘야지. 같은 회사 소속이기도 하고.”
송유나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틀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시작하는 시트콤.
평소 영어 실력이 유창하지 않은 그녀는 자막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시트콤을 바라보았고.
“뭐… 저게 할리우드 유머인 건가?”
그녀는 목을 가다듬으며,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눈빛으로 TV를 바라보았다.
리모컨을 손 위에서 빙빙 돌리며, 재미가 없다는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듯했지만.
도무지 그녀의 TV 채널은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던 그때.
“어… 드디어 나왔다!”
TV 시트콤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
다름 아닌 진희성이었다.
송유나는 소파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몸을 일으켜 TV 앞으로 고개를 움직였고.
영어로 연기를 하는 진희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시선은 자막이 아닌, 진희성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참나, 영어는 또 언제 저렇게 배웠대?”
손에 들고 있던 커피는 테이블로 내려둔 지 오래.
“하긴, 할리우드 진출한다고 얼마나 영어 연습을 했겠어. 근데 생각보다 더 잘하기는 하네.”
어느덧 송유나는 시트콤에 빠진 것인지.
자신의 동료인 진희성의 연기에 몰입한 것인지, 아무런 말도 없이.
커피 잔에 얼음이 모두 녹아내릴 때까지 TV에 집중했다.
팟-.
시트콤이 끝남과 동시에 꺼진 TV 화면.
“생각보다 재밌네.”
그녀는 그제야 얼음이 모두 녹아버린 커피를 들이켰고.
소파에 다시금 등을 기댈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휴대 전화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진희성 대체 뭐야?”
송유나는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나보고 할리우드 놀러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할리우드 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연락이 한 번이 없지?”
그녀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진짜 어이없어.”
송유나는 분노를 삼켜내며 서둘러 휴대 전화 화면을 열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인터넷에 ‘진희성’ 이름을 검색했다.
“사람들이 진희성한테 악플 달고 그러진 않겠지?”
그녀는 최근 진희성에게 달린 악플을 하나 본 이후.
가끔 그의 이름을 검색할 때가 있었다.
“괜히 할리우드 가서 한국 위상을 떨어뜨리고 그러면 안 되니까, 내가 한번 훑어줘야지.”
송유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진희성과 관련된 기사를 살폈다.
“나랑 같은 회사인데, 진희성이 할리우드에서 욕먹으면 나한테 민폐잖아!”
그때.
띠링.
그녀의 휴대 전화에서 울리는 알람.
전화 화면 상단에 팝업 알림이 떴고.
“뭐지?”
송유나는 그 알람을 클릭했다.
[한국 항공]
-VIP에게만 주는 특별한 할인 혜택…!
항공사에서 울린 광고 알람이었다.
“뭐야, VIP 특가?”
송유나는 서둘러 항공사 광고를 클릭했고.
비행기 티켓 할인에 대한 내용이 촤르르 펼쳐졌다.
[한국 항공]
-한국 항공 특가!
VIP에게만 제공되는 특별한 혜택.
-부다페스트: 일등석 왕복.
-두바이: 일등석 왕복.
-푸껫: 일등석 왕복.
-호놀룰루: 일등석 왕복.
.
.
.
수많은 비행 편을 빠르게 스크롤해서 내리는 송유나.
무언가 찾는 항공편이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멈추게 하는 글자.
-LA: 일등석 왕복.
송유나는 재빠르게 글자를 클릭했다.
“…찾았다!”
그녀의 클릭으로 전환된 화면.
“뭐야, LA 가는 게 이렇게 싸잖아?”
송유나는 LA 일등석 항공편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평소에 여기 900만 원은 족히 넘었는데, 지금 VIP 회원 행사로 860만 원에 갈 수 있다는 거잖아?”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헐, 40만 원이나 할인해 주는데, 안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900만 원과 860만 원.
LA 일등석이라는 자리를 감안하면, 사실 큰 차이가 없는 금액이었다.
40만 원의 차이 정도는 평소 시간에 따라, 날짜에 따라서도 항상 변동이 있는 금액이었으니까.
“뭐야, 나 또 이런 40만 원 아끼는 건 못 참지. 다른 것도 아니고, 항공권으로 40만 원 아끼는 게 어디 늘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송유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붙잡듯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쩔 수 없이 LA 한 번 가줘야겠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항공편을 클릭했다.
“그래, 어차피 작품을 시작하려면 꽤 시간이 남았기도 하니까. 가서 리프레시하고 오는 거야. 이 표를 보고도 어떻게 발권 안 할 수가 있겠어?”
송유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신이 난 얼굴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
“하아… 오늘 하루 진짜 길었다.”
나는 호텔에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곧장 몸을 기대 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자 떠오르는 오늘의 기억.
리암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던 순간이 선명히 그려졌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내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혹은 조금만 빨랐더라면.
리암이 다쳤거나, 아니면 내가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그래, 어쨌든 다 무사하니까 다행이지.”
그때.
딩동.
방문의 초인종이 울렸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뭐지, 형 씻고 우리 방으로 온다고 했는데?”
김 실장과는 각자의 방에서 씻고 난 뒤에 만나기로 했고.
하지만 방으로 들어온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김 실장이 오기에는 너무나 이른 시간이었으니까.
“…누구세요?”
조심스레 문으로 다가갔고.
문밖에서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룸서비스 왔습니다.”
“네?”
나는 룸서비스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고.
문 앞에는 호텔 직원이 음식이 담긴 카트를 끌고 앞에 서서 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아, 네. 근데 저 룸서비스는 안 시켰는데….”
내 말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몸을 돌려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건너편 방에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앞방이요?”
“네, 맞습니다.”
모든 방의 배우를 외우고 있지 않았기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읊조렸다.
“뭐지, 찰스가 보낸 건가?”
하지만 찰스가 내게 음식을 보낼 리는 없었다.
“브루노가 오늘 내게 친해지자고 했는데, 브루노가 보냈으려나?”
직원은 내 룸으로 들어와 음식을 펼쳤고.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네.”
내 방을 빠져나가려던 직원이 급히 발길을 멈춰 세웠다.
“아, 그리고 이 쪽지를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조심스레 열린 방문을 닫고 나갔고.
나는 문 앞에 서서 그가 건넨 쪽지를 펼쳤다.
[sorry and thank you.]
심플하게 적힌 쪽지.
미안하고 고맙다는 짤막한 문구였다.
그 내용을 읽자마자 단번에 앞방.
그러니까 이 룸서비스를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리암… 정신 차렸나 보네.”
나는 그 쪽지를 빤히 바라보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