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212)화 (212/303)

212화 #38 – 똑같은 사람 (2)

“하암….”

하품과 함께 맞이한 아침.

손을 더듬어 휴대 전화를 찾았고.

아직은 촬영 준비하기에 너무나 이른 시간.

더군다나 김 실장도 깨지 않은 시간이었고.

알람이 울리기도 한참 전이었다.

다시금 눈을 감아봤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꿈의 기억에 절로 눈을 뜨고 말았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일찍 깬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고.

멍하니 명상을 하던 와중.

자꾸만 떠오르는 꿈에서 봤던 여인.

한 여자의 뒷모습이 계속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고.

그 아련한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아려왔다.

대체 그 여자는 나와 무슨 사이인 거지?

단순히 지나가는 여자를 보면서 내가 이런 마음이 들지는 않을 텐데….

자꾸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에 한없이 깊은 어둠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다른 일이라도 하자!”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네바다주에서의 첫 아침.

이곳에서 일찍부터 뭘 하면 좋을까, 생각했고.

결론은 하나였다.

“…조깅!”

평소 새로운 곳에서 걷는 것을 좋아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환경과 주변을 둘러보면 항상 새로운 마음이 들고는 했으니까.

서둘러 가벼운 운동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푸욱 눌러쓴 채 문을 벌컥 열었다.

여전히 우중충한 하늘.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언제 갑자기 비가 내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하늘이었다.

“우산이 어디 있더라…?”

방문 앞을 뒤적여 우산을 찾았고.

우산을 손에 꼭 쥔 채로 호텔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호텔 로비는 직원들의 활기참으로 북적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들의 밝은 인사에 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한마디의 말로 오늘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호텔 근처에는 투숙객을 위한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었고.

자연스럽게 산책로로 발길을 옮겼다.

“이야, 우중충하기는 한데, 너무 예쁘다.”

널찍하게 펼쳐진 길.

거기다 예쁘게 피어 있는 꽃과 잘 정돈된 나무들.

이 길을 걸으며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여기는 매일 아침마다 와야겠다. 너무 좋은데?”

허리를 숙여 빨갛게 피어 있는 작은 꽃을 바라보았고.

나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하게 만드는 그 꽃.

그때.

투둑-.

그 꽃 위로 떨어지는 물 한 방울.

“어? 비 오는 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이내 내 얼굴에도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비 오네.”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펼쳤고.

쏴아-.

이내 우산을 가득 적실 정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돌아가기에도 애매한 거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을 하다, 이내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갔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더 가보지 뭐.”

그렇게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아무런 음악 없이 걷는 이 길.

투두둑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BGM 삼아 걷는 이 거리가 내게는 엄청난 힐링이 되었다.

아무 근심 걱정도 없이 이곳에 집중했기에.

이 시간이 앞으로도 내게는 소중해질 것만 같았지.

그때.

“어… 희성 씨!”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우산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고.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았다.

“여기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에블린이었다.

“…에블린?”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저 끝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의 끝에는 비를 피하기 위해 쭈그려 앉아 있는 에블린이 보였다.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로 다가갔고.

“에블린, 왜 여기에 있어요?”

내 물음에 그녀는 내게로 폴짝 뛰듯이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아침에 일찍 눈이 떠져서 산책하러 왔는데, 비가 갑자기 내리지 뭐예요.”

그녀는 자신의 젖은 몸을 툭툭 털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 쪽으로 우산을 조금 기울여, 에블린의 어깨에 비가 맞지 않도록 우산을 씌웠다.

“저도 산책 왔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더라고요.”

“맞아요. 희성 씨, 근데 여기 너무 예쁘죠?”

“네, 앞으로 자주 올 것 같네요. 길이 진짜 예쁜 것 같아요. 비만 안 오면, 조깅하기에 딱 좋은데.”

“그러게요.”

점점 더 굵어지는 빗방울.

나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하늘을 쳐다보았고.

하늘의 색은 점점 더 심상치 않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비 너무 심하게 오는 것 같은데, 들어갈까요?”

그녀는 내 말에 자신도 내리는 비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돌고 싶었는데, 내일 다시 와야겠어요.”

“그러게요. 오늘은 이만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에블린과 나는 우산 하나를 같이 쓰며 호텔로 다시 향했고.

“희성 씨는 할리우드에서 연기하는 건 좀 어때요?”

어색한 분위기.

그녀와 많은 이야기도 나눠본 적이 없는데.

단둘이 작은 우산 안에 붙어서 함께 걸어가고 있기에, 더더욱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에블린은 그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내게 질문을 던졌고.

나는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할리우드가 왜 할리우드인지를 매일 실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역시 스케일이….”

휘이익-.

그때 바람까지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그 바람 탓에 우리의 옷은 우산을 쓰고 있음에도 홀딱 젖기 시작했고.

쏴아아아-.

거세게 몰아치는 비.

앞뒤로 불어대는 바람에 우리는 대화를 이어갈 수도 없어졌다.

그리고 이내 보이는 호텔.

“좀만 더 가면 호텔이니까, 그래도 다행이에요.”

그녀가 젖지 않도록 우산을 에블린 쪽으로 씌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몸은 어디로 불지 알 수 없는 바람에 젖어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 두 명이 한 우산을 쓴다면, 둘 다 젖을 게 분명했고.

더군다나 그녀 쪽으로 더 씌운 우산이기에, 이미 내 몸은 다 젖어 있었다.

나는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에블린, 이거 우산 혼자 쓰고 젖지 않게 조심히 와요.”

“네? 희성 씨는요?”

그녀는 그제야 쫄딱 젖은 나를 발견했고.

“뭐야, 나랑 같이 우산 써서 희성 씨는 다 젖은 거예요?”

“아니에요. 바람이 불어서….”

“미안해요. 희성 씨가 저한테 더 붙어서 걷는 게 어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에 우산을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매니저가 아침에 깨워달라고 했는데. 빨리 가야 될 것 같아요. 우산 쓰고 조심히 오세요.”

“어… 희성 씨!”

나를 부르는 에블린을 뒤로한 채, 나는 서둘러 모자를 푸욱 눌러쓰고 호텔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비를 맞은 김에, 더 젖는다고 문제 될 건 없었으니까.

나는 서둘러 호텔 로비로 앞만 보고 달렸고.

금세 호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호텔로 들어가고 있는 진희성의 모습.

비에 잔뜩 젖어버린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블린은 우산을 손에 꼭 쥔 채로 옅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쏴아아-.

여전히 멈추지 않고 내리는 비.

나와 김 실장은 촬영 준비를 하며,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형, 비 진짜 많이 온다.”

“그러게. 날씨가 진짜 이상하다.”

“응, 근데 또 오늘 찍을 신들은 비가 오면 좋은 신이잖아. 그래서 일부러 날씨 이런 날 골라서 야외 촬영 온 건가?”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하긴. 안 그러면, 비 내리는 효과 주려고 물을 부어야 했을 테니까.”

“맞아. 얼른 촬영장에 나가야겠다.”

나와 김 실장은 함께 현장으로 나섰고.

배우들이 모여 있는 곳.

천막이 쳐져 있는 곳에 그들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찰스는 손을 흔들어 인사했고.

그 옆에는 나를 싫어하는.

그리고 동양인 비하를 일삼는 리암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현장에서도 그를 무시하고 인사를 안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는 역시나 나를 곁눈질로 흘긋 바라보며 무시했고.

그럼에도 나는 그저 옆에 있는 다른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며 미소 지었다.

리암에게 더욱 기분 나쁜 건 이런 내 행동일 것이다.

오히려 동양인 비하, 나를 무시하는 행동을 보였을 때.

내가 기죽고 그에게 굽실대는 걸 원할 테니까.

하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

나는 다른 배우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눴고.

리암은 옆에 있던 찰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찰스, 그 시트콤 봤어?”

“어떤 시트콤이요?”

리암은 마치 내가 들으라는 듯 천막 안의 모든 사람이 듣도록 크게 외쳤다.

“아니, 저기 저 동양인. 시트콤에 출연했던데?”

“오오, 정말요?”

찰스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답했지만.

리암이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런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혀를 내두르고 고개를 가로젓는 리암의 모습.

그는 쓰읍, 소리를 내며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휴, 할리우드 처음 오니까, 얼굴 알리려고 급 떨어지게 단역으로 나갔다니까?”

급이 떨어진다는 그의 말.

나는 참다못해 몸을 돌려 리암에게로 다가갔다.

“오오, 제가 나오는 시트콤을 보셨나 봐요?”

내 말에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뭐요?”

“아니, 저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 제가 무려 단역으로 나오는 시트콤까지 챙겨봐 주시고, 감사해요.”

리암은 내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고는 혀로 볼이 부풀게 밀어냈고.

못마땅함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춘 채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고.

다시 나와 대화를 나누던 배우들에게로 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리암이 코를 부여잡은 채 코맹맹이 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후, 어디서 갈릭 냄새가 이렇게 나는 거야?”

그의 말에 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리암에게 되물었다.

“갈릭이요?”

“어, 갈릭 향수를 뿌린 것도 아니고, 진짜 토할 것 같아.”

또다시 나를.

그리고 동양인 비하를 하는 그의 말에 나는 한숨을 겨우 삼켜내며 입을 열었다.

“리암.”

내 부름에도 그는 대답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갈릭 냄새… 저한테 하는 말이죠?”

“아니요. 그냥 어디서 갈릭 냄새가 나길래요.”

그의 말에도 나는 화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건 하수나 하는 짓이니까.

오히려 이럴 땐, 대인배로 대응하는 게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를 엿 먹이고 싶어 하는 리암에게도 좋은 방법이었다.

나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답했다.

“제가 갈릭을 좀 좋아해서요. 하하.”

내 말이 끝나자 주변에 있던 배우들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오, 나도 마늘 좋아하는데, 근데 한국인들은 정말 마늘을 그렇게 좋아해요?”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고.

리암은 그런 나를 곁눈질로 쏘아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고 있었다.

***

“촬영 들어갈게요!”

스태프의 말에 천막 아래에 있던 우리는 대본을 바라보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신은 리암과 찰스가 함께하는 신.

아무리 내가 리암에게 좋은 감정이 없더라도, 리암의 연기에서 배울 점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연기를 배우기 위해 옆에 서서 자리를 지켰다.

여전히 하하 호호 떠들며 웃고 있는 리암과 찰스의 모습.

하지만 슛이 들어가면, 곧바로 언제 그랬냐는 듯 배역에 몰입하는 그들이었다.

“레디, 액션!”

제프리 감독의 사인과 동시에 그들은 눈에 힘을 주고 연기에 돌입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은 그들의 연기에 집중했고.

나는 리암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때.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고.

바람 또한 세차게 불어왔다.

나는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서둘러 다시 시선을 촬영장으로 옮겼고.

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둔 천막.

그 사이로 살짝 삐져나온 전선이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어? 저러다가 비 닿아서 전기라도 튀면 어떻게 하지?”

그 전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그 장비를 담당하고 있는 스태프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촬영 중이기에, 조심스레 발길을 그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여전히 리암과 찰스는 배역에 몰입해 연기를 이어가고 있었고.

순간.

파지직-!

내가 걱정하던 촬영 장비.

그 전선에 물이 닿는 순간 거센 스파크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스파크가 튀는 전선은 리암의 얼굴 쪽으로 떨어지는 게 내 눈에 똑똑히 보였고.

나는 그걸 보자마자 전혀 고민이나 망설임 없이 서둘러 몸을 던졌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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