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207)화 (207/303)

207화 #36 – 시야를 넓히면 (4)

“진심으로 하는 소리예요?”

브라이언은 내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요. 지금 브라이언이 출연하고 있는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는 것도 어려운 걸까요?”

내 말에 그는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넋을 놓고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갑자기 단역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브라이언은 앞에 놓인 커피를 급히 마셨고.

다시 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말투로 물었다.

“설마… 제프리 감독한테 내가 진을 소개해 줬기에, 고마워서 우정 출연이라도 해주려는 건가?”

그의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는 손사래를 치며 내게 말을 이어갔다.

“아휴, 그런 거라면 정말 괜찮아요. 이렇게 출연해주면, 내가 미안해서 안 돼.”

다소 흥분한 듯한 그에게 나는 웃으며 답했다.

“물론 브라이언한테 고마운 마음이 있는 건 맞지만. 그것 때문에 출연을 하겠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그럼?”

그제야 브라이언은 집중해 내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나는 할리우드에서 수많은 부분을 다 체험해보고 싶어요. 지금 운이 좋게도, 제프리 감독님의 작품에서 비중이 있는 조연을 맡았지만.”

브라이언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귀를 기울였고.

“단역도 해보고 싶고, TV 쇼, 드라마, 뭐든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요.”

나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당연히 주연도 해보고 싶고요. 하하.”

그도 내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주연… 그건 나도 마찬가지. 하핫.”

그렇게 다시금 우리는 웃음을 되찾았고.

브라이언은 아직도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았는지, 내게 물었다.

“그래서 굳이 단역까지 해보고 싶은 거고?”

“네, 배우로서 단역을 맡는다고 해서 급이 낮아지고 높아지고, 그런 게 제게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역부터 조연, 주연으로 오르는 건데.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요?”

“물론 어떤 역할을 맡는가에 따라 급이 정해지는 건 맞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는 배우로서 ‘성장’하는 게 더 중요해요.”

내가 할리우드에 와서 느낀 점이었다.

제프리 감독도, 그리고 제임스 감독도 당연히 한국에서 펼친.

그리고 뉴욕에서 내가 즉흥으로 펼쳤던 연기를 보고 나를 캐스팅한 건 맞지만.

나는 이곳에서 연기를 펼치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아직 연기를 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내 연기력이 이곳에 있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할리우드에서 톱 급을 찍고 있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그들에게 감탄을 했고.

나 역시 그들처럼 대단한 연기를 펼치고 싶은 욕망이 더 생겼을 뿐이다.

할리우드가 처음인 내게, 이곳의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싶었고.

그렇게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며 성장하고 싶은 것이었지.

브라이언은 내 말에 잠시 대답을 멈추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겠어요.”

그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내게 말을 이었다.

“진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대단한 배우인 것 같아요.”

“네?”

브라이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내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미 훌륭한 작품에 좋은 역할을 맡고 있는데, 성장하겠다고 단역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니까요.”

나는 그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니에요. 대단하긴요. 제가 할리우드가 처음이라, 부족한 게 많아서 그렇죠.”

“전혀. 진은 전혀 부족하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연기에 대한 마음은 넘쳐흐를 정도인걸요.”

“하하,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브라이언은 내게 엄지를 치켜들었고.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내가 브라이언이 출연하는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는 건 가능한 걸까요?”

그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양 손바닥을 들고 어깨와 함께 으쓱였다.

“오오, 너무 당연하죠!”

“정말요?”

“진 정도의 배우가 단역으로 나온다고 하면, 아마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예요.”

나는 그의 말에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렇게 반겨 주신다면, 너무 좋겠네요.”

“게다가 진은 한국인이잖아요. 동양인 배우는 많아도, 한국인 배우는 거의 없거든요.”

그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국인 배우라는 게, 유니크하잖아요. 완전 독특하지.”

“그럼 감독님께 이야기 좀 해봐 줄 수 있어요?”

브라이언은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오케이. 내가 필릭스 감독님한테 바로 물어볼게요.”

“고마워요, 브라이언.”

내 인사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더 고맙죠.”

***

브라이언과 헤어진 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김 실장을 떠올리며 그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햄버거를 포장했다.

브라이언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나왔기에.

단역으로라도 브라이언이 출연하는 작품에 나가겠다고 말하면, 분명 좋은 소리는 하지 않을 터.

항상 나를 걱정하고 챙기는 김 실장임을 알기에, 햄버거를 양손에 쥔 채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형… 나 왔어.”

그가 밝게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오오, LA에서 친구도 만나고 오고, 역시 대단하네.”

“에이- 대단하긴. 형, 밥은?”

그는 마침 허기가 졌는지 배를 손으로 문지르며 내게 답했다.

“아까 먹었는데, 조금 고픈 것 같기도 하고. 너는 먹고 온 거야? 안 먹었으면….”

그러다 김 실장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햄버거에 고정됐고.

“뭐야, 햄버거 사왔어?”

“어, 형 좋아하는 햄버거 집에서 사왔어.”

그는 입꼬리를 올려 배시시 웃으며 포장지를 당겼다.

“아이고, 하루 내내 집에 혼자 둔 게 미안했구나? 나는 괜찮은데….”

말과는 달리 잔뜩 신이 난 얼굴로 햄버거를 뜯는 김 실장의 모습.

나는 그런 그를 보고 웃으며,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형, 우리 저기 앉아서 먹자.”

“좋지.”

곧장 마주 보고 앉은 우리.

나는 그가 햄버거를 거의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고.

배가 많이 고팠는지, 허겁지겁 비운 그를 바라본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 나 할 말이 있는데….”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놀란 얼굴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뭔데, 말해봐. 무슨 일 있었어?”

김 실장은 다 먹은 햄버거 포장지를 내려놓으며 내게 집중했다.

“그게… 나 브라이언 만나고 왔잖아.”

“응.”

“브라이언이 요즘 출연하고 있는 작품 있다고 내가 말했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 저번에 말해줬지. 그게 왜?”

“나 거기에 출연을 좀 하고 싶어서….”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 실장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뭐야, 캐스팅 들어온 거야?”

브라이언을 만난 게, 내가 캐스팅이 되어 만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쓰읍, 소리를 내뱉었다.

“음… 그건 아니고. 내가 출연을 하고 싶다고 부탁을 했는데.”

“이미 촬영 중인 거라며. 근데 무슨 역할로 갑자기 출연을 해?”

“그게… 단역으로의 출연은 지금도 할 수 있다고….”

김 실장은 들고 있던 휴지도 내려놓은 채 내게 소리쳤다.

“뭐? 단역?”

당황한 김 실장의 얼굴.

그는 말문이 막힌 듯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고.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몸을 움찔거리며 물었다.

“뭐야.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지금?”

“…응.”

김 실장이 마른침을 삼키곤, 당황한 마음을 겨우 누르며 내게 물었다.

“지금 브라이언이 무슨 작품을 하는 건데. TV 쇼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 TV 시트콤이야.”

“아니… 그걸 네가 왜….”

김 실장은 말문이 막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고.

나는 서둘러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형, 내 말 좀 들어봐. 나 지금 거의 주 3일 정도만 촬영하잖아. 나머지 이틀은 일이 없어. 주말에도 쉬고 있고.”

“응.”

그는 영혼 없는 표정으로 내 말에 맞장구를 치듯 답했고.

“나는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가 않더라고. 할리우드에서 내가 또 언제 시트콤에 출연해 보겠어. 그리고 이번 작품이 나가고 나면, 단역을 맡을 일은 더더욱 없을 거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 말대로 앞으로 더더욱 맡을 일 없는 단역을 왜 자처해서 나가냐는 말이야.”

나는 미소를 지으며 김 실장에게 답했다.

“뭐든 경험해 보면서 성장하는 게 좋잖아. 그리고 형도 나한테 이렇게 시간을 보내지 말고, 취미 생활을 가지는 게 어떠냐며!”

“야!”

내 말에 김 실장은 내가 화들짝 놀랄 정도로 소리쳤다.

“아, 깜짝아.”

“내가 취미를 찾으라고 했지, 언제 일을 찾으라고 했어?”

그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스르르 올리며 답했다.

“에이, 형. 나는 연기하는 게 직업이자 취미야.”

“하아….”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고.

“맞다. 네 일이 많아진 건, 미안해.”

내 말에 그는 고개와 손을 동시에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

김 실장은 결국 헛웃음을 보이며 혀를 내둘렀다.

“어휴, 진짜 너를 누가 말리겠냐.”

그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익살스러운 얼굴로 김 실장에게 말했다.

“형, 이해해주는 거지?”

“몰라, 인마.”

퉁명스럽게 답한 김 실장이 곧장 다이어리를 가져와 펼쳐보였다.

그러고는 날짜를 바라보고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쪽에서 연락 오면, 날짜는 일단 조율 좀 해볼게.”

“형, 고마워.”

그는 내 말에 눈을 감고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고.

나는 그런 김 실장을 보며 말했다.

“형, 그리고 나는 그쪽에 최대한 맞춰도 돼. 단지 지금 제프리 감독의 작품에 영향이 가지 않을 스케줄이면 충분해.”

내 말에 김 실장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다 그쪽에 맞추면 어떡해. 출연료도 우리가 정하려면….”

나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외쳤다.

“출연료도 굳이 우리가 크게 부를 필요 없어. 그냥 그쪽에서 하자는 대로 해도 될까?”

“너 그럼 진짜 경험해 보려고, 출연하는 거야?”

나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응, 이건 돈 때문에 하는 게 아니니까.”

김 실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읊조렸다.

“희성이 넌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대단한 놈이야… 진짜.”

***

똑똑.

‘WG 엔터 한시진 본부장실’

소파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본부장이 닫힌 문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네, 들어와요.”

이내 문이 열리고,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

송유나였다.

“본부장님,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유나 씨.”

그는 의자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고.

송유나는 자리에 앉으며 그에게 답했다.

“저를 부르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맞아요. 점심은 먹고 왔어요?”

“네.”

짧고 명료한 송유나의 대답.

뚝뚝 끊기는 대화였지만, 농담하며 대화를 나누는 목적이 아니었기에.

한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유나 씨, 내가 최 실장한테 말했는데. 차기작으로 드라마를 들어갈지, 영화로 들어갈지는 고민해 봤어요?”

“음… 안 그래도 최 실장님한테 얘기는 들었어요.”

한 본부장은 그녀의 대답에 집중했고.

“저는 그건 크게 중요하지는 않고….”

송유나가 진지하게 말을 이어가던 그때.

띠리리리.

한 본부장의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시선을 흘긋 돌려 화면을 바라보았고.

이내 다시 송유나를 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미안해요, 계속 이야기해요.”

송유나 역시 테이블에 놓인 그의 전화를 곁눈질로 살폈다.

[발신인: 김지훈 실장 – 진희성]

발신인을 확인한 송유나는 눈을 깜빡이며, 한 본부장에게 답했다.

“아니에요. 전화 받으셔도 돼요.”

“유나 씨가 더 중요하니까, 이따 받으면 돼요.”

송유나는 SNS 활동도, 자신에게 연락도 없는 진희성이 궁금했고.

손사래를 치며 한 본부장에게 다급히 말했다.

“저거 국제 전화 같은데, 급한 일로 전화 온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한 본부장이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그럼 잠깐만 전화 받을게. 미안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송유나의 계속되는 권유에 한 본부장은 전화의 수신 버튼을 클릭했다.

“여보세요.”

-본부장님, 통화 가능하십니까?

“어, 무슨 일 있어?”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거기는 지금 밤 아니야?”

-예, 맞습니다. 밤 9시입니다.

“근데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한 본부장의 통화 볼륨이 큰 덕에, 송유나의 귀에도 김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송유나는 자신의 휴대 전화를 보는 척하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희성이가 이번에 TV 시트콤에 출연을 좀 하고 싶어 해서요.

“오오, 거기까지 가서 배역도 따낸 거야?”

-그게 실은 희성이가 단역으로 출연을 하겠다고 해서, 제가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뭐? 단역?”

한 본부장의 큰 목소리에 송유나는 앉아 있다가 몸을 움찔거렸고.

더욱 그들의 대화는 송유나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네, 단역이고, 지금 촬영하는 작품에는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

그렇게 한 본부장과 김 실장은 진희성에 대한 이야기로 통화를 이어갔고.

송유나는 빈 휴대 전화 화면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진희성, 대체 할리우드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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