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36 – 시야를 넓히면 (3)
뜨겁다 못해 타오를 듯 불길을 내뿜는 이곳.
“아악!”
“사… 려줘…!”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에 비명은 내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았다.
나는 이 뜨거운 불길 속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름 돋는 비명에 더욱 지쳐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이건 살기 위해 숨을 쉬는 것이 아니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그러니까 이 고통을 끝내고 싶어도 끝내지 못하도록, 신이 내 숨을 쉬게끔 만드는 것이었지.
이 지옥에서는 절대 고통을 끝맺음할 수가 없었다.
평생 느껴야 하는 이 괴로움.
“꺄아악!”
어디에서 누군가의 몸이 불에 타고 있는지.
그들의 몸에 불이 아닌 무언가가 튀고 있는지.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전혀 보이지도,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었다.
그저 이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고만 있을 뿐.
차라리 눈을 감고만 싶었다.
이 뜨거운 불구덩이도 보고 싶지 않았지.
“으아아악!”
나는 이 거지 같은 비명 소리를 듣지 못하게, 내 귀를 도려내 버리고 싶었다.
괴로움 속에서 몸을 움직였고.
손으로 귀를 뜯어내고만 싶었지만, 그 어떤 행동도 행위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곳에 서서 찢어질 듯한 몸과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께 받아낼 뿐.
나아가 나 역시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입 밖으로 전혀 소리도 내지르지 못한 채.
가슴속 깊은 곳에서만 울부짖었고.
그러다 점점 나는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아….”
점차 시야가 어두워지고, 불타오르는 검붉은 용암이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팟-!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현실로 돌아왔는지,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 그때.
“하아… 빨리!”
내 손을 붙잡고 있는 누군가.
나는 이 여자의 손을 놓치지 않게 꽉 잡고, 죽을힘을 다해 내달리고 있었다.
…젠장.
여전히 내 꿈속이었다.
혹여나 놓칠세라 손에 핏줄이 터질 정도로 꽉 부여잡은 손.
나는 이 여성의 손과 깍지를 낀 채, 지옥 불구덩이 사이를 내달렸다.
“조금만 더… 힘내…!”
내 뒤를 겨우 따라 달려오고 있는 이 사람.
이 여성은 내가 모든 것을 잃어도 좋을 만큼.
내 목숨을 바쳐도 될 만큼.
그 정도로 내가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여자였다.
내가 이 손을 꽉 붙잡은 채, 왜 달리는지 정확한 영문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저 이 고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괴로움밖에 존재하지 않는 지옥.
지옥 불구덩이에서 내가 사랑하는 이 여인을 놔둘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더 달려야 해….”
하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불길.
뜨거운 불길은 우리를 점점 옥죄여오고 있었고.
나는 숨이 턱턱 막히는 이곳에서 점차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팟-!
“하아, 하아….”
내 이마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무언가.
뭐지.
아직 꿈인가…?
몸이 축축하도록 다 젖은 이 기분.
그때.
“희성아, 희성아!”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선명해졌고.
“희성아, 괜찮아?”
선명해진 시야에 들어온 김 실장의 모습.
“야, 진희성. 내 얼굴 보여?”
그는 심각한 얼굴로 내 어깨를 잡아 흔들었고.
나는 겨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 보여, 형.”
“뭐야, 악몽이라도 꾼 거야?”
“응, 그런 것 같아.”
“운전하는데, 너무 끙끙 앓길래 잠깐 갓길에 세웠어. 근데 네가 막 식은땀을 미친 듯이 흘리고 있는 거야.”
그의 말에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 숙소에 도착하기 전 도로였고.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며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형, 나 괜찮아. 그냥 악몽을 꾼 거야. 출발해도 돼.”
내 말에 그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이야. 얼른 집에 가자. 가서 좀 쉬고 싶어.”
“…알겠어.”
김 실장은 다시 운전대를 잡아 숙소를 향해 출발했고.
나는 김 실장 덕에 몽롱하던 정신을 되찾고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눈을 지그시 감자 다시 떠오르는 조금 전 꿈의 내용.
뜨거운 지옥에 있다가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손을 잡고 그곳에서 도망치는 내용의 꿈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꿈이지?
그러고 보니… 1만 년의 삶.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1만 년의 삶을 사는 벌.
그 1만 년은 10년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지금 진희성으로도 10년을 살게 되는 것이겠지.
내가 윤회한다는 걸 깨닫고 난 후에 10년이 아니라.
진희성의 몸으로 시작하고 나서 10년.
그러니까 이제 약 2년 남짓밖에 안 남았다는 뜻이다.
2년이라….
2년 뒤에 진희성으로 10년이 끝나고.
그리고 1만 년의 삶도 동시에 끝나겠지.
그때는 내가 선택을 하는 시기가 올 것이다.
계속해서 인간으로 살 것인가, 무(無)로 돌아갈 것인가를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드는 생각.
지금 촬영하고 있는 할리우드 첫 영화가 개봉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일 텐데….
내가 원하는 배우로서의 삶이 날개를 달기 시작할 즈음.
나는 이 생을 살지, 말지를 정해야 한다니….
“하아….”
계속해서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2년 뒤 삶이, 그리고 벌이 끝난다고 해서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이 생에서의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며칠간 쉴 새 없이 이어진 촬영.
첫 촬영이 시작하고 나서 내가 출연하는 신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있었다.
“희성아, 오늘도 고생 많았어.”
김 실장의 말에도 나는 환한 웃음을 유지한 채 답했다.
“아니야. 여기 와서 촬영 끝나면, 한국에서 끝났을 때랑 좀 다른 것 같아.”
그는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여기는 진짜 최적화가 되어 있기는 한 것 같아.”
“맞아. 이래서 다들 할리우드, 할리우드 하는 건가 봐.”
한국 배우들이 모두 꿈꾸는 이곳.
아니, 세계의 모든 배우가 그토록 오고 싶어 하는 할리우드.
이유가 분명히 존재했다.
할리우드는 배우들을 위해, 그리고 영화인을 위한 체계가 너무나 뚜렷하고 분명했다.
우선 할리우드의 촬영 환경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스태프들은 주말을 제외하고 주 5일 근무.
거기에 매일 8시간을 지키며 일했다.
혹여나 날씨나 기타 요인으로 인해 촬영이 지연되면, 아주 길어야 10시간.
10시간을 절대 넘지 않는 근무 환경이 지켜지고 있었다.
스태프들이 그 시간을 확실하게 지키기 때문에.
내가 촬영하는 시간은 당연히 더 적을 수밖에.
그 8시간의 촬영 중, 모든 신에 내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촬영을 하는 날도 있고, 촬영을 하지 않는 날도 있으니 내게는 주 5일이 아니었지.
더군다나 내가 나오는 장면이 오전에 촬영이 끝난다면.
그대로 오전에 퇴근이었다.
시간은 말할 것도 없었고.
촬영 현장, 그리고 배우의 대우는 그동안 한국에서 촬영했던 것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
첫 촬영 때 과도하게 긴장을 했지만.
이제 할리우드 촬영장에 어느 정도 적응을 마쳤고.
김 실장은 그런 나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희성아, 이제 집에 가면 뭐 할 거야?”
나는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연습해야지.”
“내일은 촬영도 없잖아.”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긴 하지.”
“우리 여기에서 촬영이 최소 6개월은 잡혀 있는데, 매일 이렇게 촬영장, 집, 촬영장, 집만 하면서 지낼 수는 없지 않을까?”
김 실장이 나를 안쓰러워하는 듯 물었다.
이곳에서 다른 배우들과 따로 만남을 갖지도 않았고.
늘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내가 걱정됐던 모양이다.
“그렇긴 하지. 한국이라면 뭐 새로운 취미라도 가졌을 텐데… 여기서는 쉽지가 않으니까.”
김 실장은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읊조렸다.
“할리우드… LA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취미라면 뭐가 좋을까?”
***
할리우드에서 보내는 주말.
오늘은 내 촬영이 없어도 현장에 나가지 않았다.
늘 내 분량이 없어도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러 출근 도장을 찍었지만.
주말에는 모든 배우도, 스태프도 쉬는 날이었으니까.
김 실장과 며칠 전 나눴던 이야기.
이렇게 쉬는 날에는 새로운 취미를 가져보는 게 어떻겠냐는 그의 말.
침대에 누운 채 머리를 굴렸다.
“서핑이나 운동?”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에이, 여기서 다치기라도 하면 위험하지. 그럼 팬들과 소통을 하게 너튜브를 해볼까…?”
좋은 생각이라는 느낌에 손가락을 튕기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이내 그 생각은 다시 깊은 마음속으로 삼켜냈다.
“하긴, 촬영장이랑 집만 왔다 갔다 하니 찍을 게 없겠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그대로 대본 앞으로 자연스레 향했고.
대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감탄했던 내 자신이 떠올랐고.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지금 놀면서 취미 생활을 할 때가 아니야. 아직 연기에서 배울 게 너무 많잖아….”
서둘러 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 뒤.
“브라이언, 여기!”
제프리 감독에게 나를 소개시켜준 후, 오랜만에 만나는 브라이언이었다.
그는 미소 지은 채 손을 흔들며 내게로 다가왔다.
“진, 잘 지냈어요?”
“그럼. 브라이언 덕분에 제프리 감독님과 촬영도 시작하고….”
우리는 그렇게 못 나눴던 사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고.
잠시 뒤, 그는 내게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갑자기 보자고 한 이유가 뭐예요? 그냥 얼굴 보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내가 그에게 오전부터 연락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브라이언이 출연하고 있는 작품에 나도 나가고 싶어요.”
내 말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되물었다.
“내가 출연하는 작품에 나오겠다고?”
브라이언이 현재 촬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와 얼굴을 자주 보지 않았지만, 할리우드에 오고 나서 그를 만난 이후.
브라이언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으니까.
그가 출연하는 작품의 감독은 제프리 감독도, 제임스 감독도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격하게 흔들며 말했다.
“네, 꼭 나가고 싶어요.”
하지만 브라이언은 내 눈을 피하며, 앞에 놓인 커피만 응시했다.
누가 봐도 곤란하다는 얼굴.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진이 연기를 잘하는 건 너무 잘 알지만, 우리는 이미 촬영 중인 거 알잖아요. 주연이랑 조연 섭외도 다 끝나 버렸기도 하고.”
브라이언은 쓰읍, 소리를 내며 내게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진의 몸값이 있잖아요. 미안하지만, 페이도 진이 평소에 받던 만큼 절대 받을 수 없을 거예요.”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답했다.
“주연이나 조연이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뭐? 그럼 대체 뭘 하고 싶다는 거죠?”
그는 놀란 얼굴로 나와 눈을 맞췄고.
“저는 브라이언이 출연하는 작품이라면, 단역이라도 좋아요.”
“단역이라고요?”
나는 브라이언을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네, 단역으로라도 꼭 출연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