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205)화 (205/303)

205화 #36 – 시야를 넓히면 (2)

넓은 촬영장.

쫙 깔린 트레일러.

그 거대한 자태에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사람.

일본 배우 히로토였다.

“이야, 여기 진짜 멋있다.”

그는 넋을 놓고 주변을 둘러보며 매니저에게 말했고.

히로토의 매니저 역시 그 모습에 함께 감탄을 쏟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우리나라가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할리우드 따라가려면 멀기는 했다.”

“이런 게 일본으로도 도입되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들은 자신들 나라의 영화 업계와 할리우드를 비교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대본은 어땠어. 일본에서 하던 거랑 비슷해?”

“음… 확실히 일본에서 할 때보다는 힘들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내가 영어도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말에 매니저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고.

“아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잘해내야지.”

히로토는 의지를 불태우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지금 일본 몇몇 여론에서 그 한국 배우 놈이 이 영화를 버린 거라는 말이 있어서, 괜히 신경 쓰인단 말이야.”

매니저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답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그 자식도 애초에 할리우드에 오게 된 건, 제프리 감독이 아니라 여기 있는 제임스 감독 때문에 할리우드를 오게 된 거였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히로토는 진희성을 떠올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작품이 제프리 감독과 정면 승부라던데, 내가 반드시 제프리 감독과 한국 배우를 짓밟아줄 거야.”

그들은 진희성을 생각하며 의지를 다잡았고.

그때.

“히로토, 왔어?”

제임스 감독이 그에게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네,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연습은 많이 했나?”

히로토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예, 그럼요. 오늘 NG 없이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 좋지. 그럼 준비되는 대로 촬영 들어갑시다.”

“넵.”

그렇게 제임스 감독, 히로토와 모든 스태프는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몇십 분이 지난 뒤.

현장은 카메라가 모두 세팅되었고.

스태프와 제임스 감독까지 준비를 마친 채 각자의 자리에 서 있었다.

“드디어 우리 첫 번째 신 시작하는데, 다들 그동안 오래 연습한 만큼 잘했으면, 그리고 잘 따라와 줬으면 좋겠습니다.”

제임스 감독은 현장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쳤고.

그의 말에 모두 합창하듯 소리쳤다.

“네!”

“그럼 우리 바로 첫 번째 신 촬영 들어가 볼게요.”

제임스의 시선은 곧장 히로토에게로 향했고.

히로토는 반짝이는 눈으로 현장에 다가섰다.

제임스 감독은 그에게 촬영 전, 디렉팅을 해주기 위해 대본을 든 채 다가갔고.

“히로토, 여기서는 아직 히로토가 테러범이라는 걸 전혀 모르기 때문에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미지로….”

그는 대본과 히로토를 번갈아 보며, 한참 설명을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한번 가볼게요.”

제임스 감독은 디렉팅을 마친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레디, 액션!”

기대에 부푼 얼굴로 사인을 보낸 뒤.

제임스 감독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카메라에 비치는 히토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으며 제임스 감독과 대화를 나누던 히로토는 순식간에 배역에 몰입했다.

드디어 천천히 입을 떼는 그의 모습.

“제가 먼저 지나가겠습니다.”

히로토는 앞에 서 있는 단역 배우들을 손으로 쓰윽 밀며, 앞으로 걸어갔고.

“아야!”

그에게 밀침을 당한 단역 배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저기요, 이렇게 밀치고 그냥 가는 거예요?”

단역의 대사에 히로토는 뒤를 돌았고.

“저한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당신 말고 여기에 무식하게 앞으로 나가는 사람이 또 있어요?”

단역의 말에 히로토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표정을 풀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순간 히로토의 얼굴이 카메라에 가득 담겼고.

“컷, NG!”

곧바로 제임스 감독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리둥절한 히로토는 제임스 감독을 바라보았고.

“음… 히로토가 거기서 입술을 깨물어 버리면 안 돼. 여기서는 전혀 악역이라는 걸 의심할 수 없도록….”

제임스 감독은 다시금 자신이 원하는 의도를 히로토에게 말했고.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다시 해 보겠습니다.”

제임스 감독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고.

“다시 가볼게요. 레디, 액션!”

곧바로 히로토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내 터지는 제임스 감독의 사인.

“컷, 컷!”

그의 목소리는 살짝 격양되기 시작했고.

“NG!”

연속으로 터지는 컷 소리에 히로토 역시 표정이 굳어가고 있었다.

“하아… NG. 그게 아니라…!”

제임스 감독은 연이어 나는 NG에 한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잠깐만 끊었다가 갈게요.”

그러고는 현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히로토가 실력이 부족한 건가. 이거 시작부터 꽤 삐걱거리는데?’

제임스 감독은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진희성이 미팅에 참석하지 않은 후.

다른 동양인 배우를 급히 섭외했다.

하지만 새로 섭외한 동양인 배우와 히로토 사이에 오디션을 보며 배역을 정하지 않았고.

진희성이 빠졌기에, 비중이 높은 악역 자리에는 곧장 히로토를 넣은 것이다.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하기도 싫지만.

그렇다고 현재 히로토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기에, 제임스 감독은 답답한 듯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

“형, 가자!”

우리는 집에서 나오자마자 맑은 날씨를 보며 감탄을 쏟아냈다.

“우와, 오늘 날씨 진짜 좋다.”

“그러게. 현장 가는 게 벌써 3일째인데, 오늘 날씨가 제일 좋네.”

나는 김 실장을 보며 미소를 지었고.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말을 이어갔다.

“드디어 희성이 첫 촬영이라 날씨까지 따라주는 건가? 하하.”

“그런가 봐. 안 그래도 오늘 첫 촬영이라 밤에 열심히 연습했는데, 잘됐으면 좋겠어. 좀 긴장이 되기는 하네.”

나는 차에 올라타며, 급히 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프리 감독의 촬영은 벌써 3일째로 접어들었지만.

오늘이 내가 나오는 첫 촬영이었다.

그동안 이틀은 그저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공부하기 위해 현장에 나가곤 했지.

“열심히 연습한 건, 배신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워낙 희성이 네가 연기를 잘하기도 하고.”

김 실장은 룸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는 내 긴장을 풀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며 그렇게 현장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잠시 뒤, 차는 금세 현장에 도착했고.

나는 곧바로 제프리 감독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우리 희성 씨 얼굴 매일 봐서 좋네. 하하.”

“저도 좋습니다. 오늘 날씨가 엄청나게 좋아요, 감독님.”

그는 내 말에 하늘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이야. 오늘 촬영이 잘되려나? 하하.”

제프리 감독은 내 촬영이 첫 신이라는 걸 알고 있는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 한번 잘해보자고.”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잘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수없이 연습했던 첫 신.

영어로 해야 하는 대사였기에, 영어 대사 숙지는 기본.

영어 발음까지 신경 써야 하는, 내게는 다른 배우보다 몇 배는 힘든 조건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것을 감내하며 온 할리우드였고.

혀를 풀고,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때 내게로 다가오는 한 사람.

찰스였다.

“희성 씨, 좋은 아침이에요.”

그는 밝은 얼굴로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찰스, 드디어 우리 같이 촬영하는 첫 신이네요.”

오늘 촬영은 나와 찰스.

그리고 그의 딸로 나오는 아역 배우와 함께하는 장면이었다.

늘 그의 옆에 붙어서 나를 욕하던 리암은 오늘 보이지 않았다.

오전에 그의 촬영이 없어서, 현장에 나오지 않은 모양.

그래서인지 항상 찰스 옆에서 조잘대며 나를 쏘아보던 리암이 없었기에.

그는 내게 평소보다 더 밝고 가깝게 대화를 나눴다.

“맞아요. 함께 연기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하게 되네요.”

찰스는 내게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오늘 잘해봐요.”

그가 내민 손을 곧장 맞잡아 흔들었고.

“잘 부탁해요, 찰스.”

나 역시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배우와 함께 연기를 하게 된다는 게, 영광이기도 하고.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그와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다시금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눈을 스르르 감아 대사를 복기했고.

찰스는 오늘도 역시나.

다른 배우, 스태프와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렇게 떠들다가도 촬영 슛만 들어가면, 돌변하는 그였으니까.

제프리 감독은 준비를 마친 뒤, 자리에 앉아 크게 소리쳤다.

“찰영 시작할게요. 자, 레디… 액션!”

그의 사인과 함께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찰스를 바라보았다.

“하아… 내가 말한 서류는 아직이야?”

내 말에 찰스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아, 그게… 제가 오후에, 아니, 오전까지 파일을….”

나는 그의 말을 뚝 잘라내며 소리쳤다.

“아직도 멀었어?”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쏘아보았다.

“내가 아침까지 처리해 달라고 했잖아. 이번 프로젝트에 내가 얼마나 공을 들인지 몰라서 그래?”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내게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이 며칠 밤을 새워 만드신 거 너무나 잘 아는데….”

“아는데 어떻게 이렇게 대처가 늦지? 어제 자료 잘못돼서 나 예민한 거 알아, 몰라.”

찰스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다시금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아침에 갑자기 딸아이가 회사에 왔다가….”

찰스의 대사 실수.

“아니, 회사에 와서 어쩔 수 없이….”

그리고 빠르게 수습하려 다시 대사를 내뱉었지만.

제프리 감독은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컷, NG!”

그의 컷 소리에 찰스는 곧장 제프리 감독과 스태프들을 향해 외쳤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첫 NG였기에, 제프리 감독은 아무런 답 없이 촬영을 시작했다.

“네, 다시 갈게요. 레디, 액션!”

그의 사인에 우리는 곧바로 다시 배역에 몰입해 대사를 주고받았다.

이후, 찰스의 딸아이로 나오는 아역 배우의 NG가 여러 차례 터졌고.

“컷, NG!”

아이의 NG에는 그 누구도 짜증이나 화를 내지 않고.

그 아이를 달래가며 촬영을 이어갔다.

“괜찮아. 울지 말고, 다시 한번 해보자.”

나는 아이와 웃으며, 함께 촬영을 계속해 나갔고.

결국, 촬영은 찰스의 대사 실수 한 번.

아이의 실수 세 번으로, 네 번째 테이크 만에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다.

“컷, 오케이!”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첫 촬영에서 내 실수가 하나도 없이 마무리됐다는 안도감과 기쁨에 나는 연신 미소를 지었고.

그렇게 할리우드에서의 첫 번째 촬영이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

“희성아, 오늘 첫 촬영이었는데. 너무 고생 많았다.”

김 실장이 차에 올라탄 나를 반기며 손뼉을 부딪쳤고.

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생각보다 NG도 안 나고, 잘 마무리해서 다행이야.”

“네가 연습을 열심히 했고, 그리고 네 연기력으로 NG가 나는 게 이상하지!”

그는 나를 치켜세우며 말했고.

나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몸을 푹 기대었다.

“하아… 그래도 할리우드에서 첫 촬영이라 긴장했나 봐.”

룸 미러로 나를 본 김 실장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지. 숙소 도착할 때까지 눈 좀 붙여. 피곤했을 텐데.”

“응, 고마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온몸에 긴장이 풀렸는지 순식간에 눈을 스르르 감았다.

잠시 뒤.

김 실장의 운전 소리가 들리지 않기 시작했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힘겨워지는 탓에, 나는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눈앞에 보이는 빨간빛.

하나의 빛이 아니라, 온 세상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듯한….

이게 다 뭐지?

그리고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라.

내 꿈속이라는 것을…!

쾅쾅-!

“꺄아!”

“살려줘….”

사방에서 들려오는 참혹한 비명 소리.

그리고 하늘에서는 천둥, 번개가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내 몸 근처에서는 화산 폭발이 일어났는지, 용암이 내 주변으로 흐르고 있었고.

점점 숨이 막혀오는 느낌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직감할 수 있었다.

“여기… 지옥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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