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36 – 시야를 넓히면 (1)
제프리 감독의 크랭크 인.
첫 촬영이라 현장에 찾아와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지만.
사실 오늘 내 촬영분은 하나도 없었다.
주연이 아니기에, 매일같이 촬영장에 오지 않아도 될 정도의 분량이었지.
하지만 내가 현장을 찾아온 이유.
바로 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에서 연기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현장의 분위기도 살피고 싶었고.
배우들의 연기도 직접 눈앞에서 보며 느끼고 싶었다.
애초에 미국에서 활동했던 것이 아니기에,
촬영장에 오지 않으면 내가 할 일은 그저 집에서 머물며 연습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연습을 미뤄둔 채 현장에 온 것은 아니었다.
오늘 촬영장 분위기를 보러 오기로 했기에, 전날 밤이 깊도록 연습을 해두었지.
트레일러에서 김 실장과 함께 한참 구경을 한 뒤.
촬영이 시작되려는 시간에 맞춰 현장으로 걸어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현장에 다가가 제프리 감독과 스태프들.
그리고 앞에 있는 배우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내 인사에 제프리 감독은 짧은 손짓으로 나를 반겼다.
“어, 희성 씨 왔네.”
이제 나를 편하게 대하는 제프리 감독이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첫 촬영이라 부담감을 갖고 있는 모양인지 한껏 예민해진 얼굴로 주변을 보기에 바빴다.
서둘러 제프리 감독과 인사를 끝낸 뒤, 배우들에게로 향했다.
수많은 트레일러.
그리고 그 트레일러에서 배우들이 나와 현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 대본 리딩 때 만났던 배우 찰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모습을 보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 역시 그날 리암과 함께 화장실에 있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찰스는 내게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리암의 말에 동조하지도, 그렇다고 나를 감싸지도 않았다.
왜냐, 그는 그걸 인종 차별이라 해석하지 않은 듯 보였다.
아니면 인종 차별임을 알고 선을 그은 것일 수도 있지.
어쨌든, 찰스는 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대본 리딩에서의 첫 만남도, 그리고 그날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에도.
내게 늘 밝은 얼굴로 인사하며 챙겨주었지.
“찰스!”
나는 그를 불렀고.
찰스는 오늘도 여전히 환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오오, 희성. 미국 생활은 좀 어때요?”
그가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물었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답했다.
“숙소도 너무 좋고, 아직까지는 지낼 만해요.”
“식사가 중요한데, 밥은 입맛에 맞아요?”
그는 내게 꽤 궁금한 게 많은 듯 보였다.
“네, 한국에서도 햄버거, 피자 같은 음식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아직은 너무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하하.”
찰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다행이네요. 원래 다른 나라 가면, 음식이 문제잖아요.”
나와 찰스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희성 씨는 오늘 무슨 신 촬영이에요?”
그의 질문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저 오늘 촬영 없어요.”
찰스는 내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한껏 몸을 부풀리며 물었다.
“뭐라고요?”
“오늘 촬영은 없는데, 현장이 좀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는 내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무슨….”
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할리우드에서의 촬영이 처음이고, 어떤 식으로 촬영이 되는지 궁금했거든요. 현장 분위기도 볼 겸….”
한국에서는 결코, 신기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촬영이 없어도 촬영장을 찾는 일.
모든 배우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작품에서 내가 빠지는 신은, 추후에 편집본을 봐야만 알 수 있고.
나는 그 전에 현장에서 전체적인 흐름을 느끼고 싶어 늘 촬영장을 찾았다.
그리고 그걸 떠나, 다른 배우의 연기를 보면 느끼고 배울 점이 항상 있었고.
그건 비단 나보다 잘나가는 배우가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본받을 점은 있었다.
모든 배우의 특징이 다르고, 발성, 표정이 각기 다르다.
그렇기에 배우들의 각각 연기를 보며, 느끼는 점도 다를 수밖에.
그런 배우들이 모두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여기 ‘할리우드’였다.
할리우드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어떤 환경에서 연기를 하며.
어떤 연기를 펼칠까에 대한 궁금증은 한국 배우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터.
나는 그걸 직접 느낄 수 있는데, 오늘 이곳에 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닌 듯 보였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찰스의 표정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모든 배우에게 배울 점이 있거든요. 한국에서도 저는 이렇게 촬영이 없는 날, 현장에 나가고는 했어요.”
내 말에 찰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진짜 대단해요. 하긴, 그렇게 열심히 살면서 연기를 하니까 이렇게 한국에서 할리우드까지 캐스팅이 된 거겠죠?”
그는 엄지를 치켜들며 내게 보였고.
그때.
리암이 자신의 트레일러에서 내려와 찰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찰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를 끌어당겼다.
“찰스, 같이 현장으로 가자.”
“네, 같이 가요.”
리암은 나와 찰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도 보기 싫었는지, 내게 인사를 하기는커녕.
그를 끌어당겼고.
후배인 찰스는 속수무책으로 그를 따라 발길을 움직였다.
그러자 리암이 뒤를 돌아 나를 흘긋 바라보며, 찰스에게 속삭였다.
“쟤는 촬영도 없는데, 왜 여기에 왔냐?”
고개를 가로저으며 현장을 향해 걸어갔고.
나는 그런 리암의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렇게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모습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깎아 먹는 것 같아 보일 뿐이었다.
***
나와 김 실장은 현장으로 다가가 시작될 촬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 확실히 스케일이 다르긴 하다.”
김 실장은 현장에 앞서 펼쳐진 카메라, 그리고 수많은 스태프.
촬영 장비들을 바라보며 감탄을 쏟아냈고.
나 역시 빠르게 현장을 스캔했다.
“그러게. 다르긴 다르네.”
첫 번째 신은 9·11테러가 일어나기 전.
공항에서 배우들이 비행기에 타는 장면이었다.
그렇기에 첫 신부터 많은 조연과 단역 배우들이 등장했고.
덕분에 현장은 북적거리며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카메라에 크게 담기는 배우는 역시나 리암과 찰스 둘뿐이었다.
나머지 배우들은 감탄사를 내뱉거나 지나가는 역할일 뿐.
찰스는 리암보다 연기 경력이 후배이긴 했으나.
그의 인지도와 연기력은 그렇지 않았다.
찰스 역시 현역 톱 급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연기에 기대를 가지며, 숨을 죽인 채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제프리 감독이 어수선한 현장으로 걸어가 리암과 찰스에게 디렉팅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리암이랑 찰스가 둘 다 비행기를 타지 않는 장면이잖아.”
“네.”
“그러니까 거의 탑승을 앞두고 빠지는 걸 자연스레 표현해야 해.”
그의 말에 리암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저는 전화를 받으면서 급히 나서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러다가 찰스랑 부딪쳐서 얼굴을 익혀놔야 해.”
이번 장면은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는 리암과 찰스를 보여주는 신이었다.
그래서 그 둘은 부득이한 이유로 테러가 나는 비행기에서 운 좋게 빠져나오는 것이었지.
그러다 남남인 그들이 이곳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되는 장면인데.
리암은 첫 촬영부터 장난스러운 농담을 던지며, 제프리에게 말했다.
“그때, 찰스가 저를 보고 제가 잘생겨서 놀란 표정을 지으면 어때요?”
그의 너스레에 긴장한 듯 예민하던 제프리 감독이 웃음을 보였고.
찰스 역시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에이, 그러기엔 제 얼굴도 잘생겨서, 리암 얼굴 보고 놀라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나요? 하하.”
그들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한국에서도 촬영 현장에서 긴장을 풀기 위해.
혹은 오래 이어진 촬영에 친분이 쌓였을 때 농담을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풀고는 한다.
하지만 지금은 작품의 첫 촬영, 첫 신인데.
이런 농담을 나누며 준비한다는 게 내게는 너무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긴장되는 상황 속에서 너스레를 떤다고?
장면은 꽤 심각한 장면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오히려 긴장이 된 내가 마른침을 삼키며 그들을 바라보았고.
제프리 감독은 그들과 농담을 나눈 뒤, 곧장 자리로 돌아가 소리쳤다.
“레디, 액션!”
제프리 감독의 슛 사인에 맞춰, 리암과 찰스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냈다.
그리고 리암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얼굴로 휴대 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어, 그게 사실이야? 똑바로 말해!”
리암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도록 큰 소리를 내질렀고.
그는 점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당장 갈 테니까, 확실하게 알아보고…. 으악!”
순간.
급하게 달려오던 찰스와 리암이 세게 부딪쳤고.
그들은 동시에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아, 죄송합니다.”
찰스와 부딪친 탓에 리암의 전화가 끊어졌고.
“이런….”
리암은 죽일 듯한 얼굴로 찰스에게 다가갔다.
그의 모습을 본 찰스는 기가 죽기는커녕, 입술을 깨물며 몸을 털고 일어났다.
“당신이 통화를 하느라 그런 거 아니야!”
그들의 연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물론 좋은 의미로 말하는 충격이었지.
같은 배우들이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건 한국과 당연히 똑같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보던 연기와는 정말이지,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많은 배우와 함께 연기를 하고.
또 내가 연기를 하지 않을 때에도 그들을 지켜보며 배우고 느낀 바가 있었다.
그중 개인적으로 내게 충격을 줬던 배우는 최서빈이 제일이었다.
최서빈은 슛이 들어가기만 하면, 순식간에 연기에 몰입했다.
그리고 그 몰입의 절정은 연기의 시작이 아니라.
엄청난 에너지를 쏟는 순간, 터져 나왔다.
그때 그에게서 풍기는 아우라가 분명히 존재했다.
나는 그 아우라를 최서빈에게서 몇 번이나 느꼈고.
그 모습에 최서빈은 역시 괜히 톱 급이 아니라며, 감탄을 쏟아냈지.
하지만….
여기서는 모든 배우가 카메라가 도는 순간.
그 아우라가 터져 나왔다.
절정에 닿지 않아도, 그저 감독이 슛을 외치고.
연기를 내뱉는 순간 엄청난 아우라와 함께 감탄을 자아내는 연기가 마구 터지고 있었다.
“와아….”
나도 모르게 그들의 연기를 바라보며 탄성을 내질렀고.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 저렇게 연기할 수가 있는 거지?’
분명 촬영이 들어가기 전까지.
제프리 감독과 함께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놀았던 것 같은데.
슛이 들어가는 순간, 눈빛이 돌변하는 건 물론.
상상 그 이상의 연기가 나오다니.
나는 그저 그들을 한마디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잘한다.”
저건 내가 아직까지 닿지 못한 영역이었다.
저런 연기는 단순히 노력과 재능을 넘어서서, 깨달음의 영역이라고 봐야 할 터.
아무리 리암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더라도.
저런 점은 분명 보고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더 오를 곳이 남았다는 것.
연기에 대한 열정이 다시금 가슴 깊숙한 곳에서 피어올랐고.
그 뜨거운 가슴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그들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나도… 연기를 더 하고 싶다. 미친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