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35 – 위기를 기회로 (6)
“좋아요, 근데 거기에 감정을 조금만 더 실어서 연기해 볼래요?”
제프리 감독의 피드백이 이어졌고.
대본 리딩실은 다시금 차가운 얼음장이 된 듯했다.
배우들은 제프리 감독의 반응을 보며 연기를 이어갔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대본 리딩.
모든 배우가 최소 열 번 이상씩은 대사를 읊고, 제프리 감독에게 피드백도 받은 뒤.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조나단, 그렇게 피하기만 하면… 세상에 지고 말 거야. 분명해.”
찰스가 자신감이 부족한 목소리로 대사를 읊었고.
역시나.
“잠깐!”
제프리 감독의 말로 흐름이 끊어졌다.
그의 목소리에 놀란 찰스는 몸을 움찔거리며 제프리 감독을 바라보았다.
“네, 감독님.”
“거기를 그렇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하면 어떻게 합니까?”
“…죄송합니다.”
제프리 감독은 한숨을 참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한 게 문제가 아니라… 다시 해봐요. 오늘은 대본 리딩이니까, 바로잡아서 현장에서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되니까.”
“예, 다시 해 보겠습니다.”
제프리 감독이 큰 소리를 치며 촌철살인으로 피드백을 했지만.
그의 외침에는 나쁜 마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연기를 피드백할 뿐.
어떤 악감정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피드백을 받은 배우들의 표정은 좋을 리 없었다.
당연히 자신의 연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들었으니, 속상할 수밖에.
찰스는 굳은 얼굴로 심호흡을 하며 다시 연기에 몰입했다.
그 모습을 본 여러 배우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할 뿐이었다.
그 누구도 찰스의 연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었기에.
하지만 제프리 감독의 기준선이 워낙 높을 뿐이었지.
찰스는 다시 심기일전한 표정으로 대사를 외쳤다.
“조나단, 그렇게 피하기만 하면… 세상에 지고 말 거야. 분명해…!”
그의 대사가 끝나자, 찰스는 곧장 고개를 흘긋 돌려 제프리를 보았고.
제프리는 아무런 피드백을 하지도, 대사를 끊지도 않은 채 다음 장으로 대본을 넘겼다.
무리 없이 통과했다는 뜻이다.
제프리의 태도에 다음 차례인 배우가 열연을 펼쳐갔고.
그사이 풀이 죽은 찰스의 어깨를 토닥이는 사람.
바로 리암 배우였다.
그들은 잠시 가졌던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진희성의 뒷이야기를 함께 나눈 배우들이었다.
물론 진희성에게 동양인 비하적인 발언을 한 건, 리암 혼자였지만.
리암은 화장실을 다녀온 이후.
계속해서 찰스에게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그래야 자신과 함께 진희성을 비하해줄 것이라고 기대라도 하는 듯했다.
자신의 어깨를 토닥이는 리암을 보며, 찰스는 입꼬리를 옅게 올렸다.
그리고 그들을 흘긋 바라보고 있는 진희성의 모습.
진희성은 그런 리암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은 채 대본 리딩을 이어갔다.
몇십 분 동안 대본 리딩이 더 이어진 후.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들 고생했어요.”
하루가 다 가도록 이어진 대본 리딩이 드디어 끝이 났다.
스태프들과 제프리 감독, 그리고 배우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를 향해 손뼉을 부딪쳤다.
짝짝-.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고생한 서로를 위해 인사를 나누고는 제프리 감독이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피드백한 내용을 토대로, 다들 열심히 연습해오길 바라요. 첫 촬영 현장 때 봅시다. 고생했어요.”
그의 말에 배우들은 합창하듯 소리쳤다.
“네!”
그리고 각자 앞에 놓인 대본을 정리하며 짐을 챙겼고.
제프리 감독 주변의 주연 배우들에게로 하나둘 모여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홀로 동양인 배우인 진희성은 재빨리 정리를 마치고, 주연 배우들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 촬영 때 봬요.”
“네, 희성 씨도 고생했어요.”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손을 내밀며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진희성의 손은 가까이에 있던 대니얼 배우부터.
차례로 올라와 찰스 배우에게까지 향했고.
이내 마지막에 서 있는 리암 배우에게로 손을 뻗었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진희성은 리암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 꺼려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넘길 수가 없었다.
다 같이 있는 자리였고.
더군다나 리암은 자신의 이야기를 진희성이 못 들었을 거라 생각할 터.
하지만 리암은 자신에게 손을 뻗은 진희성의 손을 곁눈질로 보더니.
곧장 시선을 옮겨 소리쳤다.
“오오, 찰스. 그래서 아까 내가 이야기한 거 기억나? 대본에 체크했지?”
리암의 뜬금없는 이야기.
누가 봐도 진희성의 악수를 무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 의도를 모를 리가 없는 진희성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지만.
이내 표정을 숨기며, 자리를 옮겼다.
그런 진희성의 뒷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는 리암의 모습.
한편, 제프리 감독은 대본 리딩이 끝나자마자 다시 자리에 앉아 대본을 정리했다.
그러던 중.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배우들의 모습.
제프리 감독의 시선 안에는 리암이 진희성의 악수를 무시하는 모습이 선명히 들어왔다.
그는 리암의 행동에 대해 분명히 화장실에서 경고를 주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제프리 감독의 오산이었다.
그는 그런 리암의 옅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리암… 의혹이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도 저렇게 행동할 줄은 몰랐는데…. 촬영이 무난하게 흘러가지 않을 거 같은데?’
그는 리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서둘러 시선을 옮겨, 다른 배우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는 진희성을 시선에 담아냈다.
‘저 둘, 경각심을 가지고 계속 지켜봐야겠어.’
***
“크으…!”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꽉 막힌 속을 뚫기 위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길었던 대본 리딩에서 힘들었던 점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제프리 감독에게 피드백을 받는 것?
그건 나와 비슷한 비중의 배역들보다 내가 훨씬 더 적은 피드백을 받았고.
더군다나 피드백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그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었다.
다만, 내가 이렇게 답답한 마음이 드는 이유.
리암 때문이었다.
동양인을 무시하는 저급한 행동에 화가 났지만, 그걸 참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답답했던 것이지.
다시금 맥주를 들이켰고.
“크으, 좋다.”
나를 본 김 실장이 놀란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희성아, 뭐야. 왜 오자마자 밥 대신 맥주를 그렇게 마셔?”
“시원하잖아.”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그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뭐야, 대본 리딩 때 무슨 일 있었구나. 뭔데?”
김 실장이 걱정할까 봐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는 내 작은 행동도.
사소한 표정에도 내 마음을 모두 알아차렸고.
지금 내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 걱정을 안겨주는 것이라 판단했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식탁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김 실장은 자연스레 맥주 한 캔을 냉장고에서 꺼내, 내 앞으로 다가와 맥주를 마시며 내게 물었다.
“뭔데, 말해봐.”
“형, 사실 오늘 대본 리딩 때, 일이 좀 있었어.”
내 말에 김 실장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리암이라고 그 배우 알지?”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 그 40대 배우 아니야?”
“맞아. 리암이 아까 화장실에서….”
화장실에서 리암이 내뱉었던 저급한 인종 차별 이야기.
그리고 그로 인해 나를 무시했던 일들을 김 실장에게 털어놓았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김 실장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소리쳤다.
쾅-!
“미친 자식 아니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고.
흥분한 김 실장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 다 들었으면서, 왜 화장실 안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
“거기서 내가 흥분해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내 말에도 김 실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분을 이기지 못하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형, 생각해봐. 거기서 내가 나가서 뭐라고 하든, 내게 득이 될 게 없어.”
김 실장은 내 말에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작게 읊조렸다.
“하긴… 한국이라면 몰라도 미국에서는 사과는커녕, 오히려 네 인식이 안 좋아졌을 수도 있겠네.”
“어, 옛날에 비해 사회적 인식이 많이 개선되긴 했어도, 저런 한 명 한 명은 다 감당할 수가 없어.”
김 실장은 안타까운 현실에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맥주를 들이켰다.
“맞아. 그래서 네가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맥주를 마셨구나?”
“어, 답답해서.”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늘어뜨린 채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애써 미소를 지은 채 그에게 답했다.
“너무 걱정 마. 인종 차별이 아예 없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으니까. 다만, 이렇게 빨리 이런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김 실장이 내 맥주 캔에 자신의 것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냥 더러워도 똥 밟았다 치고, 최대한 마주치지 말자. 그게 제일 낫겠어.”
“응, 그러려고.”
우리는 그렇게 리암이 내게 했던 행동을 모두 털어내기 위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
드디어 다가온 첫 촬영 날.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김 실장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이야… 대본 리딩 때 봤던 것보다 더 좋아졌는데?”
내 말에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진짜 현장 죽인다.”
촬영장 한쪽에 촤르르 펼쳐진 트레일러들.
대본 리딩 때는 트레일러들이 정리되기 전이었고.
그래서 이렇게 펼쳐진 광경도 볼 수가 없었지.
더군다나 그때는 내 트레일러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안의 모습조차 볼 수가 없었다.
김 실장은 서둘러 스태프에게 달려가 무언가를 물어봤고.
나는 가지런히 정렬된 트레일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찰칵-.
그리고 그때 밝은 얼굴로 달려오는 김 실장의 모습.
“희성아.”
“응?”
그는 한 트레일러 쪽으로 다시 달려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로 와.”
나는 그의 손짓에 빠르게 움직여 다가갔고.
“이 트레일러가 희성이 네 거래.”
“우와, 얼른 보자.”
김 실장은 콧노래를 부르며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문을 벌컥 열었다.
“♪♬….”
끼익-.
문이 열리자 나와 김 실장은 내부를 바라본 후.
곧장 고개를 돌려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와….”
“미쳤는데?”
한국 촬영장에서 쉬는 공간은 그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평소 좋은 캠핑 의자를 야외에 놓고 그곳에 기대어 쉬기도 했고.
대부분의 쉬는 시간은 차 안.
혹은 다른 배우들과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지.
하지만 이 트레일러는 차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작은 집을 그대로 옮겨둔 것 같은 모양새.
가장 안쪽에는 잠깐의 휴식이 아닌, 잠까지 청할 수 있도록 침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간단하게 씻을 수 있는 세면대, 그리고 작은 냉장고까지.
이건 한국에서 좋은 캠핑카를 그대로 가져온 거나 다름없었다.
“이건 좋다 못해, 훌륭한 거 아니야?”
“형, 나 여기서 먹고 자고 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나는 넋을 놓은 채 트레일러 안을 살폈고.
김 실장은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말했다.
“그렇다고 하기엔, 우리 숙소가 너무 좋은데. 여기서 먹고 잘 거야? 하하.”
그의 말에 우리는 호탕하게 웃으며 안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진짜 너무 좋다, 형.”
김 실장과 나는 그렇게 한참을 트레일러 안에서 감탄을 쏟아냈다.
이제 천국과 지옥이 동시에 오가는.
할리우드… 이곳에서의 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