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35 – 위기를 기회로 (5)
나를 무시한 듯한 리암을 지나치고, 그 뒤에 다가오는 배우.
여배우 에블린이었다.
그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웨이브 머리.
금발의 머리를 찰랑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내 인사에 그녀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반가워요. 저는 에블린이라고 해요.”
그녀는 내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고.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아 흔들며 답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에블린.”
“저야말로요.”
환하게 눈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
초롱초롱한 눈망울.
그 눈을 감싸는 긴 속눈썹과 오뚝하게 떨어지는 콧대.
그리고 새하얗지만 건강한 듯한 피부는 시선을 빼앗기기에 충분한 미모였다.
에블린의 등장에 몇몇 배우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할 정도였으니까.
나 역시 이곳에서 처음 만나는 여배우의 등장에, 시선을 빼앗겼다.
마음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너무나 아름다운 자체에 나도 모르게 그녀를 바라본 것이지.
이내 그녀는 대본 리딩실로 향했고.
나 역시 다른 배우들과 인사를 나눈 뒤, 대본 리딩을 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대본 리딩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짧은 소개 후에 이어졌다.
연기가 시작되자, 배우들은 순식간에 배역에 몰입해 생생하게 연기를 이어갔다.
한 명이 연기를 시작하면, 나머지 배우들이 모두 압도될 정도.
나 역시 내 차례가 아니면, 연기를 하는 배우에게 집중해 영화를 보듯 감탄을 쏟아내며 바라보았으니까.
그들의 연기력은 가히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였다.
한국에서 이런 연기를 했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배우들은 탑을 찍을 실력이었다.
감탄을 자아내는 그들의 연기.
하지만 제프리 감독의 실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
제프리 감독은 그들의 연기가 자신의 마음에 온전히 꽉 차지 않았는지, 중간중간 연기를 끊어냈다.
“아니야. 조금 더 격렬하게 대사를 읊으면 좋겠어요.”
그의 피드백에 배우들은 빠르게 의견을 수용했다.
“네, 다시 해 보겠습니다.”
제프리는 거의 모든 대사에 한 번씩 태클을 걸듯 연기를 끊었다.
“눈물은 흘리지 말고, 떨어지기 직전의 상태로 연기해요. 거기서 우는 게 아니라 겁을 먹어서 울음을 참아내는 거니까요.”
그의 말에 배우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목소리는 더 떨리게, 더 간절하게 연기해요.”
“알겠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완벽함에 가까운 연기였지만.
제프리는 쉽게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온 내 차례.
나는 열심히 연습한 대로 대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요. 이런 식으로라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내가 장담해요!”
내 대사에 제프리 감독은 역시나, 연기를 끊어냈다.
“음… 좋은데, 거기서 다급하기보다는….”
제프리는 내 대사에 의미를 알려주며 요구했고.
이후 몇 번의 디렉팅을 받았다.
조연인 내게, 제프리는 주연들이 받는 수준으로 디렉팅을 해주었지만.
나와 비슷한 조연들이 디렉팅을 받는 것보다는 현저히 적은 횟수이기는 했다.
나머지 조연 배우들은 제프리 감독이 대사를 내뱉음과 동시에 대사를 끊어내고는 했으니까.
중간에 대본 리딩의 쉬는 시간이 찾아왔고.
높은 강도의 대본 리딩에 배우들은 녹초가 된 듯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내 옆에 있던 40대의 배우 리암 역시, 엄청난 경력의 소유자였지만.
지금은 눈을 지그시 감고 지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몇몇 친분이 있는 배우들은 쉬는 시간에 자신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고.
나는 이곳에 아무런 배우와도 친분이 없었기에.
그저 대본을 살피며, 다음 이어갈 리딩의 대사를 복기했다.
하지만 연습을 하는 와중에도 느껴지는 곳곳의 시선.
바로 배우들이 나를 흘긋거리는 시선이었다.
이곳에 있는 동양인은 나 혼자였기에, 더욱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내 건너편에 앉아 있던 에블린이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물었다.
“희성 씨는 할리우드에서 연기하는 게 몇 번째예요?”
에블린의 물음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려는 것도.
이곳에서 온 시선을 집중하게 만들려는 것도 아닌 듯했다.
그저 눈이 마주쳤고, 어색함에 단지 궁금한 질문을 던진 것일 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답했다.
“할리우드 진출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우와, 처음이구나. 열심히 해봐요.”
“네, 감사해요.”
그녀와 짧은 몇 마디를 나눈 뒤.
에블린은 고개를 숙여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임과 함께 다시 대본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이내 더욱 많은 시선들이 나에게 쏟아졌다.
이곳에 홀로 있는 동양인이자, 이제는 처음 할리우드에 진출한 배우라는 것이 모두에게 알려졌으니까.
첫 할리우드 진출이 잘못됐거나, 약점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배우들은 나의 연기도, 내 정보 하나조차 알고 있는 것이 없었기에.
그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흘긋거리고 있었다.
몇 분 뒤.
다시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고.
돌아온 내 순서.
내 연기를 의심해 눈초리를 보냈던 몇몇 배우들에게 내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었다.
내가 왜 할리우드에 진출할 수 있었는지.
왜 유일한 동양인으로 이곳에 서 있는지 말이다.
나는 연습했던 모든 실력을 동원해 대사를 읽어 내려갔다.
“이렇게 하다가는 다 죽을 수도 있다고!”
고요하던 대본 리딩실은 내 대사에 숨죽은 듯 집중했고.
“다들 똑바로 정신 차려. 지금 나 하나 살자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다가는, 그 사람이 먼저 죽고 말 테니까.”
나는 실제로 연기를 펼치듯 허공을 바라보고 눈빛을 보내며 대사를 이어갔다.
“모두에게 생명은 공평한 거야. 너 하나 살자고, 그런 식으로 남을 희생시키려 들지 마. 이게 내 마지막 경고야, 명심해.”
내 연기에 나를 의심했던 배우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연기가 끝나자, 그들은 이내 입을 떡 벌리며 고개를 끄덕임으로 내 연기를 인정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들의 표정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
어느덧 대본 리딩실에서 대사를 이어간 지도 3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렇게 지친 기색을 보이는 배우들과 스태프들.
제프리 감독은 손뼉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쉬는 시간 가지고, 다시 집중해서 이어갈까요?”
그의 말에 배우들은 합창하듯 외쳤다.
“네!”
다시 찾아온 쉬는 시간.
“하아….”
다들 굳은 몸을 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 역시 긴장하고 연기를 했기에, 뻣뻣해진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친분이 있는 배우들은 서로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작품에는 나 말고 다른 동양인 배우도 있다고 들었다.
그들과 공감대라도 형성하며, 이곳에서 적응하려고 했지만.
그 동양인 배우는 아주 짧게 나오는 단역이었기에.
대본 리딩에 참여할 정도의 배역이 아니었다.
나는 홀로 자리에 있기보다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제프리 감독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침 제프리 감독 옆에는 아까 내 인사를 무시한 듯한 리암이 그곳에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제프리 감독이 나를 발견하며 미소를 보냈고.
나는 그에게 다가가며, 제프리 감독 옆 리암에게 재차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리암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리암이에요.”
너무나 반갑게 인사를 하는 배우.
오히려 긴장한 채 다가간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저는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너무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는 나와의 인사를 기다렸다는 듯, 너무나 달갑게 받아주었고.
순간 아까 나를 지나쳤던 리암을 떠올렸다.
뭐지?
아까 진짜로 내 인사를 못 보고 실수로 지나쳤던 거였나?
내가 그를 오해했다는 생각에, 괜스레 미안함이 피어났고.
최서빈의 사람 조심하라는 말에 내가 너무 예민하게 대했구나, 싶어 한결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조금은 편하게 배우들에게 다가가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러다 문득 자리에 여전히 혼자 앉아 있는 배우를 보며,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오우, 반가워요. 저는 대니얼이라고 해요.”
그와 나는 반갑게 악수를 나눴고.
대니얼은 한쪽 눈을 치켜세우며 내게 말했다.
“아까 연기 너무 멋있었어요.”
“정말요?”
“네, 사실 할리우드 처음이라고 하기에, 별 기대 없이 보고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했던 제 자신이 미울 정도로 대단했어요.”
그는 내게 엄지를 치켜들었고.
나는 활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해요. 대니얼 연기도 너무 좋았어요.”
“하하, 더 열심히 해야죠. 그리고 여기에 연기를 못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한참 대화를 이어나갔고.
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보며 그에게 말했다.
“앞으로 잘 지내봐요, 대니얼.”
“좋아요.”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나는 재차 이어질 대본 리딩을 위해 빠르게 화장실로 이동했다.
한번 시작하면 한 시간, 아니 두 시간은 기본이었으니까.
연기를 해야 하기에, 계속해서 마셨던 물 탓에 화장실로 발길을 옮겼고.
아직 시간이 좀 남은 터라 화장실 안의 변기로 향하며 문을 닫았다.
쾅-.
문을 닫고 들어오자마자 화장실 밖의 문이 세차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수롭지 않게 앉아 있었지만, 들어오는 배우들의 대화가 너무나 선명히 내 귓가에 꽂혔다.
“찰스, 오늘 대본 리딩 잘하더라.”
리암의 목소리였다.
아직 많은 대화를 나눠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굵은 목소리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지.
“감사합니다. 리암은 오늘도 명연기를 펼치셨잖아요. 하하.”
역시나.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리암과 조연인 찰스였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고.
“근데 찰스.”
“네?”
“아까부터 그 동양인한테 계속 갈릭 냄새가 나더라고.”
하지만 갑자기, 그 대화에 내가 언급되는 듯 보였다.
“동양인한테서 마늘 냄새가 난다고요?”
“응, 못 맡았어?”
나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고.
찰스는 모르겠다는 듯 조금 높은 톤의 목소리로 답했다.
“음… 저는 잘 모르겠던데요?”
“흐음, 내가 그 동양인이랑 가까이 앉아서 그런가 보네.”
나는 리암의 말에 분노가 차올랐다.
내 이름을 분명히 알면서도 자꾸 동양인, 동양인이라고 언급하는 것도 화가 났지만.
동양인을 비하하기 위해 마늘 냄새가 난다는 불쾌한 말을 입에 올렸으니까.
‘이게 말로만 듣던 인종 차별인 건가?’
실제로 내게 마늘 냄새가 났다면, 리암이 아니라 찰스가 맡았을 터.
리암은 나와 근처에 앉아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내 옆에 앉은 사람은 찰스였다.
그러니 이건 명백한 인종 차별이었다.
리암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찰스를 향해 말했다.
“내가 사실 현장에 오자마자 그 동양인의 인사를 무시했거든? 근데 쉬는 시간에 다시 와서 나한테 인사하더라. 하하.”
“정말요?”
“어, 눈은 이렇게 쭉 찢어져 가지고, 나한테 두 번이나 인사하러 오는 꼴이 얼마나 우습던지. 하하하.”
그는 나를 조롱하며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분노에 차올랐지만.
최서빈의 조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싸우지는 않으려 애를 썼다.
“그래도 리암이 그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어요?”
“당연히 받아야지. 옆에 감독님이 있었잖아. 어떻게 거기서 무시를….”
그때.
쾅-.
재차 화장실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어? 감독님 오셨어요?”
제프리 감독이 화장실에 들어온 듯했다.
“응, 다들 여기 있었네.”
제프리 감독의 등장에 리암은 신이 난 듯 그에게 입을 열었다.
“감독님, 대본 리딩실에서 이상한 냄새 못 맡으셨어요?”
“글쎄, 무슨 냄새?”
그의 물음에 리암은 피식 대며 말했다.
“갈릭이요.”
웃으며 묻는 리암의 말에도 제프리 감독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전혀. 왜, 리암 씨가 갈릭 빵 먹었어?”
그의 말에 리암은 화들짝 놀라며, 또다시 나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아니요. 제가 아니라, 그 동양인. 그러니까 진희성 배우한테서 자꾸 갈릭 냄새가 진하게 나더라고요. 감독님도 그 냄새를….”
리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프리 감독은 단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리암 씨, 내 작품에서는 그런 인종 차별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의 말에 당황한 리암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어우, 차별이라니요. 제가 후각이 워낙 예민하거든요. 다들 못 맡으셨는데, 저만 그걸 캐치했나 보네요.”
리암의 행동은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다들 아니라고 하는데도, 나를 차별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말이다.
“리암 씨, 나는 그런 차별 못 보니까 혹여나 그런 일은 앞으로 없었으면 좋겠어.”
“그럼요. 저는 사실을 말할 뿐, 거짓으로 부풀리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그 대화를 끝으로 리암과 찰스, 제프리 감독은 화장실을 빠져나갔고.
나는 고요하고 텅 빈 화장실에 홀로 남게 되었다.
문을 박차고 나와 아무도 없는 빈 화장실에 서서 주먹이 흔들리도록 불끈 쥐었다.
“리암… 이 새끼. 조심해야겠는데?”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아니, 사실 조심해야 할 인물은 리암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할리우드.
이곳은 배우들의 꿈이자, 배우들의 무덤이라고도 불리는 곳.
여기는 내가 한국에서 연기를 펼치던 그런 곳이 아니다.
매 순간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멘탈을 부여잡은 채.
리암과 많은 배우가 있는 대본 리딩실로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