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35 – 위기를 기회로 (4)
LA 공항.
불과 몇 주 전에 왔던 공항이지만.
그때와 지금의 기분, 그리고 마음가짐은 너무 달랐다.
어떤 배역을 맡게 될까, 할리우드에 드디어 진출을 하는 건가?
할리우드 땅을 밟게 된 날이 올 줄이야, 등의 생각을 가지고 왔던 지난 LA.
하지만 지금은 당당히 할리우드에서 연기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보다 지금 더 떨리고 몇 배는 긴장이 되는 듯했다.
잔뜩 얼어 있는 내 얼굴을 본 김 실장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희성아, 표정이 왜 그래?”
“좀… 긴장이 되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장할 게 뭐 있어. 이미 계약서에 도장도 찍었겠다, 가서 연기만 하면 되는 건데?”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그래서 더 긴장이 되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이제는 정말 다들 내게 기대를 걸고 있을 거 아니야. 제프리 감독도 내 연기에 기대를 할 거고. 더군다나 한국 팬, 대중들도 할리우드에 뽑힌 진희성의 연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고 할 테니까.”
내 말이 단번에 이해되는지 김 실장은 이내 미소를 지우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더 떨리는 것 같아.”
김 실장은 코를 찡긋하며 내게 말했다.
“한국에서 하던 대로만 하자. 떨지 않고, 기죽지 않고 연기하면 희성이 널 따라올 배우는 없어.”
그의 짧은 위로가 내게는 큰 용기와 힘이 되었고.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응, 그래야지. 내가 최고다, 생각하고 죽을힘을 다해서 열심히 해보려고!”
그제야 김 실장은 미소를 지었고.
공항 앞에 마련된 차를 가리키며 답했다.
“자, 열심히 연습하기 위해 좋은 숙소로 가보자.”
“좋아.”
제프리 쪽에서 마련해준 차를 타고, 우리는 숙소로 이동했다.
한참을 달리던 차 안.
김 실장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거기서 타고 다닐 차도 제공해 준다고 했던 거 기억나?”
“응, 설마 이게 그 차야?”
내 말에 김 실장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 차랑 기사님은 단지 우리가 숙소까지 이동하기 위해서 준비해준 거고.”
“그럼?”
“숙소 앞에 세워뒀다고 하더라고.”
나는 점점 할리우드에 왔다는 걸 실감하며 미소를 지었다.
“빨리 숙소도, 차도 보고 싶네.”
“나도.”
몇십 분이 더 흐르고.
이내 차는 한 주택 앞에 멈춰 섰다.
“여기입니다. 짐은 바로 내려 드리겠습니다.”
기사가 뒤돌아 나와 김 실장에게 말하고는 차 문을 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짐을 받아 주택 앞에 선 우리.
문을 열기도 전부터 감탄이 쏟아졌다.
“형, 뭐야. 여기 입구가 왜 이렇게 커?”
“그러게. 주소가 여기 맞는데…….”
나는 고개를 빼꼼 들고 입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주택 안에서 배우들끼리 자는 공간이 나눠진 건가?”
“아닌데. 주택을 통으로 준다고 들었는데. 근데 여기는 너무 큰데?”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었고.
문을 여는 순간, 김 실장과 나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
“…미친.”
눈앞에 펼쳐진 광경.
이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집이었다.
아니,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봤던 집이지,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펼쳐진 푸르른 잔디와 꽃과 나무.
그리고 집 앞 마당에 마련된 개인 수영장까지.
“와아… 이건 진짜 미쳤다.”
“여기를 우리 둘이 쓰는 거라고?”
나는 예상보다 너무나 큰 스케일에 입을 떡 벌렸고.
김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내게 답했다.
“희성아.”
“응?”
“여기 우리 둘이 쓰는 거 아니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고는 손가락을 튕기며 그에게 말을 이어갔다.
“어쩐지, 집이 너무 크더라니. 다른 배우들도 오는 거야?”
내 말에 그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여기 너 혼자 쓰는 공간이야.”
“뭐라고?”
“나는 따로 호텔을 잡아주셨어.”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말도 안 돼.”
“우선 집부터 구경해볼까?”
나는 넋을 놓은 채, 김 실장과 함께 드디어 집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마자 우리를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집.
“이건 진짜로 미쳤어.”
김 실장이 입을 틀어막은 채 소리쳤다.
“희성아, 나 이런 집 태어나서 처음 봐!”
그의 말에 나 역시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형, 나도 처음이야. 여기 대체 방이 몇 개인 거야?”
우리는 그렇게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각자 뿔뿔이 흩어져 집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의식의 흐름대로 발길을 옮기며 감탄을 쏟아냈다.
“여기가 거실이고, 그럼 여기가 주방… 이 문은 안방인가?”
벌컥-.
문을 열며 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살폈다.
“뭐야, 여기가 드레스 룸인데… 옷방이 이렇게나 크다고?”
내 말에 김 실장이 내게로 달려오며 말했다.
“희성아, 여기 대박이야.”
김 실장은 내가 서 있던 드레스 룸으로 다가와 다시 한번 뒷목을 잡았다.
“와아, 드레스 룸이 우리 집보다 큰 것 같은데?”
그렇게 한참이나 우리는 집을 구경했고.
이 집은 수영장이 딸린 주택.
게다가 2층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거실을 제외하고, 방만 8개.
거기에 화장실이 총 4개가 마련되어 있었다.
감탄에 감탄이 쏟아지는 이 집.
“이런 집은 한국에서 평생 살아볼 수나 있을까?”
김 실장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고.
나는 그런 김 실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 그래서 나 이 집을 혼자 쓰는 거라고?”
내 말에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답했다.
“응, 나는 근처에 좋은 호텔로 잡아주셨어. 여기서 편하게 쉬고 할리우드 생활을 즐겨.”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 물었다.
“형도 그냥 여기서 나랑 같이 지내면 안 돼?”
“혼자 지내는 게 편하지 않겠어?”
“여기는 집이 굉장히 커서, 형이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을 거야. 형도 호텔보다는 이 집에서 지내는 게 더 좋지 않아?”
이 집에 나보다 더 신이 난 아이처럼 굴던 김 실장이었기에.
내 제안이 좋은 듯 보였다.
하지만 나를 걱정하는 듯한 그의 말투.
“그렇긴 한데… 그래도 너 혼자 편하게 지내라고 나한테 따로 호텔까지 잡아준 건데. 내가 너 휴식에 방해가 될까 봐 그렇지.”
“에이, 이렇게 큰 집에 배우 혼자 놔두면 불안하지. 담당 배우 안전상 여기서 지내는 게 어때?”
내 말에 김 실장의 눈빛이 흔들렸고.
나는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형도 매번 호텔에서 여기로 나 데리러 왔다가 촬영장 가고 하는 것보다, 여기서 같이 지내는 게 편하잖아. 거기 호텔도 형이 안 간다고 해서 없애는 것도 아닐 테고.”
“뭐, 그렇긴 하지?”
“그래, 여기서 같이 지내자. 그 호텔은 혹시나 우리 지인들이 미국 오게 되면, 거기서 재워도 되니까 말이야.”
김 실장이 웃으며 집을 둘러보았다.
“호텔이 아니라, 여기에 불러도 방이 남겠는데? 하하.”
“그렇긴 하네.”
김 실장은 다시금 집을 빠르게 스캔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고마워. 덕분에 나도 이런 집에서 지내볼 수 있게 됐네.”
“나도 이런 집 처음인데 뭐. 같이 여기서 열심히 지내보자, 형.”
***
새하얀 책상들이 끝없이 펼쳐진 이곳.
“네, 전화 받았습니다.”
띠리리.
띠리리리.
여기저기 책상 위에서는 전화벨이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자신의 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제가 메모해서 담당자에게 전달하겠습니다. 네, 네….”
나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며 시선을 빠르게 움직였다.
어딘가 익숙한 이곳.
사무실의 광경도, 옆에 앉은 여러 직원들도 낯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내 책상 위를 바라보니, 보이는 작은 명패.
‘무역(한국) 알렉스’
“어, 여기는…?”
나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기는 내 꿈속이다.
어쩐지 익숙한 이 공간과 사람들.
그리고 여기서 나를 부르는 이름은 ‘알렉스’였다.
이곳은 할리우드에 오기 전, 꿈을 꾸었던 장면이다.
그렇다면… 오늘 여기서 테러가 일어나는 거잖아?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빠르게 살폈고.
내게 말을 거는 옆자리의 직원.
“알렉스, 우리 오늘 끝나고 한잔할까?”
그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어휴, 또야?”
“또라니.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지. 우리 항상 가는 회사 근처에 그 집으로 가는 게 어때?”
그는 나와 가까운 동갑내기 친구였다.
결혼을 하지도, 여자 친구도 없는 그였기에.
늘 퇴근을 하면 집으로 가는 대신 나와 놀기를 바라는 친구이자 동료였지.
띠리리.
그때, 그의 전화가 울렸고.
그는 내게 눈썹을 들썩이며 다시 일에 집중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내게 말을 걸었던 이 직원.
동갑이자 동료로 친한 관계인 이 사람.
제프리 감독의 작품에서 나오는 등장인물과 매우 흡사했다.
그리고 그 배역을 맡은 배우까지 이미 캐스팅이 되어 있었지.
나는 그를 바라보며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그렇게 주변 인물을 바라보며, 실제 작품의 배역과 그들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 지난 꿈에서 봤던 장면.
그리고 작품에서도 나오는 장면.
쾅-!
테러가 시작되었다.
엄청난 굉음.
흔들리는 건물과 뿌연 연기가 이곳을 뒤덮었고.
사람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꺄아!”
“살려주세요!”
“출구가 대체 어디야.”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며 출구를 향해 내달렸고.
나 역시 입을 틀어막은 채 새어 들어오는 빛을 향해 달렸다.
그때.
맞다, 저 아이는 윌리엄?
오늘 엄마인 로라의,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주기 위해 찾아온 아들이었다.
지난 꿈에서 나는 윌리엄을 등에 업어 건물을 빠져나갔지.
그리고 오늘 역시.
나는 그 아이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서둘러 윌리엄을 등에 업고,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그리고 재차 테러가 이뤄지기 전에 죽을힘을 다해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만이 내 귓가에 맴돌았고.
타앗-!
결국, 나는 윌리엄을 꽉 업은 채 안전하게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 등에 업힌 윌리엄은 내 손을 꼭 잡은 채 속삭였다.
“살려줘서 고마워요. 내 수호자 삼촌.”
그를 바라보며 미소로 화답하던 순간.
팟-!
눈앞에 펼쳐진 하얀 천장을 마주하고 말았다.
꿈에서 깬 지금도 나는 숨을 헐떡이며 당시를 회상했고.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
“어? 그러고 보니, 이건 대본이랑 다르잖아?”
분명 대본에서는 건물이 무너질 때, 내가 그 안에서 잠깐 생존하다가.
어린아이를 살리고, 대신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게 내 배역이었다.
중간에 죽기에 비중이 적어 조연으로 정해진 것이었지.
그런데 꿈에서는 분명,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아이도, 그리고 나 역시도 목숨을 건졌다.
“뭐지? 꿈과 대본의 결말이 이렇게 달랐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
마침내 본격적인 할리우드에서의 스케줄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대본 리딩은 필수였다.
나와 김 실장은 촬영장으로 빠르게 이동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와아, 여기 장난 아니다.”
한국 촬영장에서 배우가 쉬는 공간이라고 하면, 자신의 차.
또는 촬영장에 작게 마련된 휴게실 혹은 그저 현장의 의자에 앉아 쉬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곳에는 트레일러, 개인 카라반이 하나씩 존재했고.
물론 모든 단역 배우들에게까지 개인 트레일러가 마련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주연, 그리고 조연 배우들 몇몇에게까지 이 트레일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 역시 제프리 감독이 계약 당시 말했던 조항으로, 내 개인 트레일러가 한쪽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야… 촬영 기간 동안 쓸 차도 엄청나게 좋은 거로 해주셨는데, 트레일러까지. 대박인데?”
한국에서 탔던 차는 편안한 수준의 밴이었다면.
여기서 마련해준 차는 최고급 리무진에 가까웠다.
그런데 저렇게 큰 트레일러까지.
“할리우드 스케일 대단하다… 빨리 촬영하고 싶다. 트레일러도, 그리고 촬영 스케일도 너무 궁금하고 기대돼.”
나와 김 실장은 기대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현장을 둘러보았고.
그때.
하나둘 배우들이 현장에 도착하고 있었다.
촬영장에 진입하는 배우들을 보며, 나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신기한 얼굴로 그들을 살폈다.
할리우드 영화나 해외 시상식에서나 본 배우들이었으니까.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제프리 감독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희성 씨, 왔어요?”
“네, 덕분에 컨디션 조절 잘 하고 왔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답했다.
“편안하게 생활 즐기면서, 열심히 작품 만들었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님.”
그때.
여러 명의 배우가 제프리 감독에게로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서둘러 그 배우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 인사에 배우들은 짤막하게 답했다.
“안녕하세요.”
“네, 반가워요.”
그리고 가장 뒤에서 걸어오고 있던 40대의 중후한 매력을 풍기는 배우인 리암.
나는 그 끝에 서 있던 리암에게로 다가갔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한번 힘차게 소리쳤다.
“안녕하세요,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그 순간.
리암이 빠르게 시선을 옮겨 다른 배우를 바라보았고.
“오우, 언제 왔어?”
그 배우를 향해 걸어가며, 나를 쓰윽 지나쳤다.
뭐지, 나를 못 본 건가?
아닌데….
분명 나와 눈이 정확히 마주쳤고, 눈을 본 순간 인사를 했는데.
확실했다.
그와 내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는 것은.
나는 그런 리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싸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