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35 – 위기를 기회로 (3)
이제는 정신력으로 시차를 극복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한국 시간과 생활에 적응이 되었다.
적응의 동물답게 아침에 해가 뜨자마자 눈을 떠, 매일같이 회사로 출근했다.
할리우드에 가기 전.
너무나 바쁜 일정들이 나를 기다렸다.
그중 공식 스케줄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연예 방송 인터뷰, 광고, 하다못해 인터넷 기사의 작은 인터뷰까지도 모두 밀어냈으니까.
그저 연기 연습과 영어 회화 공부.
그리고 체력 단련을 위한 회사 내 헬스장뿐이었다.
테러 당시 건물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정의로운 역할을 맡았기에.
체력과 함께 보일 다부진 몸이 필수였다.
늘 그렇듯 출근하자마자 헬스장에서 아침 운동을 마치고, 연기 연습을 위해 연습실에 도착했다.
단백질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켜 마신 뒤.
빠르게 배역에 몰입했다.
아무리 연기라 하더라도, 영어로 된 대본이라고 하더라도.
그저 대사를 읽는 게 아니라 연기를 펼쳐야 했으니까.
배역에 빠르게 몰입해 집중했고.
어느덧 그 배역이 내가 되고, 내가 그 배역과 하나가 되어 연기를 펼쳐갔다.
허공을 바라보며 열연을 펼치던 중.
똑똑.
연습실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
그 노크 소리에 황급히 연습을 멈췄다.
김 실장은 급한 일이 아니면 연습실에 찾아와 연습을 멈추게 할 리가 없었고.
무슨 급한 일이겠거니 싶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형, 무슨 일 있….”
문을 열며 자연스레 김 실장을 부르던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뜻밖의 인물에 말문이 턱 막혔다.
“어? 유나 씨가 여기에는 왜….”
내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송유나였다.
그녀를 보고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자, 송유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내게 말했다.
“뭐야, 오랜만에 본 건데 반응이 왜 그래요?”
차가운 투로 퉁명스레 말하는 그녀.
평소 그녀와 회사에서 마주칠 때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녀가 워낙 회사에 나올 일이 없었고.
나온다 하더라도 나와 우연히 마주칠 일이 적었으니까.
더군다나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건, 지난 시상식이 끝난 후였다.
함께 작품을 할 때는 매일같이 얼굴을 봤지만.
시상식에서 그녀가 연기 대상을 받아 크게 회식을 한 뒤에 그녀를 볼 일이 없었지.
오랜만에 얼굴을 봤기에 반가운 마음도 당연히 있었지만.
그보다는 놀란 마음이 컸을 뿐이었다.
“반가운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하게 여기서 봬서요.”
“아… 그냥 회사 들렀다가 여기 있다길래 와봤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연습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굳이 찾아왔다라…?
나는 손으로 내 가슴팍을 툭 치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저 보러 오신 거예요?”
내 말에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소리쳤다.
“아니요!”
“네? 그럼 저한테는 왜 오신 건데요?”
송유나는 헛기침을 하며 내 눈을 피했다.
“커피 사달라고 왔어요.”
“커피요?”
“네, 제가 지갑을 안 들고 왔는데,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진희성 씨가 여기에 있다길래 커피 좀 사달라고 하려고요.”
“…….”
다급하게 내게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연습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응원해주러 올 송유나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가죠. 커피 사드릴게요.”
그녀와 도착한 회사 내 카페.
나는 송유나와 내가 마실 커피를 주문해 자리에 앉았고.
그녀는 새침한 표정과 말투로 커피를 끌어당겼다.
“잘 마실게요.”
“네.”
송유나에게 잘 마시겠다는 말은, 고맙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평소 표현을 워낙 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아니, 정확히는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송유나였다.
우리는 그저 커피를 마시며 잠시 정적이 흘렀고.
송유나는 커피를 내려놓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그녀의 소리에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순간 허공에서 눈빛이 마주치자,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뭐… 할리우드 간다면서요?”
“네, 이제 곧 촬영하러 갈 것 같아요.”
“준비는 잘되어 가고요?”
다정하게 묻는 말투는 아니었다.
갑자기 송유나가 따뜻한 어투로 묻는다면, 그게 더 놀라울 터.
그렇다고 해서 질투를 하거나 시샘해서 내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단지 할리우드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 같을 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열심히 하고는 있어요. 할리우드라고 해서 준비하는 게 특별할 건 없더라고요. 그냥 한국에서 할 때와 똑같이 대본 보고, 연기 연습하고 그러고 있어요.”
“모든 게 똑같지는 않잖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그저 할리우드는 스케일이 확실히 크고, 함께하는 배우들이 외국인이라는 거?”
내 말에 송유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보였지만.
서둘러 그 웃음을 지워내며 내게 물었다.
“그래서 출연 배우들은 정해졌어요?”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입을 열었다.
“네, 브루노랑….”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헐… 미친. 브루노요?”
그녀의 말에 놀란 건, 오히려 나였다.
화들짝 놀라 내뱉은 그녀의 거친 말.
나는 그녀의 입에서 격하게 반기는 듯한 배우 브루노가 궁금했기에, 그녀에게 되물었다.
“네, 브루노랑 아는 사이예요?”
내 물음에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제가 브루노 팬이에요.”
그녀의 답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너무나 반가워하며 소리치는 그녀였기에.
송유나와 브루노가 각별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지 팬이라 소리를 친 것이었다니.
내가 웃음을 보이자, 송유나는 연신 눈을 깜빡이며 변명하듯 외쳤다.
“그냥 뭐… 배우로서 팬이라는 거지. 제가 브루노를 남자로서 좋아하고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시구나. 근데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당황한 그녀를 보며 나는 활짝 미소를 지었고.
송유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내게 황급히 주제를 돌리듯 물었다.
“브루노 말고 또 누구 있어요?”
“주연으로 나오는 배우가 리암이요.”
내 말에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그 40대 배우 리암 말하는 거죠?”
“예, 맞아요. 그 배우.”
“이야… 라인업 진짜 화려하다.”
송유나는 그제야 앞에 놓인 커피를 다시 들이켜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송유나를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유나 씨, 다음에 저 할리우드 가면 한 번 놀러와요.”
내 말에 그녀는 마시던 커피를 급하게 입에서 떼며 외쳤다.
“제가 왜요?”
그녀의 외침에 놀란 나는 눈을 껌뻑거리며 말했다.
“브루노 팬이라면서요. 할리우드 구경도 하면서, 브루노랑 인사라도 하고 가라고 하려했죠.”
내 답에 당황한 송유나는 내 시선을 피했고.
이내 다급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가면 진짜 브루노랑 만나게 해줄 거예요?”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당연하죠. 제가 열심히 친해져 있어 볼게요.”
“알겠어요. 저 진짜 브루노 팬이니까, 브루노랑 가까워져 봐요.”
“그럴게요.”
그녀는 배우 브루노 생각에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
곧 송유나가 매니저의 연락에 다급히 커피를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다.
나 역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커피를 마셨기에.
여전히 머그컵에는 커피가 가득했고.
“내려온 김에 커피 좀 마시고 쉬다가 올라가야겠다.”
다시 연습실에 올라가기 전, 홀로 카페에서 여유를 만끽했다.
그렇게 몇십 분이 흘렀을까.
휴대 전화를 보며 커피를 마시던 중.
“어? 희성아.”
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사람.
최서빈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반겼다.
“선배님!”
정말 우연히 마주쳤기에 더욱 반가운 마음이 가득했다.
“여기서 뭐 해?”
“잠깐 커피 마시러 내려왔어요. 선배님은요?”
“나도 회사에 일 보러 왔는데, 지나가다가 너 보이길래.”
평소 회사에서 우연히 마주치기 힘든 인물인 최서빈과 송유나.
그들을 같은 날에 마주치다니.
신기한 마음에 나는 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더군다나 이제 곧 할리우드 촬영차, 출국을 앞두고 있기에.
최서빈과의 우연한 만남이 이렇게 달가울 수가 없었다.
“괜찮으시면 같이 커피 드시다가 가면 안 됩니까?”
내 물음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잠시 뒤, 이내 최서빈의 앞에 커피가 놓였다.
“할리우드 가는 거 진짜 축하해.”
“감사합니다. 저번에도 연락 주셨잖아요.”
최서빈은 내 기사가 나자마자 내게 연락을 해준 인물 중 하나였다.
“그래도 얼굴 보고 또 축하해주고 싶었지.”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고.
“그래서 할리우드는 곧 가는 거야?”
“네,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최서빈은 이내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미국 가서 생활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거야.”
최서빈 역시 할리우드에 진출한 적이 있었다.
작품이 나오기는 했지만, 대박이 나지는 않았지.
그러니까 최서빈의 할리우드의 첫발은 성공이라고 보기가 힘들었다.
정확히는 실패에 가까웠다고 봐야 할 터.
지난 할리우드 진출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최서빈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내게 조언을 이어갔다.
“이번 미팅처럼 며칠, 몇 주 있다가 오는 게 아니니까….”
그의 조언을 나는 경청하며 새겨들었고.
최서빈은 그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어떤 겁니까?”
그는 한숨을 짧게 내쉬며 답했다.
“사람 조심.”
“무슨 사람이요?”
그는 입술을 샐쭉 내밀며 당시를 회상하는 듯 보였다.
“미국 가면, 입맛이랑 문화 이런 거에서 안 맞고 그런 건 괜찮아. 근데 사람이 제일… 불편하고 무섭더라.”
그의 말과 표정에 나는 단번에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최서빈에게 물었다.
“동양인이라서 그런 거죠?”
내 말에 최서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종 차별, 그런 게 어린 애들한테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 조심해.”
동양인으로 가는 것이기에, 인종 차별에 대해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이 있는 성인들이고.
더군다나 함께 같은 작품을 위해 달려 나가는 동료이기에, 그런 일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지.
하지만 당시에 최서빈은 인종 차별을 겪은 듯했고.
여전히 그 생각에 몸서리를 치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참아냈다.
내 표정을 본 최서빈이 내게 조언을 던졌다.
“인종 차별에 절대 맞서지 마. 괜히 나서서 좋을 게 없다는 뜻이야. 명심해.”
너무나도 진심이 뚝뚝 흘러나오는 그의 표정과 말투.
나는 명심하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유연하고 똑똑하게 대처해.”
“어떤 식으로 대처를 해야 할까요?”
내 질문에 그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건 너의 몫이야. 내가 그걸 극복 못 해서 한국으로 돌아왔거든.”
“아….”
“맞서지는 말고, 현명하게 행동해. 영화판에 불공정이 판치기는 하지만, 세상은 정의를 지향하잖아.”
최서빈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그걸 이용해.”
어떤 방법으로 현명하게 해결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최서빈의 말뜻은 정확히 이해하고 가슴 깊이 새겨 넣었다.
“명심할게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래, 몸 조심히 다녀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