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35 – 위기를 기회로 (1)
22세기 폭스.
진희성과 히로토가 오디션을 보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뭐야, 그 한국인은 안 오는 거래?”
히로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매니저에게 물었다.
“안 올 리가 있겠어?”
“하긴. 할리우드까지 왔는데, 갑자기 오디션에 안 오지는 않겠지.”
그의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우리랑 붙는 거잖아. 어떻게든 기를 쓰고 와서 이기려고 하겠지.”
매니저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히로토에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봤자, 히로토 너한테는 연기로 이길 수가 없을 테지만 말이야.”
히로토는 매니저의 말을 듣고 입을 길게 찢었다.
“연기도 나보다 못할 텐데, 지각까지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그들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편, 오디션 룸.
스태프들은 오디션장을 치우고 있었고.
잔뜩 화가 난 얼굴의 제임스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문을 벌컥 열었다.
“오셨습니까, 제임스 감독님?”
스태프들의 인사에도 그는 여전히 씩씩대며 인사를 무시했다.
“미친 거 아니야?”
분노에 차올라 소리치는 그의 모습을 본 스태프들은 웅성댔고.
스태프는 그에게 다가와 물을 건네며 조심스레 물었다.
“감독님,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진희성… 그 새끼 쪽에서 연락이 왔어.”
그의 말에 스태프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했다.
“무슨….”
“오디션 안 보겠다고 말이야.”
제임스의 말에 오디션장은 순식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 오디션은 진희성과 히로토.
둘만의 경쟁을 위한 오디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오디션에 진희성이 오지 않으면, 이 자리의 의미가 없었고.
벙찐 듯한 얼굴로 서 있는 스태프들.
그리고 더욱 열이 올라오는 듯한 제임스의 표정.
“미친… 이 자식이 오디션 당일에 펑크를 내는 게 어디 있어!”
쾅-.
제임스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고.
그 소리는 오디션 문밖으로 새어 나갔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오디션장.
이곳에서는 오로지 제임스의 분노에 가득 찬 숨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제임스가 열을 식히고 있던 가운데.
한 스태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제임스 감독님.”
“왜?”
“진희성이 안 오면, 오디션은 어떻게 할까요?”
제임스를 분노케 만드는 단어 ‘진희성’이었지만, 이 질문을 누군가는 해야만 했다.
문밖에서는 오디션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배우 히로토가 있었고.
계속 이 분위기 속에서 시간만 보낼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하아….”
한숨을 길게 내쉬던 제임스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스태프에게 답했다.
“일본 배우, 지금 들어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잠시 뒤, 히로토가 오디션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히로토는 제임스를 향해 물었다.
“저 먼저 오디션을 보는 건가요?”
그의 물음에 제임스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늘 한국 배우는 오지 않을 겁니다.”
“네?”
옆에서 듣고 있던 히로토의 매니저도 놀란 얼굴로 크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한국 배우, 그러니까 진희성이 오디션을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체 왜….”
히로토는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렸고.
제임스는 진희성 때문에 화가 났음을 숨기며 말을 내뱉었다.
“히로토 배우가 하고 싶은 역할은 두 가지 중 어떤 배역이죠?”
황급히 주제를 바꾸는 제임스의 말에, 히로토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저는 테러리스트. 악역을 맡고 싶습니다. 잘해낼 자신도 있고요.”
어차피 진희성과 히토로 중 연기를 더 잘한 배우에게 테러리스트, 악역을 맡길 예정이었고.
이렇게 된 마당에 굳이 히로토를 나머지 비중 적은 조연에 넣을 생각은 없었다.
진희성이 괘씸해서라도 히로토를 좋은 역할에 넣고 싶었을 터.
히로토의 말에 제임스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어쨌든 준비해온 테러리스트 배역의 연기 좀 볼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히로토는 그렇게 한참 연기를 이어갔다.
연기가 모두 끝난 후.
그의 연기와 함께 짤막한 오디션 역시 막을 내렸다.
히토로가 오디션장을 빠져나간 후.
다시금 진희성이 자신을 물 먹였다는 사실에 화가 차오른 제임스가 스태프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진희성 기사 내.”
“네, 어떤 식으로….”
스태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임스가 오디션장이 떠나가라 큰 소리를 냈다.
“진희성이 이렇게 벌인 거에 대해서 기사 내라고!”
“…예.”
한편, 오디션장을 나간 히로토와 매니저.
매니저는 히로토의 어깨를 툭툭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도 하고 싶던 테러리스트를 하게 돼서 축하해.”
그의 축하에도 히로토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짜증 나.”
“응?”
“진희성 그 자식이랑 정정당당하게 연기로 승부 보고 싶었다고.”
히로토는 진희성이 오디션을 오지 않았다는 것.
제임스의 영화를 버렸다는 듯한 느낌에, 찝찝함에 사로잡혔다.
그러고는 창밖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걔가 버린 역할을 그저 주워 먹는 것 같잖아…. 이건 승리라고 볼 수가 없어.”
***
제프리 감독이 잠시 자리를 비워, 나와 김 실장만이 이곳에 남게 되었다.
“제프리 감독님, 성격도 엄청나게 좋으신 것 같은데?”
김 실장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고.
“맞아.”
나는 조심스레 김 실장에게 물었다.
“형, 제임스 감독 쪽에서 별다른 연락은 안 왔지?”
“어, 나한테 온 건 없는데… 잠시만.”
그는 휴대 전화를 열더니,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 모습에 다급히 그를 불렀다.
“왜, 무슨 일 있어?”
“하아… 이것 좀 봐.”
김 실장은 내게 자신의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美 할리우드에 첫발을 뗀 한국의 J 배우. 무엇이 두려워 도망갔나….]
[22세기 폭스 측, ‘도망간 한국 배우’. 한국인들의 매너란 이런 것인가?]
[美 할리우드에서 벌어진 ‘한일전’. 싸우기도 전에 끝나버린 연기 경쟁….]
[오디션 당일 나타나지 않은 ‘노매너’ 한국 배우 J. 그의 정체는….]
내가 제임스 감독의 오디션에 가지 않은 것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 기사는 한국 연예계 뉴스 사이트 메인을 도배했고.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극적인 기사 제목들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아… 기사 제목들 좀 봐.”
“그러니까. 자세히 내용을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제임스가 많이 화가 났나 봐.”
나는 서둘러 스크롤을 내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살폈다.
-ㅋㅋ 그럼 그렇지.
-진희성, 할리우드 갈 짬이 아니었다니까? 지도 오디션 보러 가다가 자기 실력 눈치챈 거 아님?ㅋㅋ.
└진희성ㅋㅋㅋ 아니, J 배우라고만 했는데?
└지금 할리우드 간 J 배우가 진희성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음?
└하긴. 한일전에 들끓은 우리가 J 배우가 진희성인 거 못 찾는 게 이상하지.
-아놔ㅡㅡ 한일전 싸우지도 않고, 진희성 토낀 거임?
-쪽팔리게 하필 한일전에서 도망가냐!
-진희성이 한일전에서 도망간 게 아니라, 싸울 가치가 없어서 버린 거 아님?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한일전에서 도망간 건 너무 쪽팔리잖아.
└네, 다음 진희성 팬이요~
└진희성이 직접 댓글 쓴 거 아님?ㅋㅋ.
내게 달린 수많은 댓글들.
‘한일전’이라는 자극적인 단어에 댓글은 온통 악플로 가득했다.
내가 연기에 자신이 없어서.
일본 배우에게 질 거라는 게 겁이 나서.
그저 추측하는 기사와 악플들이 넘쳐났고.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나와 김 실장은 그 댓글과 기사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임스 감독이 엄청나게 화가 났나 보네. 기사가 끊이지를 않는다.”
“그러게.”
기사를 새로 고침하며 엄청난 기사들을 확인한 김 실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이거 반박 기사 낼까?”
그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올린 채,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제프리 감독님이랑 확실하게 도장 찍고 난 다음에 내자.”
“그럴까?”
“응, 아무리 우리가 버린 영화라고 한다 해도 안 믿고, 다른 추측을 할 테니까. 확실하게 작품 도장을 찍은 뒤에 입장 발표해도 충분할 것 같아.”
김 실장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좋아.”
***
제프리 감독과 미팅을 하고 나서 벌써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찾은 그의 사무실.
이곳에 찾아오는 길이 비록 두 번째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길이 벌써 익숙하고 즐거운 길이 되어 있었다.
똑똑.
“네, 들어와요.”
제프리 감독은 첫 미팅 때와 마찬가지로 나와 김 실장을 밝게 반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제프리 감독님.”
“오오, 다시 얼굴 보니까 좋네요.”
그는 미소로 우리를 반기며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다시 이곳을 찾은 이유.
재차 미팅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프리 감독은 그날 나의 연기를 본 뒤에 바로 캐스팅을 제안했고.
오늘은 계약 조건을 확인한 뒤, 제프리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는 것을 확정 짓기 위해서였다.
그래서였는지, 제프리 감독 사무실을 찾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던 것 같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임스 감독이 화가 잔뜩 났는지, 기사가 많이도 쏟아졌더라고요.”
제임스 감독에 대한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는 제프리 감독의 입꼬리는 사뭇 올라가 있었다.
역시 그들의 사이는 라이벌 관계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지.
“네, 제가 오디션 당일에 가지 않겠다고 하니, 그렇게 기사가 나왔더라고요.”
그는 흡족하게 미소를 보이고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진희성 배우를 뽑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제임스 감독 때문이에요.”
“네?”
제프리 감독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제임스 감독 때문에 나를 뽑고 싶어 했다라….
괜한 라이벌 의식에 그가 캐스팅하려는 배우를 무작정 빼앗고 싶었다는 건가?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말했다.
“음… 제임스 감독은 제가 항상 이기고 싶어 하는 라이벌 같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의 실력은 제가 인정하기는 해요.”
“아… 네.”
“대중들도 그를 제 라이벌이라고 늘 칭하니까요. 제 라이벌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니까, 당연히 제임스 감독 실력도 출중하죠.”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그런 그의 여유로움이 대단하고 멋있었다.
라이벌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레벨이라고 생각해,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근데 그런 제임스 감독이 한국에 있는 진희성 배우에게까지 연락해 섭외하려고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진희성 배우의 연기력은 이미 검증된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의 말에 활짝 웃었고.
“근데 실제로 연기를 보니까, 제임스가 왜 그렇게까지 진희성 배우를 데리고 가고 싶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더라고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오우, 제가 감사하죠. 이런 연기력이 대단한 배우와 일을 하게 될 거라니 말이에요.”
우리는 연신 웃으며 말을 이어갔고.
본격적인 계약에 앞서, 제프리는 서류 한 장을 내밀며 말을 이어갔다.
“우선 제가 진희성 배우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촬영장에 마련된 트레일러. 그리고 미국에서 머물 수 있는 집과 차를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
말로만 듣던 트레일러.
할리우드는 현장에서 배우가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공용 휴게실이 아닌, 개인 카라반인 일명 트레일러를 이용하게 해준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트레일러를 실제로 사용하게 될 것이라니.
나는 상상만으로도 미소가 새어 나왔다.
“집과 차도 제공해 주시는 건가요?”
“네, 당연하죠. 머물 집은 이런 호텔이 아니고….”
제프리 감독은 내게 사진을 보여주며, 5성급 호텔의 유명 사진을 넘겼고.
“아, 여기 있네!”
그리고 이내 커다란 주택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 사진에 보이는 주택이에요. 이 집을 지원해드릴 겁니다.”
나와 김 실장은 사진을 보는 순간 입을 떡 벌리고 감탄을 쏟아냈다.
사진으로만 보아도 으리으리해 보이는 주택.
김 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국어를 내뱉었다.
“와아! 역시 할리우드 클래스인가?”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몇 가지의 조항과 촬영 이야기를 한참 이어간 뒤.
김 실장과 나는 짧은 회의를 거치고 나서야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쾅-.
계약서에 도장을 찍자마자 나는 내게 할리우드에서 도망쳤다고 악플을 달았던.
수많은 악플러의 새로운 반응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