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34 – 할리우드 (10)
내가 꿈속에서 봤던 9·11테러 당시의 장면들.
그 장면들과 비슷하다고 느꼈던 제임스의 대본.
하지만 대본을 읽으면서도 늘 찝찝했다.
꿈속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그저 9·11테러라는 주제만이 같았을 뿐, 역할은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꿈에서는 내가 테러범이 아닌, 건물 속에 있던 일반인이었고.
제임스의 작품에서 내가 맡을 역할은 건물에 있던 일반인, 혹은 테러범이었다.
그중 테러범의 비중이 일반인에 비해 너무 월등하게 높았고.
늘 그랬듯 꿈에서 봤던 내 역할처럼 당연히 일반인을 해야 대박이 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첫 할리우드 행이었기에, 이왕이면 비중이 높은 테러범 역할을 따내고 싶었다.
여기까지 와서 결국 내가 하는 역할이 비중이 작은 단역 배우와 같다면.
한국에서 온 의미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꿈속의 내용이 찜찜하게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지.
그래서 제임스의 영화를 선택하는 것도.
그 영화에서의 배역을 테러범으로, 그러니까 지금까지 꿈에서 봤던 배역을 모른 체하고 다른 배역을 위해 연습하는 것도.
할리우드에 섭외를 받아왔지만, 한일전을 펼치며 오디션을 봐야 하는 것도.
모두 신경 쓰일 것투성이였다.
그러나 제프리 감독의 작품은 이와는 전혀 달랐다.
동양인이 한 명뿐이라는 것.
그 역할의 비중이 주연만큼 꽤나 강하다는 것도.
가장 중요한 건, 9·11테러라는 주제에 꿈에서 봤던 배역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게 운명이었네…!”
더 이상 고민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임스 감독의 생각에 일본 배우와 경쟁하며 놀아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한일전을 펼치는 일이 한국인으로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승리한다면, 본전이요.
패배를 한다면, 내 스스로도 분노에 차겠지만 많은 팬들로부터 욕을 먹을 테니까.
하지만 단순히 욕을 먹을까 봐 피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 욕을 먹을까 피한다면, 수없이 연예계에서 몸을 사렸을 터.
더군다나 제임스 감독이 내가 할리우드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런 일에 대해 설명했다면 실망도, 서운함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내가 오케이를 하기만 하면 배역 확정이라는 둥.
카메라 테스트를 통해 내 영어 발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는 둥.
나를 속인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고.
배역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작품에 굳이 내 온 마음을 담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하기가 싫었다.
대본을 읽고 여러 가지 상황을 판단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LA에서의 하루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더 지체되기 전에, 나는 서둘러 김 실장에게로 향했다.
독단적으로 내가 결정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형, 나 할 말이 있어.”
“제프리 감독 대본, 다 읽은 거야?”
내가 브라이언에게서 대본을 받아왔다는 걸 아는 김 실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응.”
그는 내 대답에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는지, 내 앞에 자리 잡고 긴 이야기를 나눌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형, 나 내일 제임스 감독의 작품 오디션에 안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니, 안 갈래.”
“뭐라고?”
고민을 토로하는 말투가 아닌.
확고한 내 말에 김 실장의 눈빛이 빠르게 흔들렸다.
“형, 생각해봐. 내가 제임스 감독의 영화에서 일본 배우와….”
제임스 감독의 작품을 왜 하고 싶지 않은지.
그리고 제프리 감독의 작품에 뛰어들고 싶은지에 대해 차분히 하나하나 설명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생각을 내놓지 않은 채, 한참을 그저 내 이야기에 집중하던 김 실장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겠어. 그럼 회사에도 이야기를 해보고, 우선 오디션은 보고 나서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
김 실장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제프리 감독에게로 가겠다고 제임스 감독의 오디션을 취소하는 게.
당장 오디션 전날 밤 결정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은 확고했다.
“아니. 나는 제임스 감독의 작품에서 두 개의 역할 중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어.”
“희성이 네가 원한 그 테러리스트 악역 역할에 캐스팅될 수도 있잖아. 당장 내일이 오디션이니까, 악역에서 떨어진다면 그때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그의 말에도 고개를 가로저었고.
김 실장을 설득시키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나 일본 배우가 그 역할이 된다면?”
“그건… 아니야. 나는 희성이 널 믿어.”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서로 각자 생각하는 바가 너무나도 달랐고.
김 실장과 나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나는 눈을 스르르 뜨고 김 실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 나 믿어줘.”
내 말에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 제임스 감독의 작품에서 악역을 맡게 된다 하더라도, 그 작품을 하고 싶지가 않아.”
김 실장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아침이 밝자마자 내가 회사랑 22세기 폭스에 연락할게.”
“고마워, 형.”
“나도 네 생각을 충분히 이해했고, 맞다고 생각해. 하지만 당장 내일이 오디션이라는 게 걸렸던 거야.”
“응, 무슨 말인지 알아. 하지만 그래서 더 신중하고 빠르게 결정해야 된다고 생각했어.”
“네 선택을 믿을게. 항상 희성이 네 선택이 옳았으니까.”
김 실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휴대 전화를 내게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한시라도 빨리 회사랑 연락하고 올게. 제프리 감독 쪽은 어떻게 연락하면 되는 거야?”
“그건 내가 할게!”
“알겠어.”
김 실장은 휴대 전화를 들고 한쪽 방으로 향했고.
나 역시 브라이언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김 실장은 22세기 폭스에 오디션을 보지 않겠다는 통보를 보냈다.
김 실장이 그들에게 연락을 보냄과 동시에.
나에게는 브라이언의 연락이 하나 도착했다.
지이잉.
-진, 제프리 감독과 미팅 잡았어. 오늘 당장 가능하대. 주소랑 시간은….
브라이언은 내게 제프리 감독과의 약속 장소와 시간을 보내주었고.
재차 알람이 울리며, 문자가 도착했다.
-행운을 빌어. 항상 널 응원하는 친구이자, 팬인 브라이언이.
그의 문자를 보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형, 제프리 감독님과 미팅 잡았어.”
내 말에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22세기 폭스 쪽에도 오디션 가지 않겠다고 연락했어.”
“나 얼른 준비하고 올게.”
“알겠어. 나도 준비하고 있을게.”
김 실장과 나는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호텔을 나섰다.
제프리 감독을 만나러 가는 길.
나는 제프리 감독 작품의 대본을 떠올리며 대사를 곱씹었고.
내 옆에 있는 김 실장은 고민에 빠진 듯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 물음에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음… 아무래도 오디션 당일에 못 간다고 연락한 게 신경 쓰여서.”
“근데 어쩔 수가 없었잖아. 차라리 오디션에 합격한 이후에 연락하는 게, 제임스 감독이나 일본 배우 히로토에게 더 미안한 일일 거야.”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긴 하지. 근데 제임스 감독이 아마 소식 듣고 펄쩍 뛰고 있을 것 같아.”
제임스가 화가 났을 거라 생각하는 김 실장.
그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22세기 폭스에서, 그리고 제임스가 나를 나쁘게 이야기할까 걱정되는 마음에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먼저 장난질한 건, 내가 아니라 제임스 감독이야.”
내 말에 김 실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형, 너무 걱정하지 말자. 괜찮아, 이건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내 말에 그는 입술을 다문 채 나를 바라보았다.
“제프리 감독 미팅에 집중하자.”
김 실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쓰읍 소리를 냈다.
“혹시 자칫하다가 제프리 쪽에서 그 배역을 까버리면 어쩌나… 그것도 걱정될 수밖에 없어.”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브라이언이 제프리 감독과 같은 인물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브라이언은 그저 친분이 있는 제프리 감독에게 나를 추천했을 뿐이지.
제프리 감독이 먼저 나를 캐스팅하고 싶어, 브라이언에게 나를 연결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브라이언이 나를 소개한 뒤.
제프리 감독이 오케이를 해, 나와 미팅을 잡았다는 것이 사실이고.
이제 제프리 감독의 작품을 하게 될지, 떨어지게 될지는 연기를 하는 내게 달려 있었다.
지금 미팅 장소에 도착해서 연기를 펼치는 건, 오로지 내 몫인 셈.
그래서 나는 혹시나 제프리 감독의 작품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제임스 감독의 오디션에 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누가 강요를 한 게 아닌, 내가 선택한 것이니까.
설사 내가 제프리 감독의 작품에서 떨어진다면, 그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내 연기력 부족일 테니까 말이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나 그렇게 된다면, 할리우드… 나중에 오면 되는 거지.”
대수롭지 않게 말을 툭 내뱉는 나를 보며 김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의 물음에도 나는 확고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응, 내 값어치를 알고 존중해주는 곳에서 함께 작업을 하고 싶지, 나를 하대하는 사람이랑은 작업하고 싶지 않아.”
내 말에 김 실장은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
“응, 게다가 어제 말한 대로 내가 제임스 감독의 작품을 한다면, 촬영하는 내내 제임스 감독에게 시달릴지도 모를 테지.”
***
똑똑.
제프리 감독을 만나기 5초 전.
떨리는 마음에 깊은 심호흡을 내뱉었고.
“네, 들어와요.”
이내 선한 목소리의 제프리 감독이 문 안쪽에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배우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나는 김 실장과 함께 제프리 감독에게로 다가갔고.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
“오오, 진희성 배우님. 만나서 반가워요.”
“처음 뵙겠습니다, 감독님.”
“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제프리는 우리에게 자리를 안내하며 자상하게 물었고.
“네, LA가 처음이라 아는 길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휴대 전화로 지도를 보면서 왔습니다. 하하.”
“고생하셨어요. LA에 온 지는 며칠이나 됐어요?”
제프리와 우리는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첫 만남의 어색한 기류를 풀어갔다.
그렇게 몇 분간의 인사를 나눈 뒤.
본격적인 작품에 대한 이야기, 오늘 미팅을 갖게 된 이야기에 대해 나누기 시작했다.
“그럼 제임스 감독의 작품은 어떻게 된 건가요?”
제프리 감독은 자신의 라이벌인 제임스 감독 작품에 대해 물었고.
나는 코를 찡긋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리 라이벌이라지만, 제임스 감독에 대해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순 없었으니까.
“원래 오늘이 오디션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다녀온 건가요?”
“아니요. 오늘 아침에 오디션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연락했습니다.”
“정말요?”
재차 되묻는 그의 입가에는 미묘한 웃음이 보였고.
“네, 제프리 감독님과 작품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오디션을 포기하고 오게 되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제프리 감독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럼 제임스는 지금쯤 벙쪄 있겠는데요?”
제임스 감독에게 물을 먹였다는 사실에 그는 껄껄대며 계속해서 웃음을 보였고.
이내 차분해진 그는 다시 작품 이야기로 돌아와 내게 말했다.
“브라이언에게 들은 대로 진희성 배우는 괜찮은 사람 같아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고맙죠. 그리고 브라이언 추천이라면, 어떤 사람이든 믿을 수 있고요.”
그와 브라이언의 관계는 꽤 돈독한 듯 보였다.
“그럼 잠깐 대본 좀 볼까요?”
제프리는 본격적으로 내 연기, 영어 발음을 확인하기에 나섰고.
준비가 되어 있던 나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여기 페이지 연기 좀 볼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나는 빠르게 배역에 몰입해 그의 앞에서 짧은 연기를 보였다.
그렇게 몇 분의 연기가 끝난 뒤.
제프리는 흡족한 얼굴로 손뼉을 부딪쳤다.
짝짝짝-.
“이야, 연기며 발음이며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내게 말했다.
“사실… 저도 진희성 배우의 뉴욕 연극 영상을 봤거든요. 그때부터 이미 당신의 연기력은 합격이었어요.”
제프리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마른침을 삼켰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악수를 청하듯 내게 손을 뻗었다.
“우리 작품 같이 만들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