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34 – 할리우드 (9)
휴대 전화의 벨소리가 울리자, 나는 서둘러 시선을 옮겼다.
“이 시간에 누가….”
[발신인: 브라이언]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뉴욕에서 만난, 연극을 하던 배우.
그의 연기에 감탄해 우린 친구가 되었고.
관객과의 소통이 좋아 연극을 선호하던 그 배우는 어느덧 카메라 앞에 서면서 유명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앞날을 위해 응원하고 축하해 주었다.
그에게 전화가 온 것을 보자마자 내가 놀란 이유.
메일도 아닌, 전화가 왔다는 건 내가 미국에 와 있다는 걸 안다는 건가?
나는 재빨리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진, 나 브라이언. 통화 가능해요?
“그럼요.”
-지금 할리우드죠?
그의 말에 나는 놀란 얼굴로 답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여기에도 기사가 났거든요. 제임스 감독의 영화….
동양인들의 경쟁이 미국 전역에 기사가 크게 났을 리도 없고.
그럼에도 나와의 친분으로 인해 내 기사를 찾아본 건가?
“아… 그거 보고 내가 할리우드에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맞아요. 혹시 지금 어느 호텔에 머물고 있어요?
“네?”
-지금 좀 만났으면 하는데, 내가 진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갈게요.
“지금이요?”
-예, 지금. 급한 일이라서요.
“알겠어요. 내가 바로 호텔 주소 보낼게요.”
브라이언의 다급한 목소리와 당장 찾아오겠다는 그의 말.
정확히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건,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그에게 호텔 주소를 찍어 보냈고.
-가깝네요. 30분 안에 도착해서 전화할게요.
그는 내게 짧은 답장을 보내왔다.
“희성아, 무슨 일 있어?”
옆에서 통화를 들은 김 실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물었고.
“브라이언, 기억나?”
내 말에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 너 뉴욕에서 엄청난 연극 보고 친해졌다는 그 배우 아니야?”
“맞아. 근데 브라이언이 나를 꼭 봐야겠다고 하더라고.”
“왜?”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나는 머리를 가로젓고는 말했다.
“모르겠어. 근데 꼭 만나야 할 것 같았어. 나 잠시만 나갔다 와도 될까?”
진지하게 묻는 내 얼굴을 본 김 실장은 아무런 답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펼쳐 있는 대본을 덮고.
휴대 전화에 열려 있던 기사도 꺼버린 채, 브라이언을 만나러 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
“진, 여기!”
너무나 오랜만에 만나는 브라이언의 모습.
그는 내가 묵고 있는 호텔 로비의 카페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아 내게 손을 흔들었다.
“브라이언!”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슨 일인지에 대한 궁금함은 사라진 채.
반가운 마음을 표출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진짜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요?”
내 말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요. 이렇게 할리우드에서 우리가 얼굴을 보는 날이 오다니.”
나는 자리에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브라이언, 근데 뉴욕이 아니라, LA에는 어쩐 일이에요?”
내 말에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저번에 메일 보냈던 대로, 영화 촬영을 하느라 최근에 LA로 왔어요.”
“이야, 너무 잘됐다. 직접 만나서 축하해줄 수 있어서 행복해요.”
“고마워요, 진.”
나는 그가 주문해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고.
우리는 꽤 오랜만에 만난 터라 서로의 근황과 안부를 묻기에 바빴다.
하지만 현재 그와의 만남이 성사된 건, 얼굴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고.
그 역시 서둘러 내게로 몸을 당겼다.
“진, 우선 급하니까 내가 찾아온 용건부터 말할게요.”
브라이언의 말에 나는 얼굴의 미소를 지워내고는, 굳은 얼굴로 그의 말에 집중했다.
“네, 대체 무슨 일이죠?”
“아까 통화로 말한 대로 진의 기사를 오늘 아침에 접하게 됐어요.”
“그걸 어떻게….”
그는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었다 빼며 조심스레 내게 말했다.
“진이 오디션을 보러 왔다는 걸 아니까.”
브라이언의 의미심장한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는 한숨을 짧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근데 내가 생각한 거랑 다르게 흘러가서….”
“그게 무슨 말이죠?”
“실은… 내가 진을 제임스 감독에게 추천했거든요.”
브라이언의 말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들고 있던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뭐라고요? 그게 진짜예요?”
그는 내 물음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진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뉴욕에서 펼쳤던 즉흥 연기 영상을 봤거든요. 그리고 그 영상이 너무 감명 깊어서 내가 제임스 감독에게 당신을 추천했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가 제임스 감독과 친분이 있을 거라고 예상치 못했고.
더군다나 브라이언이 나를 누군가에게 추천했을 거라는 것 역시 추측하지 못했지.
“그래서 그 영상을 본 제임스 감독이 당신에게 섭외를 했다고 들었어요.”
“이번에 말이죠?”
“아니요. 이번 영화 전에 섭외가 갔을 거예요. 예전에 할리우드에서 섭외가 들어왔던 적 있지 않나요?”
그의 말대로 이전에 할리우드에서 섭외가 들어온 적은 몇 번 있었다.
전부 제임스 감독에게서 온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감독을 확인하기도 전에 할리우드 행을 거절했던 적이 여러 차례 있지.
그중에 제임스 감독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제임스 감독과의 작품 활동이 싫었다면, 이번 할리우드 섭외에 응하지 않았을 터.
제임스 감독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할리우드 행을 꺼렸다.
아직 내가 국내에서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한국 배우로서 먼저 자리를 잡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 내 입지를 굳혔다는 생각으로 이번 할리우드 섭외에 응하여 오게 된 것이었고 말이다.
브라이언의 말에 나는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랬는데, 거절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게 정확히 제임스 감독의 영화였던 건 기억이 안 나지만요.”
“내가 알기론 그때 진이 섭외를 거절한 걸 제임스 감독이 기억하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아….”
“그래도 진과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어서, 이번에 섭외를 한 거라고 들었고요.”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며 답했다.
“그래도 저와 계속 작업하고 싶어 해주셔서 감사하네요. 브라이언도 나를 추천해줘서 너무 고맙고요.”
그는 내 말에 쓰읍, 소리를 내며 답했다.
“근데… 그때의 일 때문인지, 단순 섭외가 아니라 순순하게 배역을 주고 싶지 않은 심리인 것 같더라고요.”
“네?”
“기사… 아까 다 읽었거든요. 일본 배우와 경쟁을 펼치는 구도를 만들었더라고요. 제임스 감독이 말이에요.”
그의 말에 나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번, 내가 자신의 섭외를 거절했기에.
이번에 쉽게 좋은 배역에 넣어주지 않고, 일본 배우와 경쟁을 펼치게 만든 것.
더군다나 한일전이라는 엄청난 명목으로 경쟁을 붙여, 두 나라 관객의 마음까지 요동치게 만드는 수법이었지.
…어쩐지.
나는 한숨을 삼키며 읊조렸다.
“그런 거였군요. 내일 오디션을 무조건 잘 봐야겠네요.”
내 말에도 브라이언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어떤 역할을 맡게 되었든, 제임스 감독과 촬영을 하게 되면 힘들 수도 있어요.”
“그건 무슨 말이죠?”
“제임스 감독의 성격상… 무난하게 촬영시키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에요.”
나는 브라이언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제가 촬영장에서 고생하겠다는 말이군요?”
그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분명해요.”
“하아….”
브라이언은 내 한숨을 듣자마자 주변을 둘러보고는 몸을 더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래서 말인데….”
그의 당겨진 몸과 함께 나 역시 귀를 쫑긋 세웠고.
“나한테 좋은 방법이 하나 있어요.”
“어떤 방법이죠?”
“진, 제프리 감독이라고 들어봤어요?”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제프리 감독.
미국의 유명한 감독 중 한 명이자, 제임스 감독과 유명한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프리, 제임스 감독은 비슷한 시기에 영화를 개봉하는 경우가 많았고.
흥행이 엎치락뒤치락하며 평생의 라이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지.
“내가 제임스 감독과도 친하지만, 제프리 감독과도 연이 있어요.”
“그래요?”
“네, 그래서 이번에 두 작품 다 출연을 고사했거든요.”
한국에서는 파벌이나 라인이 형성되는 게 굉장히 뚜렷한 편이다.
라이벌 감독이 있다면, 한 감독의 영화를 찍고 라인을 타는 배우는.
상대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지 않기도 하고, 그 감독이 상대 감독 라인 배우를 섭외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
하지만 미국은 그와 달리.
너는 너, 나는 나의 개인주의가 강한 편이었다.
라이벌 감독, 그 감독의 라인, 친분과 별개로 섭외를 하고는 하지.
“그래서 내가 제프리 감독에게 진을 소개해주면 어떨까 하거든요.”
“저를요?”
“사실… 이미 진의 이야기는 해뒀는데, 진이 오케이를 하면 가고. 아니면 그대로 제임스 감독의 영화 오디션을 가도 돼요.”
새로운 제안에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었고.
브라이언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깊게 생각해봐요.”
나는 그의 말에 마른침을 크게 삼키며 입을 열었다.
“혹시 제프리 감독의 작품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진이 보고 싶어 할까 봐 미리 가져왔어요.”
브라이언은 가방 속에서 대본을 꺼내 내게 건넸다.
완벽한 대본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작품이 들어가기 전의 최종 대본은 확실했다.
나는 그 대본을 건네받으며 그에게 말했다.
“읽어보고 결정할게요.”
“그래요. 기왕이면 제임스 감독의 작품 오디션 전에는 결정해야 할 거예요.”
“왜죠?”
“그렇지 않으면, 제프리 감독이 저쪽에서 떨어져 자신에게 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게요. 고마워요, 브라이언.”
***
브라이언과 헤어진 후.
곧바로 호텔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브라이언이 건네준 제프리 감독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장을 읽던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 뭐야, 이거 소재가 같잖아.”
제프리 감독의 영화.
그러니까, 이번에 제프리 감독이 촬영하려는 작품은 제임스 감독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9·11테러에 관한 내용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오디션을 보고, 촬영을 한다는 건….
“이번에 두 라이벌이 정면 승부를 하겠다는 거잖아!”
나는 한층 더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대본을 살펴갔다.
그렇게 한참이 흐르고.
대본을 모두 읽은 나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프리 감독에 나오는 동양인 캐릭터는 단 한 명.
그러니까 내가 제프리 감독 작품에 들어간다면, 저 배역을 연기하게 될 터.
제임스 감독에 나오는 동양인 캐릭터 두 개와 비교해도.
제프리 감독의 동양인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연이기는 하지만 거의 주연급 조연에 가까웠지.
초반부터 존재감을 뽐내다가 중후반 즈음, 장렬하게 전사하는 캐릭터.
너무나 큰 비중의 역할이었지만, 중반에 죽음을 맞이하기에.
후반 분량이 없어서 조연으로 설정된 캐릭터인 것 같았다.
그 캐릭터가 나오는 장면을 다시 살펴보던 나는 다시금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소름이 돋다 못해, 머리까지 쭈뼛 서는 기분.
내 꿈에서 봤던 장면이랑 너무나 똑같은 신이 제프리 감독 대본에 있었고.
그 역할 역시, 내가 맡게 될 배역이었다.
대본을 보다 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이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