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95)화 (195/303)

195화 #34 – 할리우드 (8)

LA에서 여행을 하는 것도 잠시.

배역을 따내기 위해,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방에서 나가지 않은 채 연습에 매진했다.

그때.

“희성아.”

김 실장이 내게로 다가왔다.

“응?”

“우리 오디션 날짜 잡혔어.”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래?”

“다음 주, 이날이야.”

김 실장은 내 앞에 있는 작은 종이 달력의 날짜를 가리키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 충분해. 그때까지 완벽하게 연습할 수 있어.”

내가 악역을 따내고 싶어 하는 것을 김 실장도 알기에.

내 말을 단번에 알아듣고 응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충분히 네가 될 수밖에 없어.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데, 이렇게나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데. 일본 배우를 뽑는 게 더 이상한 거지.”

“하아… 꼭 돼야만 해.”

어느새 눈이 붉어지도록 연습한 탓에.

내 얼굴을 본 김 실장은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좀 쉬었다가 해도 돼.”

“알겠어.”

“나 나가서 커피 좀 사올게. 마실래?”

나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 고맙지.”

“응, 금방 다녀올게.”

김 실장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호텔을 빠져나갔고.

그의 말에 나는 대본을 덮은 채, 의자에 푸욱 몸을 기대 누웠다.

그리고 멍하니 휴식을 취하다가 손에 들린 휴대 전화를 자연스레 열었다.

“한국에는 별일 없으려나?”

당연히 내 손은 연예부 기사를 클릭했고.

‘진희성’을 검색했다.

최근에 나에 대한 기사가 올라올 것이 없었기에.

아무 생각 없이 이름을 검색했지만, 기사는 최근에도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진희성, 美 할리우드 진출?]

[진희성, 의미심장한 개인 SNS… HOLLYWOOD…?]

[진희성, ‘HOLLYWOOD’ 美 할리우드 진출 vs 여행. 정답은?]

[LA에서 목격된 ‘진희성’, 할리우드 진출 신호탄…?]

LA에 오기 전, 비행기에서 올렸던 사진 한 장.

아무런 이야기 없이 ‘HOLLYWOOD’라고만 올렸던 그 게시물이 생각보다 큰 파장을 불러온 듯 보였다.

미간을 찌푸린 채 기사 하나를 클릭했고.

내용은 역시나 예상한 대로 잔뜩 추측성 기사였다.

소속사를 통한 확인이 아닌, 기자들의 추측.

단지 게시물 하나.

짧게 쓴 ‘HOLLYWOOD’ 단어로 온갖 추측이 이어졌고.

그 기사들을 보며 여러 감정이 동시에 섞여 맴돌았다.

내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이렇게 기사가 나올 수 있고.

추측이 난무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그만큼 인지도가 오르긴 했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했다.

내가 유명해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단역 배우에, 조연에 머물고 있었다면.

같은 게시물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기사들이 쏟아지기는커녕, 작은 기사 하나도 적히지 않았을 테니까.

SNS에 접속해 내가 쓴 게시물을 확인했다.

그 게시물에는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고.

여전히 댓글은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와, 우리 희성 오빠 할리우드 진출하는 건가?

-이제야 올 게 온 거지. 진희성 연기력이면, 솔직히 할리우드 이제 가는 거 늦은 거지. 진작 갔어야 한다고 봄.

-진희성 무슨 영화 찍으려나. 뭐든 찍기만 하면 믿고 본다.

-오빠, 한국에서 응원하고 있을게요!

-여행이든, 할리우드 진출이든, 우리 오빠 하고 싶은 거 다 해♡

-믿고 보는 배우 진희성. 늘 응원합니다.

-희성 오빠 앞길 아무도 막지 마!

팬들의 댓글을 하나하나 읽으며,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져왔다.

“하아… 힘들었는데, 팬들 댓글 읽으니까 좋은데?”

아직 확정 기사도, 회사에서 나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도 발표하지 않았지만.

팬들은 그저 나를 응원해주고 있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저 나 진희성 자체를 응원하고 존중해주며 사랑해주는 느낌.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에 눈을 질끈 감고, 이 기분을 고스란히 느꼈다.

팬들이 내게 주는 사랑만큼.

아니, 그보다 더 내가 연기로 보답해야만 했다.

그게 그들이 원하는 바일 테니까.

미소를 지은 채, 눈을 뜨고 다시 댓글을 읽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댓글을 빠짐없이 읽으려다 보니, 그 시간 또한 어마어마하게 흐를 수밖에.

수많은 선플들 사이에, 빠질 수 없는 악플들도 눈에 들어왔다.

-엥? 걍 여행 간 거지. 무슨 할리우드 진출ㅋㅋ?

-진희성 아직 할리우드 갈 급은 아니지 않나?

-진희성 주제에 할리우드는 에바ㅋㅋ

-기자들 할리우드 글에 우르르 달려왔쥬? 근데 아니쥬?ㅋㅋ

-희성아, 그냥 한국에서나 잘하자. 물 들어왔을 때, 한국에서 노 저어라.

-실력 모르고 들떠서 할리우드 갔다가 망한 배우 한둘도 아닌데;;

악플 역시 심심찮게 댓글 사이사이에서 눈에 띄었다.

최근 악플러를 고소했고.

그 악플러가 신민영임이 밝혀진 이후에, 사람들은 꽤 충격에 휩싸였다.

그래서인지 눈에 띄게 악플이 줄어든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플이 단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위만 조금 낮아졌을 뿐이지, 악플이 없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악플에 신경 쓰며 골치 아파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실력이 부족하다는 댓글.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게 웃긴다는 댓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들에게 똑똑히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니까.

서둘러 휴대 전화 화면을 끈 뒤, 다시 대본 연습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을 연습하던 중.

“희성아, 좀 쉬고 있었어?”

커피를 사서 돌아온 김 실장이 내게로 다가왔다.

“응, 쉬다가 이제 막 연습 시작했어.”

“여기 커피 좀 마시면서 해.”

“고마워, 형.”

나는 커피를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대본을 바라보았고.

김 실장은 그런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희성아, 잠깐만.”

“왜?”

평소 내 연습을 방해하지 않는 김 실장이기에.

앞에 앉아 나를 부르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뭐야, 무슨 일 있어?”

내 물음에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대본을 덮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뭔데?”

“방금 회사 통해서 연락받았거든?”

설마 내 SNS에 올린 게시물이 기사 났다는 건가?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 건가.

나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김 실장의 눈을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

“일본인 배우. 누군지 알아왔어.”

“누구래?”

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져 김 실장에게 다급히 물었다.

“히로토라고… 여기.”

그는 내게 일본 배우 히로토에 관한 내용들을 내밀었다.

히로토의 사진.

그동안 해왔던 작품들, 그의 인지도 자료까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 배우였지만, 간간이 들어본 적은 있는 배우였다.

일본에서는 잘나가는 배우 중 한 명이었으니까.

“얼굴은 몇 번 봤던 배우야.”

“응, 나도. 일본에서는 톱 급 배우라 하더라고.”

그가 해왔던 일본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히로토가 일본에서 유명한 배우라는 것을.

다작을 하기도 했지만, 근 몇 년간 모든 작품에서 주연만을 맡아온 경력이 보였으니까.

한국에서 굳이 비교하자면… 최서빈 정도가 되는 듯했다.

한국에서 나는 최서빈보다 경력도, 인지도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없다기보다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김 실장 역시 히로토의 프로필을 보며 작게 읊조렸다.

“아… 이거 조금 빡세기는 한데?”

그의 말에 나는 한숨을 삼키며 답했다.

“형, 나 할 수 있을까?”

내 말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빼버릴까?”

“정말?”

그는 진심 어린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네가 히로토에 밀린다는 건 절대 아니야. 근데 솔직히 말하면, 배역이 혹시라도 애매할 것 같으면 안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거지.”

“그건 그래.”

“왜냐면, 내가 지금 이 상황을 회사에 이야기했더니……. 할리우드 이 새끼들, 분명 언론화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관객 때문에?”

“그렇지. 한국과 일본, 한일전 마케팅을 펼치겠지.”

그의 말에 나는 참고 있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그러다가 만약에라도 배역을 일본에게 빼앗기면, 진짜 골치 아파지겠다.”

내 말에 김 실장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도 난 희성이 네가 히로토를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

그의 말에도 나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답했다.

“좀 해보고, 안 좋은 배역이면… 그냥 아예 출연 안 하는 거로 하자.”

“응, 너무 그 생각에 사로잡혀서 고민하지 말고, 하던 대로 연습에 매진하자.”

“알겠어.”

나는 다시 대본을 펼쳤다.

하지만 이내 떠오르는 꿈속의 장면들.

내가 꿈으로 보긴 했지만.

꿈에서 봤던 그 첫 번째, 착한 배역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굳이 좋은 배역을 빼앗으면서까지, 결코 할리우드에 남고 싶진 않았지.

꿈속에서 봤던 것을 이번에는 거스르리라, 다짐하며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

드디어 다가온 오디션 하루 전날.

아침이 밝자마자 눈을 번뜩 떠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지막 하루.

오늘은 연습에 매진해야 한다.

이미 연습은 수도 없이 했기에, 상대 배역들의 대사까지 모두 외워버린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에 연습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대본을 덮은 채, 대사를 읊던 그때.

“희성아!”

침대에 누워 있던 김 실장이 다급하게 내게로 달려왔다.

“왜?”

“X발… 기사 났어.”

“뭐라고?”

그의 말에 나는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설마….

[美 할리우드 – J 배우와 일본의 H 배우. 조연 놓고 최종 경쟁….]

[할리우드에서 펼쳐지는 한일전… J 배우 vs 日 H 배우.]

[美 할리우드 영화계에도 불어닥친 한일전. J 배우가 조연 경쟁에서 승리를 이끌 수….]

나는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미친.”

내 말에 김 실장은 자신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한국이랑 일본 동시에 기사 다 떴어.”

“하아….”

“이 개자식들, 일부러 하루 전에 빼도 박도 못하게 하려고 기사 낸 거야.”

나와 김 실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나는 서둘러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살폈다.

-와, 할리우드에도 한일전?

-한일전에서 지면 역적이쥬? J 배우 누구냐?

-최근에 할리우드로 간 배우 누구 있지?

-마녀사냥 하지 말고, 얼른 J 배우부터 찾아라.

-한일전인데, J 배우라고 하지 말고 실명 까시죠?

-할리우드에서 한일전이라니, 흥미롭네ㅋㅋ

댓글은 어떤 영화인지, 앞뒤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한일전이라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나는 김 실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 일본 쪽은 어때?”

휴대 전화로 상황을 보던 김 실장은 전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했다.

“일본도 마찬가지야. 22세기 폭스… 그 인간들이 의도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어.”

“하아… 너무 열 받는다. 이용당하는 것 같아서.”

이제 와서 발을 뺀다면, 일본 측에서는 오디션에 떨어져서 도망가는 거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한일전이라는 자극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나는 꼬여버린 이 상황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채, 김 실장에게 말했다.

“형, 할리우드는 원래 이래?”

“미국이잖아. 흥행을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할걸?”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고.

“이런 게 문화적으로 허용되는 나라잖아.”

“허용된다라… 더 어이가 없다.”

마음에 들지 않은 이 상황.

그리고 22세기 폭스에게 더욱 분노가 끓어올랐다.

입술을 잘근 깨물며 분을 삭이던 그때.

지이잉.

내 손에 들린 휴대 전화에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