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34 – 할리우드 (7)
22세기 폭스.
제임스는 제작자와 함께 대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때요, 저번에 말한 대로 동양인 배우로 두 명 그대로 가는 거?”
그의 말에 제작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죠. 그래야 그 나라들에서 관객이 몰릴 테니까요.”
제임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림도 딱 보기 좋잖아요. 한국과 일본의 싸움이라… 그 나라 사람들끼리 알아서 싸우고, 경쟁하다 보면, 이익 보는 건 결국, 우리 22세기 폭스일 테니까요.”
“역시 제임스의 생각은 대단하다니까요. 하하.”
제임스는 뿌듯하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각국에서 서로 지기 싫어서 영화를 보려고 애쓸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좋아요. 당연히 제임스 감독을 믿죠.”
그는 제임스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쓰읍, 소리를 내며 대본을 바라보았다.
“동양인들 배역 두 개 중에, 악역은 누가 맡기로 했습니까?”
궁금하다는 듯 묻는 그의 말에 제임스는 영상을 내밀며 답했다.
“이게 한국인, 진희성 배우가 오늘 카메라 테스트하고 간 영상이에요.”
제작자는 턱을 어루만지며 진희성의 연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음… 확실히 연기를 잘하네. 확 빨아들이는 무언가가 있는데?”
“맞아요. 꽤 매력 있는 캐릭터입니다.”
“일본 배우 영상도 볼 수 있나요?”
제임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직이요. 일본인은 내일 올 겁니다.”
“그럼 제임스는 누구에게 악역을 줄 생각인가요? 제임스의 생각이 꽤 궁금하군요.”
제임스는 눈썹을 치켜올린 채, 진희성의 연기 동영상을 빤히 바라보았다.
“누구든 상관없어요. 그저 더 잘하는 배우를 비중 큰 배역으로 뽑는 거죠.”
“하긴, 그 나라에서 나름 잘하는 배우들을 데려왔으니, 누가 어떤 역할을 해도 소화해 내겠죠.”
제임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우리는 그저 더 잘하는 배우를 필요로 하니까요.”
***
“와아! 할리우드 좋네.”
“히로토, 네가 할리우드에 진출한다는 말에 팬들이 난리가 났어.”
히로토의 매니저는 그를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 나도 이렇게 신났는데.”
“우선 얼른 호텔로 이동하자.”
히로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22세기 폭스는 내일 가는 건가?”
그들은 미리 준비된 차에 올라탔고.
“어, 내일 오후에 바로 갈 예정이야.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는데.”
“뭔데?”
그는 앞에 앉은 운전기사를 흘긋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음… 우선 도착해서 이야기할게.”
어차피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니저는 입을 굳게 닫았다.
무슨 이야기이길래, 말을 아끼나 싶은 마음에 히로토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는 궁금함을 삼키며 호텔 도착을 기다렸다.
몇십 분 뒤.
호텔에 도착한 히로토는 서둘러 호텔 방 문을 닫으며, 매니저를 불러 세웠다.
“아까 하려던 말이 뭐야?”
“어떤 거?”
“차에서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했잖아.”
그의 말에 매니저는 탄성을 보내며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앉아봐. 나도 미국 들어와서 연락받은 거거든.”
“22세기 폭스에서 연락했다는 거지?”
“어, 당장 내일 미팅인데, 연락 줬더라고.”
그의 말에 히로토는 불안했는지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미팅은 내일이라고 했으니까, 미팅이 취소된 건 아닐 테고. 대체 무슨 일이야?”
“흠… 우리 배역 말이야. 지정되지 않았대.”
매니저의 말에 히로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장난해?”
“그러니까 말이야. 내일 카메라 테스트를 하고 나서 정하려는 것 같은데. 그 배역에 대해서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하자고 하더라.”
히로토는 눈을 질끈 감고 화를 삭이는 듯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매니저를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배역 중에 고른다는 건, 내가 무조건 영화에 캐스팅이 된다는 거잖아. 그건 맞지?”
“응, 두 가지의 배역 중에 고민하고 있나 봐.”
매니저의 말에 히로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럼 나머지 한 개의 배역은 누가 하는데?”
히로토는 쓰읍, 소리를 내며 질문을 이어갔다.
“나랑 비슷한 캐릭터라도 있는 건가? 일본인은 나만 뽑는다고 한 거 아니었나?”
매니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한국인.”
그의 말에 히로토는 순식간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 한국 배우야?”
“하아… 나도 이걸 미국에 도착해서 들었어. 혹시나 싶어서 너랑 둘이 있을 때 이야기하려고 했고.”
히로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본과 한국의 라이벌전이 되겠네.”
“응, 그 한국 배우랑 히로토 너의 연기를 본 다음에 배역을 결정하려고 하는 거야.”
그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매니저를 향해 물었다.
“대체 왜 한국인을 나랑 붙인 거지? 그냥 우리나라 배우로 두 명 하면 되는 거잖아.”
히로토의 말에 매니저는 혀를 내두르며 답했다.
“뻔하지. 일본과 한국의 경쟁.”
“그러니까 그걸 왜 여기에….”
“우리랑 한국의 관계성을 알고 있고, 두 나라 다 영화 시장이 좋잖아.”
그의 말에 히로토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거기서 각 나라의 괜찮은 배우를 데려오면, 우리나라랑 한국에서 자동적으로 관객이 확보될 테고 말이야.”
매니저의 말에 히로토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읊조렸다.
“거기에다가 일본과 한국의 구도까지… 관객들한테 자동적으로 마케팅까지 되겠네.”
“그렇다고 생각하겠지. 그 그림을 원했을 테고.”
히로토는 앉아 있던 소파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소리쳤다.
“양아치들 아니야?”
그의 분노를 본 매니저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히로토, 그렇긴 하지만 잘 생각해봐. 이거 쉽게 온 기회 아니야. 무려 할리우드라고.”
“하아….”
히로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분노가 한껏 치밀어 오른 그에게 매니저가 다가가 물병을 건넸다.
“네가 지금 화가 난 거 충분히 이해해. 나도 연락받고 화가 났거든. 근데 이성적으로 생각하자고.”
그의 말에 히로토는 아무런 대답 없이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이게 할리우드 발판이 될 거야. 히로토, 네 연기라면 한국인 놈 누르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말이야.”
매니저의 말에 히로토의 거친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눈에 살기를 띠던 히로토는 결의에 찬 얼굴로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고 읊조렸다.
“한국 놈… 누군지는 몰라도 내가 연기로 잘근잘근 밟아 줘야겠어. 내 할리우드의 발판으로 삼아주지.”
***
쾅-.
길었던 하루.
나는 호텔로 들어서자마자 온몸에 힘이 쫙 풀린 듯했다.
영어로 연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몇 배로 긴장하고 최선을 다했던 연기.
하지만 그 끝에는 예상치도 못한 일본인 배우의 등장이 있었고.
그 이야기와 동시에 멘탈이 흔들렸다.
전혀 내 예상에 없던 이야기였으니까.
“하아… 형, 나 좀 쉬고 있을게.”
“그래, 오늘 고생했는데 좀 쉬어.”
“응.”
나는 대본을 손에 쥔 채 방으로 이동했고.
일본 배우를 떠올리며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내게 득이 되는 건 없는 것 같았다.
괜한 감정 소비만 하는 느낌이었으니까.
다만 일본 배우와 경쟁한다는 사실에 의지는 불타올랐지만 말이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어 생각을 떨쳐냈고.
서둘러 대본을 펼쳐 내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낮에 미팅 장소에서 연기했던 두 배역.
그 배역의 대사는 영화 중 극히 일부를 보여준 것이기에.
영화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알고 싶었으니까.
짧은 몇 개의 장면에서는 첫 번째 배역과 두 번째 배역의 비중이 뚜렷하게 보이는 듯했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를 수도 있을 터.
그렇게 한참 동안 앉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대본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두 배역의 비중 차이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심하게 드러났다.
첫 번째 배역은 착한 역할이었고.
예상과 다를 것 없이 주인공 패밀리와 늘 함께하는 역할.
그러니까 즉, 주인공들이 등장할 때만 가끔씩 등장하는 감초 역할일 뿐인 것이지.
단역이라고 하기에는 얼굴이 등장하는 신이 꽤 많은 편이었고.
조연이라고 하기에는 그만큼의 대사가 없었다.
리액션과 장면에 등장하는 것만 많을 뿐.
그 역할이 보여주는 매력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일 만큼의 대사가 없었지.
그에 반해 두 번째 역할인 악역.
그 악역은 비중이 꽤 센 편의 배역에 속했다.
주연과 맘먹을 듯한 비중이 나오는 역할이었다.
당연했다.
악역이라는 건, 관객들에게 사랑받을 수 없는 역할이지만.
그만큼 미움을 사기 위해서는 나쁜 역할을 보여주기 위해 많이 등장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생각보다 대사도 더 많고, 보이는 장면이 많았다.
악역의 역할은 바로 ‘테러리스트’.
이 영화는 미국에서 일어났던, 9·11테러에 대한 내용을 다룬 소재의 영화였다.
그래서 가볍게 접근해야 할 영화의 소재는 아니었다.
그만큼 무겁고 진지하게 임해야 하는 영화인 것이지.
테러에 대한 이야기이자, 미국인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던 사건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와 일본인이 겨뤄야 할 배역은 단 두 개.
주인공 패밀리와 함께하는 단역 같은 조연 역이냐.
테러를 저지른 악역, 테러리스트이냐.
이 둘 중 하나의 역할을 내가 맡게 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는 착한 역할, 나쁜 역할을 고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어떤 배역이 자신과 잘 어울리는지.
그리고 그 배역을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당연히 나는 후자인 악역을 맡고 싶었다.
테러리스트가 착한 역할보다 나와 더 잘 어울린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할리우드에 내 첫발을 딛게 하는 영화.
그 영화에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도 모르는 단역 같은 역할로 출연하고 싶지는 않았다.
악역이더라도 비중이 크고.
존재감이 강한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게 이 영화에서 맡는 테러리스트라도 말이다.
테러리스트 배역을 맡게 된다면, 분명 나는 대중들에게.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 업계의 사람들에게 악역이라는 강한 인상이 남을 테지만.
그게 내가 원하던 바였다.
그들에게 남게 되는 인상이 악역이든, 착한 역할이든 상관없었다.
단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
한국의 진희성이 기억되기만 한다면, 할리우드의 첫 계단은 성공적일 테니까.
절대 일본 배우에게 악역 자리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무조건 이 배역은 내가 해야만 해.”
나는 대본을 펼쳐, 악역 배역의 대사를 집중해 연습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내가 따내야 할 테니까.
한참을 연습에 매진하던 그때.
불현듯 한국에서 꾸었던 마지막 꿈이 떠올랐다.
“나… 이거 꿈에서 봤던 장면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꿈에서 보았던 것들 역시 건물에 비행기가 부딪쳐 사람들이 혼비백산이 된 모습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꿈에서 봤던 모든 것들.
그리고 꿈속에서의 내 모습을 떠올려냈다.
“내가 꿈에서 맡았던 역할은….”
머리를 부여잡고 기억을 되짚었고.
“…테러리스트가 아니었잖아!”
꿈속에서의 나는 빌딩 내부에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즉, 테러리스트가 될 수가 없었던 것이지.
물론 대본 내용과 그때 꿈에서 봤던 내용이 일치하는 것은 없었다.
단지, 내용의 흐름이 조금 비슷할 뿐.
꿈과는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영화와 비슷하다고 본다면, 내가 맡을 배역은 악역이 아니라… 착한 역할?
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내 운명… 바꾸고 싶다.”
대본의 테러리스트 배역을 손으로 가리키며 읊조렸다.
“바꿔야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