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34 – 할리우드 (6)
“뭐지, 왜 대본이 두 개인 거지?”
대본 두 개를 모두 펼쳐 내용과 배역을 확인했다.
보통은 연기력을 확인하기 위해, 같은 배역의 다른 장면을 연기한다.
예를 들면, 화가 나는 장면이나 기쁜 장면 등.
여러 장면에 대한 연기를 펼쳐야 그 배우의 연기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데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이 두 가지의 대본은 장면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배역이 다른 대본.
그러니까 즉, 지금 두 가지의 배역을 모두 연습해 연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본을 살폈다.
굳이 내게 두 가지의 배역을 준 이유가 뭐지?
가만히 지켜보던 김 실장이 내게 물음을 던졌다.
“왜, 두 개 대본에 뭐 이상한 점이 있어?”
김 실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고.
“음… 형, 이거 뭔가 이상해.”
“뭐가?”
그는 대본 두 개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 스태프가 두 가지 다 테스트한다고 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답했다.
“응, 근데 단순히 두 가지 대본이 아니라, 역할이 두 개야.”
“그럼 희성이 네가 맡을 배역이 아직 안 정해졌다는 건가?”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김 실장은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잠시 말을 망설였다.
그러던 그가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선 너는 연습부터 하고 있어. 자세한 건 내가 알아보고 올 테니까.”
그의 눈빛을 본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한국에서도, 그리고 할리우드에서도 김 실장은 내게 너무나 든든한 존재였다.
“고마워, 형.”
“응, 어쨌든 카메라 테스트해야 하는 거니까, 두 개 다 연습 잘하고 있어.”
“알겠어.”
김 실장은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고.
나는 서둘러 의아함은 묻어둔 채 받은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짧은 대본 두 개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떤 배역인지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 개의 대본은 주인공인 패밀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조연이었다.
주인공과 관계가 깊은 조연이라 비중이 클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듯 보였다.
주인공 패밀리 옆에서 가끔 감초 역할만 할 뿐, 나오는 장면 역시 단독으로 나오는 것은 없는 듯 보였고.
대사 역시 많지도 않았다.
그저 주인공들 옆에서 리액션하고, 행동으로 연기를 하는.
쉽게 말해 단역과 비슷한 느낌의 조연이었지.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대본 또한 조연이었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캐릭터였다.
비중이 있을 수밖에 없는 역할.
다름 아닌 악역이었다.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알 수 없다 보니, 어떤 식의 악역인지.
어떤 내용에서 나쁜 역할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캐릭터가 악역이라는 것은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배역의 비중이 크다는 것 또한 대본을 통해 느낄 수가 있었다.
단순히 영화를 보며 착한 역할은 첫 번째.
나쁜 역할은 두 번째 대본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배우로서, 그리고 처음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나로서는 첫 번째 착한 역할보다 두 번째 악역이 끌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카메라에 몇 번 비치는 것보다는 나쁜 역할일지라도 비중이 큰 것이 좋을 터.
두 가지 배역을 모두 연기해봐야 한다는 미심쩍은 마음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 마음을 꾹 눌러둔 채 서둘러 연기 연습에 매진했다.
***
대본 연습을 한 지 어언 2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진희성 배우님, 카메라 테스트 들어갈게요.”
그제야 스태프가 내게로 다가와 손을 흔들었다.
“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 자리를 이동했고.
김 실장은 이곳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그저 대기실에서 나를 기다릴 뿐이었지.
그녀를 따라 옆에 있는 방으로 이동했고.
그곳에는 한국에서 봤던 오디션과 다를 것 없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단, 다른 점은 오디션장이 어두웠다는 것.
테이블에는 몇몇의 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았고.
평소 한국의 오디션이었다면, 그들과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 연기를 펼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촬영 현장처럼 몇 대의 카메라만이 눈에 들어왔다.
실제 촬영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
“진희성 배우님, 그럼 대본 중 1번으로 표시해 뒀던 것부터 연기 시작하시면 됩니다.”
어느 한 남성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고.
나는 눈을 스르륵 감고 깊게 심호흡을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준비되면 편하게 시작하세요.”
나는 서둘러 첫 번째 대본의 배역.
그 착한 조연의 캐릭터에 몰입했고.
활짝 미소를 지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카메라 앞에 상대 배역이 있다고 가정한 채로 연기를 시작했다.
“헨리, 내일은 꼭 다 같이 만났으면 좋겠어.”
풍부한 표정 연기를 보이며 대사를 이어갔다.
“아니지, 나는 헨리와 함께하는 게 좋다고. 같이 가면 안 될까?”
그렇게 2시간가량 연습한 연기를 이어갔고.
어둠 속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내 연기에 집중한 것 같았다.
그저 그들의 펜대 굴리는 소리만이 귓가에 들려왔으니까.
한참 대사를 이어간 후.
“좋아요. 그럼 두 번째 대본 역할 연기 시작해 주세요. 차분히 심호흡하고 시작해도 됩니다.”
내 연기가 끝나자마자, 그 어떤 반응도 없이 다음 연기의 시작을 알렸고.
나는 빠르게 악역을 내 몸속에 몰입시켰다.
그러곤 조금 전 역할과는 전혀 다른 눈빛을 장착한 채 카메라를 쏘아보았다.
사악하고 악랄한 사람의 눈빛으로.
정이나 사랑의 감정은 전혀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말이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몇 분간 연기가 이어졌고.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무리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내 말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고생했어요. 아까 그 대기실로 가 있으면, 잠시 뒤에 미팅을 진행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연기에 대한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곧바로 미팅을 진행할 테니까.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이동했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한 가지.
배역이 두 가지인 것에 대한 의문을 품은 채, 미팅 시간을 기다렸다.
카메라 테스트는 영어 발음이나 발성을 보는 것이기에.
캐릭터 이해도 같은 건 중요치 않았다.
하지만 분명 두 가지의 배역 대본을 주었다는 건, 그 두 가지의 캐릭터 중 하나를 맡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
미팅 룸에 입장하자, 조금 전 카메라 테스트와는 달리 굉장히 환하고 밝은 분위기가 나를 반겼다.
“오오, 희성 씨.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제임스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고.
나 역시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답했다.
“제임스, 이렇게 할리우드에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어서 자리에 앉아요.”
“네.”
나와 김 실장은 나란히 그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제임스 감독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진희성 배우의 연기를 보고 너무 감명 깊었어요.”
내가 눈썹을 들썩이자, 그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이어갔다.
“한참 된 것 같기는 한데, 뉴욕에서 연극 무대에 오른 적이 있죠?”
그의 말에 나는 곧장 머리를 흔들었다.
뉴욕 여행 때 즉흥으로 무대에 올랐던 그 영상.
그 영상이 인터넷에 돌아다녔고, 그걸 보고 나를 알게 된 모양.
영상이 처음 알려지게 된 것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부터였으니까.
“아, 그걸 보셨군요?”
“네, 아주 인상 깊었어요. 너무 연기가 좋아서, 그 기억이 한참을 가더라고요.”
“좋게 봐주셨다니, 너무 영광스럽습니다. 하하.”
우리는 훈훈함 속에 대화를 이어갔다.
“한국에서 오는 건 힘들지 않으셨나요?”
걱정스레 묻는 그의 말에 나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뭐,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할리우드에 온다는 설렘에 한 시간도 안 걸린 것 같았습니다.”
“하하, 진희성 배우 같은 사람이 할리우드에 안 오면, 어떤 한국 배우가 오겠습니까.”
제임스는 나를 잔뜩 띄워주며 말을 이었다.
“방금 대기실에 계시는 동안, 조금 전에 연기한 걸 찍은 녹화본을 몇 번이고 봤습니다.”
나는 긴장되는 마음에 마른침을 크게 삼켜냈다.
연기를 처음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영어로 연기를 하는 것, 한국 감독이 아닌 미국 감독에게 내 연기를 보여주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지.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진희성 배우의 연기력은 이미 믿고 있으니까, 사실 연기력이 제게 중요한 점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아무래도 영어로 연기를 해야 하니까, 저는 연기보다 딕션. 그러니까 영어를 하는 발음을 너무 보고 싶었어요.”
나 역시 걱정한 부분이었고.
한국에서부터 가장 신경 쓰며 연습한 점이었기에, 제임스의 평가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뉴욕에서 펼쳤던 연기도 영어로 한 것이었지만. 그건 가벼운 일상 대화였으니까요. 진지하게 연기에 임했을 때, 딕션이 어떤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그런데 저는 너무 좋았어요.”
제임스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고.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답했다.
“정말요?”
“네, 어색하거나 부족한 부분도 없었고요.”
“다행입니다. 연습 열심히 했거든요.”
그는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쪽에 진희성 배우가 바라는 점이 있을까요?”
“바라는 거라면 어떤….”
내 말에 그는 입술을 손으로 매만지며, 내게 말했다.
“출연료나 촬영 환경 같은 거 말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출연료 부분은 저와 따로 이야기 나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는 막힘없이 술술 풀려가고 있었고.
나는 대본을 두 개 주었던 이유에 대해 묻기 위해 타이밍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제임스가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사실 저희 측에서 고민 중인 게 한 가지가 있습니다.”
“네? 어떤 거 말씀이시죠?”
“우선, 제가 통대본은 아직 안 드렸죠?”
연습 때 주었던 대본은 짤막한 몇 장의 대본이었고.
전체 대본을 받지 않았냐는 그의 말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연습 때 주신 몇 장이 전부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이건 가져가셔서 천천히 읽어보시죠.”
그는 두꺼운 대본을 내게 내밀었고.
나는 그 대본을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고민 중이라고 하신 건, 어떤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사실… 저희 쪽에서 동양인 후보가 총 두 명이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와 김 실장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명이요?”
“네, 희성 씨를 포함해서 두 명입니다.”
김 실장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임스에게 물었다.
“다른 동양인 배우도 한국 사람인가요?”
“아니요. 일본인 배우입니다.”
나는 그의 말에 한숨을 삼켜냈다.
어쩐지….
두 가지의 배역 대본을 줄 때부터 세한 느낌이 감싸더니.
그렇다면, 그 두 개의 배역을 나와 일본인이 나눠 갖는다는 건가?
나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설마… 아까 연기했던 두 가지의 배역을 두고 경쟁을 펼쳐야 하는 건가요?”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정확히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연기하신 배역 두 개 있죠?”
“네.”
“둘 다 조연 역할인데, 그걸 두 분이서 나눠 가질 예정입니다.”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이 찌푸려지고 말았다.
말이 나눠 가지는 거지, 결국은 내가 말한 대로 경쟁을 펼치는 것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지금 이 앞에서 한숨을 내쉬며, 분노를 표출할 순 없었기에.
나는 최대한 표정을 숨기며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