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92)화 (192/303)

192화 #34 – 할리우드 (5)

LA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아… 내가 LA에 오다니.”

미국 땅을 밟아본 게 처음은 아니었다.

몇 달 전, 휴식차 뉴욕에 왔으니까.

하지만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느낌이 너무 달랐다.

뉴욕은 홀로 여행을 즐기러 왔던 것이고.

지금은 본업인 배우.

연기의 업무를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니까.

더군다나 할리우드가 있는 이곳.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연기를 하는 배우 중 할리우드를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순간을 누구나 꿈꾸며 살아왔을 테니까.

배우들에게는 그 어느 곳보다도 상징적인 장소인 ‘할리우드’.

“형, 나 진짜 행복해!”

그저 공항에서 공기를 들이마셨을 뿐인데도,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고개를 돌려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형, 뭐 해?”

김 실장은 어느새 내 옆이 아닌, 몇 걸음 뒤로 걸어가 공항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고.

“나 미국 처음 와보잖아. 공항부터 사진 좀 남기려고.”

그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휴대 전화를 꺼내들었다.

“하하, 알겠어. 거기 서봐. 내가 사진 찍어줄게.”

휴대 전화를 열어 그를 찍었고.

김 실장은 한껏 멋있는 포즈를 취하며 공항 앞에 섰다.

우리는 공항에서부터 미국을 만끽하며 즐겼고.

미리 예약되어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이야… 여기 진짜 좋다!”

나와 김 실장은 열고 들어선 호텔 방문이 닫히기도 전에 창문으로 달려갔다.

“와아! 역시 미국은 시티뷰가 대박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건물들.

어두워지는 하늘 덕에 건물들은 점점 그 조명을 빛내고 있었다.

“형, 뷰도 좋은데, 여기 호텔 구경부터 하자.”

“좋지.”

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호텔 안에서 미국을 만끽했다.

어느덧 시차와 긴 비행에 지친 우리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희성아, 우리 내일은 쉬고 다음 날 미팅이거든?”

김 실장은 내게 일정을 브리핑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답했다.

“그래서 우리 내일은 쉰다는 거지?”

“어, 시차 적응도 좀 하고….”

김 실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내일 어디 갈까?”

내 말에 김 실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누워 있다가 갑자기 그렇게 신이 난다고?”

“당연하지. 나 LA 처음 온단 말이야. 게다가 할리우드야, 형.”

나는 할리우드라는 말에 흥분해 누워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김 실장은 입꼬리를 올린 채 답했다.

“나도 처음이야. 하하.”

그러고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물었다.

“그래서 내일 가고 싶은 곳 있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김 실장의 눈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할리우드!”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김 실장의 어깨를 툭 치고 말을 이었다.

“내일은 나만 따라와. 내가 로드뷰로 이미 할리우드 여행 다 해봤으니까.”

***

다음 날 아침.

시차 탓인지, 설레는 마음 때문인지 새벽부터 번뜩 눈을 뜨고 말았다.

시간을 보고 놀란 나는 김 실장이 깰세라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켜 그의 침대를 바라보았고.

“어?”

침대에는 김 실장의 흔적이 온데간데없었다.

서둘러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침실 문을 벌컥 열었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내며.

재빨리 휴대 전화 카메라로 김 실장의 모습을 담아냈다.

김 실장은 어제 우리가 넋을 놓고 바라보았던 시티뷰가 보이는 창문.

그 창문 끝에 걸터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들이켜고 있었다.

새벽이라 창밖에는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고.

김 실장은 그 모습을 마치 매일 봤던 사람처럼 자연스레 그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아니, 창가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는 자신의 모습을 즐기는 듯했다.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 형. 대체 뭐 하는 거야?”

웃음소리에 김 실장이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희성이 너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몰라. 빨리 나가서 놀고 싶어서 그런가?”

우리는 이런 서로의 모습을 보고 웃음으로 LA에서의 첫 아침을 맞이했다.

몇 시간 뒤.

우리는 호텔을 나서기 시작했고.

나는 김 실장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우리 처음으로는 할리우드에 갈 거야.”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물었다.

“우리 어차피 내일 미팅 때문에 할리우드 가잖아.”

“아니. 진짜 할리우드 사인이 있는 그곳으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HOLLYWOOD’ 사인.

항상 TV나 영화에서만 보던 그곳에 직접 가보고 싶었다.

그저 글씨가 세워져 있는 사인이 있는 것뿐이지만.

내 눈으로 그 사인을 보고 싶기도 했고.

내가 느끼기에는 굉장히 상징적인 공간이라고 느껴졌다.

“할리우드 사인?”

“어, 할리우드 글자가 새겨진….”

김 실장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뼉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오오- 나도 거기 알지. 근데 거기가 갈 수 있는 곳이었어?”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응, 하이킹이라서 편하게 입고 나가자고 한 거야. 한참 걸어서 올라가야 하기는 해.”

내 말에 김 실장이 싫은 내색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반가워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좋아. 나도 거기서 사진 찍어야겠다. 하하.”

그의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희성이 너도 인증 샷 잘 찍어 놔야겠다.”

김 실장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입꼬리를 찢으며 말했다.

“내일 미팅 잘 되면, 그 사진으로 SNS에 딱 올려. 할리우드 진출했다고.”

“좋은데?”

우리는 편한 운동화와 간편한 복장으로 할리우드 사인 하이킹을 하기로 결정했다.

***

할리우드 사인을 보고 온 뒤.

호텔에서 옷을 갈아입고, 사람이 북적이는 할리우드 거리 한복판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진짜 꼭 가야 할 곳이야.”

내 말에 김 실장은 이제 기대가 된다는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어딘데?”

“할리우드 왔으면,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는 가줘야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곳이다.

“그 바닥에 별 많은 그곳?”

“어, 별에 영화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잖아.”

나는 그 거리를 상상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거기를 지나서 차이니즈 시어터도 가야 해.”

그러자 김 실장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는 뭔데?”

“배우들 손도장, 발 도장 찍힌 곳.”

“아, 거기가 차이니즈 시어터구나?”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거기는 정말 꼭 가보고 싶어. 무조건 가야 해.”

내 말에 김 실장이 나를 앞서가며 소리쳤다.

“나도 꼭 갈래. 뭐 해, 얼른 가자!”

할리우드 거리에 도착하자 보이는 이색적인 광경.

영화나 TV, 인터넷으로만 접하던 곳에 내가 서 있자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북적이는 사람들.

그리고 영화의 캐릭터들을 코스프레한 많은 사람들.

연기를 하는 내게.

영화의 배역들을 보며, 꿈을 키우던 내게는 너무나도 천국 같은 곳이었다.

나는 넋을 놓은 채 구경했고.

김 실장은 카메라로 나를 담기에 바빴다.

“형, 나만 찍지 말고, 형도 찍어줄게. 저기 서봐.”

“우선 너 먼저 찍고.”

우리는 사진을 찍으며 함께 거리를 걸었고.

바닥에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의 이름이 가득했다.

“이야, 이걸 내가 실제로 보다니….”

감격에 젖어 있는 내게, 김 실장이 웃음을 터트리며 작게 읊조렸다.

“희성아, 여기는 온 사람들이 바닥만 보면서 걷는다?”

그의 말에 그제야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모든 사람이 전부 바닥에 적힌 배우를 보며 걷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하, 그러네. 다들 우리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 찾기에 바쁜가 봐.”

그렇게 여행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후에도 한참이나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배우들의 손도장, 발 도장 앞에서 인증 샷을 찍으며 여행을 이어갔다.

***

다음 날.

LA에서의 두 번째 아침이 밝았다.

오늘 역시 새벽에 눈을 뜨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기상이었다.

“하아… 형, 나 떨린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잡고 심호흡을 했다.

“당연히 떨리지. 나도 떨리는데….”

김 실장은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을 이었다.

“우리 연습도 많이 했으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

“잘할 수 있을까?”

“그럼. 어차피 너 들어가면, 또 잘할 거면서!”

나는 김 실장의 말에 용기를 얻어 의지를 불태웠고.

우리는 서둘러 22세기 폭스로 갈 준비를 시작했다.

제작사로 향하는 길.

여전히 쿵쾅거리는 심장에 차분히 심호흡하며 길을 걸었고.

김 실장은 내가 떨리지 않도록 계속해서 말을 걸어주었다.

“희성아, 우리 도착하면, 우선 대본을 줄 거야.”

“응.”

“대본 좀 읽어보고, 카메라 앞에서 그 배역 연기를 짧게 한다고 하거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카메라 테스트를 바로 하는구나.”

“어, 그런 후에 미팅을 진행할 거야.”

“알겠어. 아… 점점 더 떨린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토닥이며 긴장을 풀어주려 애쓰고 있었다.

긴장한 덕에 일찍 도착한 회사.

나와 김 실장은 22세기 폭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돼요.”

“네.”

직원은 곧장 자리를 떠났고.

김 실장과 나는 텅 빈 공간에 남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럼 여기서 대본부터 주고 시작하는 거지?”

“응, 대본 준 다음에 연습 좀 하고, 카메라 테스트할 거야.”

나와 김 실장은 함께 떨리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일찍 도착한 탓에 우리는 십여 분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나는 입을 풀며, 어떤 역할의 대본을 내게 줄지 상상하며 긴장을 삼켜냈다.

그때.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조금 전의 직원과는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다.

“한국에서 온 진희성 배우 맞죠?”

그녀의 말에 나는 활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반가워요. 본격적으로 미팅을 하기 전에, 배역 테스트를 좀 했으면 해요.”

이미 김 실장에게 순서를 들은 터라, 나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대본 주시면, 연습하고 있겠습니다.”

“예, 시간은 충분히 드릴 테니, 차분히 연습해서 테스트 먼저 갈게요.”

그녀는 내게 대본을 건네다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카메라가 앞에 있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손에 들린 대본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는 두 개의 대본이 들려 있었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양쪽 대본을 번갈아 보았다.

그때.

직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본 두 개를 모두 내 몸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대본 두 개인데요?”

내 말에 그녀는 아무런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요. 대본 두 개.”

그러고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개 다 연습하고, 테스트 가겠습니다. 그럼 이따 봬요.”

그녀가 떠난 후.

나는 곧장 대본을 펼쳤다.

“형, 대본이 두 권인데, 다른 장면으로 두 번 연기를 하라는 건가?”

내 말에 김 실장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우리는 재빨리 대본을 바라보았다.

“무슨 대사인지 보자.”

두 개의 대본을 펼쳐든 나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거 대본 두 개가 다른 역할인데?”

배역이 다른 두 개의 대본.

나는 그 대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게 뭐지?

다른 배역을 번갈아 보던 나는 지금 이 미팅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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