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34 – 할리우드 (2)
“이야, 여기는 진짜 매일 와도 안 질릴 것 같아.”
나는 감탄을 쏟아내며 음식을 입에 넣었고.
김 실장 역시 내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여기 부대찌개는 진짜 최고지.”
정신없이 먹어 어느새 국물이 바닥을 보일 때쯤.
“맞다. 희성아, 영어 공부는 잘돼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묻는 김 실장에게 나는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응, 열심히 하고 있지. 현지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유학생 정도로 보이려면 더 노력해야 해.”
“대단하다. 그래도 금방 실력이 늘어서 다행이야.”
김 실장은 혀를 내두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에이, 대단하긴.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부터 영어 좀 더 해둘 걸 그랬어.”
“이미 그 정도 실력이 되니까, 금방 실력이 느는 거지.”
그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연습생들 회사에서 과외 붙였거든. 근데 진짜 초등학생 정도로 영어도 못하는 애들이 수두룩하더라.”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형, 요즘 초등학생들 영어 얼마나 잘하는데!”
“하긴, 하도 어릴 적부터 부모들이 영어 가르치니까, 그럴 만도 하지.”
“맞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물을 한 모금 마셨고.
나는 문득 어제 최서빈과의 술자리가 생각나, 손가락을 튕기며 김 실장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형, 나 할리우드 가는 거 말이야. 그거 내용 좀 자세히 알 수 있어?”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다 말해줬는데. 어떤 거 궁금한데?”
“음… 나한테 왔던 메일 좀 볼 수 있어?”
김 실장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사무실 들어가서 바로 보여줄게.”
“알겠어.”
“궁금하다. 갑자기 무슨 일 있어?”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그에게 답했다.
“할리우드에서 나한테 연락이 왔잖아. 그게 내가 바로 캐스팅되는 건지, 아니면 오디션을 보고 떨어질 수도 있는 건지 궁금해서.”
김 실장은 그제야 입을 벌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 그거? 22세기 폭스 쪽에서도 바로 섭외 확정은 아니고, 테스트를 좀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오디션인 건가?”
갑자기 불안감에 미간을 찌푸렸고.
김 실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우리가 아는 그런 몇백 대 일, 몇천 대 일. 이런 오디션은 아닐 거야. 아무래도 영어 발음이나 희성이 널 실제로 보고 싶은가 봐.”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나를 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봤을 테니까, 실물도 봐야겠지. 연기를 영어로 해야 하니까, 발음도 봐야 할 테고.”
“그렇지. 그게 궁금했던 거야?”
“응, 이렇게 할리우드를 갔는데, 내가 그저 몇천 명 중에 붙어야 하는 1인이라면… 말이 다르니까 말이야.”
나는 쓰읍, 소리를 내며 한숨을 삼켜냈다.
“형, 혹시 불안하니까, 그런 오디션은 아닌지 체크 좀 해주라.”
김 실장이 긴장한 내 얼굴을 보며,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 내가 알아볼 테니까, 걱정 말고 연습하자.”
“고마워.”
***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
“다 모였어요?”
가장 상석에 앉은 감독이 앞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물었고.
그들은 동시에 합창하듯 소리쳤다.
“네.”
“그럼 우리 이번 작품에 캐스팅할 배우들 이야기 좀 해보죠.”
감독은 다리를 꼬고 의자에 기댄 채 입을 열었고.
나머지 팀장과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해온 다이어리를 펼쳤다.
감독 뒤에 커다란 벽.
그리고 그 벽 한가운데 붙어 있는 로고와 글씨.
‘22세기 폭스’였다.
감독은 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이번 작품에 그 동양인에게 연락한 건 어떻게 됐죠?”
그의 말이 끝나자 가장 안쪽에 앉은 팀장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한국에 진희성 배우 말씀하시는 거죠?”
팀장의 말에 감독은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크게 뜬 채 답했다.
“이름은 모르겠고. 그 한국 동양인 배우.”
“아… 네, 진희성 맞습니다. 그 진희성 배우는 오기로 했고, 날짜는 서로 조율해 보기로 했습니다.”
“날짜는 아직 조율 전이고?”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쪽에서는 다음 달 중에 셋째 주 월요일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감독이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말을 잘랐다.
“날짜는 우리가 지정해서 알려주도록 해요.”
“네.”
“동양인이 할리우드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따라야지. 날짜 조율은 무슨.”
감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할리우드에, 그것도 우리 22세기 폭스에서 연락을 줬는데. 당연히 우리를 따라야지, 안 그래?”
그의 말에 직원들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죠. 한국 배우가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게 쉬운 건 아니니까요.”
“그럼요. 동양인들이 미국인보다 연기를 그렇게나 잘하는 것도 아니고요.”
감독은 팀장을 향해 눈썹을 들썩였다.
“그 동양인 배우 사진 좀 다시 봅시다.”
팀장은 다이어리를 뒤적여, 진희성의 프로필 사진을 꺼내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감독은 사진을 받아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끄덕이며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음… 그래, 이 얼굴이었지. 확실히 얘는 동양인치고 동양인 특징이 심하지는 않아.”
왼손에 사진을 들고, 오른손 손가락을 뻗어 진희성의 사진 속 눈, 코, 입을 하나씩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눈이 쫙 찢어진 건 동양인 특성이니까, 뭐. 그래도 전형적인 동양인 마스크는 아니니까 이 정도면 충분해.”
동양인을 평소 낮게 보는 감독은 진희성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작품 특성상 동양인이 출연해야만 했다.
“하아… 미국인으로 데려다가 동양인 연기를 시킬 배우는 아직도 못 찾은 거지?”
“네, 확실하게 티가 나니까요.”
감독은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읊조렸다.
“하긴, 게다가 그 한국인들은 할리우드 영화가 나오기만 하면, 난리가 나잖아?”
그의 말에 팀장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맞습니다. 거기에다가 한국 배우가 나온다고 하면, 더 관객이 몰리니까요.”
“아직도 동양인들은 우리를 따라오려면 멀었다니까. 하하.”
감독은 의자를 뱅그르르 돌려, 자신들의 제작사 로고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동양인들 영화계까지 이끌어야 한다니, 참 어깨가 무겁네요.”
그는 사악하게 입꼬리를 찢으며 말했고.
눈썹을 들썩이며 팀장을 바라보았다.
“그 진희성? 동양인 배우, 다음 달에 날짜 우리가 골라서 통보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우리가 뽑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바로 달려올 겁니다. 하하.”
***
나는 오늘도 쉬지 않고 영어 회화 공부와 연기 연습을 하기 위해 사무실에 출근했다.
한국 작품을 할 때보다 배로 노력이 들어가는 해외 작품.
당연히 언어까지 마스터해야 했기에, 노력이 배가될 수밖에.
출근하자마자 회의실로 들어가 연습을 하고 있었고.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김 실장이 종이를 한 아름 안은 채 회의실 문을 벌컥 열었다.
“형, 왔어?”
“응, 언제부터 연습하고 있었어?”
나는 시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한 시간 되어가는 것 같아. 근데 손에 든 건 다 뭐야?”
내 물음에 그는 종이 무더기를 책상 위에 올린 뒤, 자리에 앉았다.
“이거 해외 작품들 대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물었다.
“이번 22세기 폭스에서 온 대본이야?”
내 말에 그는 코를 찡긋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 대본은 아직 안 왔지. 아마 현장 가면 보여줄 거야.”
“그럼 이건 뭔데?”
“너 연습하라고, 예전 해외 작품들 대본 가져온 거야.”
그의 말에 나는 입을 벌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연습할 거구나? 챙겨줘서 고마워.”
“네가 저번에 말했던, 그 영화 작품이랑 미국 드라마 대본.”
나는 김 실장을 향해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오오, 이거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는 내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뿌듯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힘 좀 썼지. 하하.”
“역시, 형이 최고라니까.”
나는 서둘러 김 실장 앞에 놓인 대본들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대본을 넘겨 대사를 바라보던 중.
댓글에 관한 내용이 대사에 적혀 있었고.
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손가락을 튕기며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맞다, 형.”
“응?”
“저번에 악플러 잡았다고 하지 않았어?”
내 말에 김 실장이 손뼉을 부딪치며 답했다.
“어, 그래서 연락 준다고 했는데, 아마 이번 주 내로 연락이 오지 않을까 싶네?”
“누군지 빨리 확인 좀 하고 싶은데….”
“그러게. 나도 그 면상 좀 보러 가고 싶다.”
나와 김 실장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아휴, 악플러 생각하면서 시간 보내는 것도 아깝다. 나 얼른 연습할게, 형.”
“알겠어. 나 자료 더 찾아둔 거 있는데, 그거 출력만 해서 올게.”
“응.”
김 실장이 회의실을 나서자마자 나는 다시금 대본을 펼쳤다.
십여 분이 흐르고.
잔뜩 영어로 적힌 대본을 읽어 내려가던 중.
조금 전 나갔던 김 실장이 헐레벌떡 회의실로 달려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급한 일임은 분명했다.
“형, 무슨 일 있어?”
내 물음에 그는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고.
“뭔데 그래?”
재차 묻는 내 말에 그는 쓰읍, 소리를 내며 말을 망설였다.
급하게 달려왔는데, 말을 미루는 그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
할리우드에서 연락이 온 건가 싶어, 불안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형, 혹시… 나 오디션 보는 거래?”
김 실장은 내 물음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22세기 폭스에서 연락이 온 게 아니라….”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끝을 흐렸고.
나는 차분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
김 실장은 내 시선을 피해 책상에 눈을 고정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방금 경찰서에서 연락받았는데.”
“헐, 악플러가 경찰 조사 받으러 이제 왔대?”
경찰서라는 말에 흥분한 나는 책상을 손으로 내려치며 소리쳤고.
내 물음에 김 실장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응.”
“뭐야. 좋은 소식인데, 왜 이렇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어.”
한참이나 나를 못살게 굴었던 악플러.
그가 잡혔다는 소식만으로도 기뻤는데.
이제 정체를 밝힐 수 있다는 생각에 통쾌함을 느낄 찰나였다.
김 실장 역시 악플러의 얼굴을 보겠다고 나보다 더 방방 뛰었는데.
갑자기 이런,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이는 그에게 나는 의아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근데 악플러가 너한테 사과하고 싶다고 하더라고.”
사과….
그렇게 나에 대한 억측을 만들고, 거짓을 뿌리고 다녔으며.
심지어 내 부모에 대한 욕까지 올린 그 악플러에게 사과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진심이 담긴 사과가 아닌, 그저 당장 눈앞에 벌을 받기 싫어 내뱉는 사과일 테니까.
더군다나 사과, 그 짧은 몇 마디로 내 상처를 씻을 순 없기 때문이었다.
당장 마음이 풀릴지는 몰라도, 그 사과로 인해 내가 악플을 읽을 때의 마음까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을 터.
오히려 사과를 한다는 악플러의 생각이 이기적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됐어. 사과는 무슨. 그냥 빨간 줄 그어 버리라고 해.”
내 말에 동조해줄 거라 생각했던 김 실장.
하지만 그는 내 말이 끝나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책상을 바라보고 있었고.
“형, 사과 안 받는다고, 그냥 법대로….”
김 실장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근데 그 악플러가 말이야. 희성이 너랑 아는 사람이더라고.”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뭐?”
“나도 물론 알고 있는 사람이고.”
“대체 누군데?”
급하게 뛰기 시작한 심장.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앞에 앉은 김 실장을 바라보았고.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너 신민영… 기억해?”
김 실장의 입에서 나온 이름.
‘신민영’이라는 세 글자를 듣자마자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상간녀의 유혹’ 같이 찍었던 그 신민영.”
김 실장은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작품을 언급하며 신민영의 이름을 재차 이야기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김 실장에게 말했다.
“당연히 알지. 신민영. 설마, 신민영이 그 악플러라는 거야?”
김 실장은 연달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신민영이 그동안 그 아이디로 악플 달았던 사람이래.”
“…미친.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