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34 – 할리우드 (1)
테이블에 김 실장과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김 실장의 표정은 여전히 흥분되어 있었고.
나 또한 평화로운 얼굴은 아니었다.
김 실장은 아직도 가쁜 숨을 내쉬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희성이가 할리우드라니… 나 진짜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답했다.
“나도 할리우드라는 말 듣고 나서 지금 심장이 멈추지를 않아.”
그러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희성아, 근데 심장이 멈추면 죽어.”
“하하, 맞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우선 우리 너무 흥분한 것 같으니까, 차분하게 커피라도 마시면서 이야기 좀 해보자.”
“그래, 좋아.”
나는 서둘러 김 실장에게 선물로 받은 커피 머신으로 향했고.
커피 향을 맡으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형, 여기 커피.”
“고마워.”
그는 기다렸다는 듯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하아… 이제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아.”
“나도. 그래서 형, 이제 자세히 이야기 좀 해봐.”
내 말에 김 실장은 잔을 밀어내고 몸을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갑자기 할리우드에서 섭외가 온 거야.”
그의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고.
김 실장의 눈을 바라보는 내 얼굴 역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떤 장르에, 어떤 역할이야?”
“음… 우선 역할은 조연이야.”
얼마 전부터 항상 주연만을 맡은 나였기에.
김 실장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굳이 그 실망감을 숨기는 것이 아니었다.
조연으로 섭외가 왔다는 것에 속상한 마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지.
물론 한국에서는 이미 주연급에 올랐지만.
처음으로 가게 되는 할리우드에서까지 내가 주연을 맡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추호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저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왔다.
“당연히 할리우드면 조연부터 시작해야지. 설마… 단역은 아니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물음을 던졌다.
아무리 조연이더라도.
얼굴을 잠깐 비추는 단역이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내 말에 김 실장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하지. 단역은 아니고, 조연 중에서도 어느 정도 비중 있는 배역이라고 했어.”
“그런 배역이면 좋네.”
“응, 제작사는 22세기 폭스야.”
그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되물었다.
“22세기 폭스? 거기 유명한 곳 아니야?”
아무리 배우라 하더라도 모든 제작사를 알 수는 없었다.
제작사가 한두 개도 아니고.
특히나 한국 제작사가 아니니까.
하지만 할리우드에서도 유명한 몇 개의 제작사는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이 업계에서 일하는 배우라면, 그리고 할리우드에 관심이 있는 배우라면 말이다.
“어, 맞아.”
생각보다 큰 제작사에 마른침을 삼키며 김 실장에게 물었다.
“그러면 22세기 폭스 쪽에서 제작진이 한국으로 나를 보러 오는 건가?”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자세한 건 협의해 봐야겠지만, 그쪽에서 우리한테 비행기 티켓을 주는 거로 알고 있어. 우리가 할리우드로 가야 해.”
“오히려 좋은데?”
그토록 꿈꾸던 할리우드.
그곳에 여행이 아닌, 연기를 위해 갈 수 있다니.
아직 떠나지는 않았어도, 나라는 배우가 할리우드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떨려왔다.
“어때, 할 생각 있어?”
김 실장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고.
나는 활짝 입꼬리를 올리며 소리쳤다.
“당연히 콜이지!”
우리는 그렇게 술 대신 커피로 잔을 부딪쳤고.
챙-.
김 실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말했다.
“그럼 당장 내일부터 회화 수업 시작하자.”
***
“이 정도 실력이면, 금방 하시겠는데요?”
회사에서 붙여준 영어 과외 선생님.
수업을 마무리하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말했다.
“그런가요?”
“네, 기본기가 이미 탄탄하셔서, 저랑 영어로 대화만 나누면서 수업해도 금방 성장하실 것 같아요.”
영어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원어민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지난번 뉴욕에 여행을 갔을 때도 현지인들과 소통할 정도의 실력은 됐지.
다만, 이렇게 회화 수업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할리우드에 연기를 하러 간다면, 이건 여행자의 실력이 아닌.
현지인의 실력을 보여야 할 테니까.
단순히 소통이 되냐, 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그 나라의 사람처럼 보여야 하는 게 중요했다.
회화가 가능한 수준과 능숙하게 자국어처럼 말하는 건 너무나도 다른 것이니까.
“이 정도면 됐다, 싶은 게 아니라. 저는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내 말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열심히 도울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녀는 내게 종이 한 무더기를 건네며 말했다.
“그럼 다음 시간까지 이거 한 번 읽고 연습해 오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종이를 받아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열심히 해올게요.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에요. 희성 씨도 고생하셨어요.”
선생님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울리는 휴대 전화.
그녀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보내고,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희성아, 수업 중이야?
“아니. 방금 끝나고, 선생님 나가셨어.”
-그래?
내 말이 끝나자마자 김 실장의 빠르게 걷는 듯한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이내 전화가 끊어졌다.
그럼과 동시에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희성아!”
“뭐야, 형. 바로 앞에 있었어?”
회의실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김 실장.
그는 내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다급히 내 앞으로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응, 할 말이 있어서.”
“뭔데?”
“할리우드 쪽이랑 이야기는 끝냈어.”
그의 말에 나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물었다.
“오오, 뭐래?”
“이제 가는 일정만 정하면 될 것 같아.”
처음 할리우드에서 연락이 왔다고 할 때부터 설레고 있었지만.
실감은 나지 않았다.
이게 끝까지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제 일정만 잡으면 된다는 말에, 다시 한번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럼 날짜는 언제로 하는 거야?”
“우선 너 영어 회화 과외 좀 받고, 그쪽에서도 당장 이번 달 안으로는 안 된다고 했으니까… 내가 회사랑 날짜 조율해보고 말해줄게.”
“알겠어. 나 그럼 얼른 회화 공부 좀 더 해야겠다.”
나는 서둘러 시선을 책으로 옮겼고.
그때.
김 실장이 손뼉을 세게 부딪치며 소리쳤다.
“맞다. 그리고 희성아, 또 소식 있어!”
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무슨 소식?”
“저번에 신고했던 악플러 있잖아. 그 새끼, 신상 확보됐대.”
그의 말에 나는 책상을 손으로 내려치며 말했다.
“진짜? 대체 어떤 놈이래?”
김 실장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어깨를 들었다 내렸다.
“그건 아직 우리한테 알려줄 수는 없다고 하고. 경찰이 출석시켜서 조사하고 난 뒤에 알려준다더라.”
“알겠어. 대체 어떤 놈이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는지, 얼굴 좀 봐야겠어.”
“어, 그런 놈들은 실제로 만나면 찍소리 한마디도 못 할 거야.”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답했다.
“하아… 그러니까. 잡혔다고 하면 바로 말해줘.”
“응, 그런 자식들한테 선처는 없지.”
그 악플러가 내게 남겼던 악플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우선 공부하고 있어. 나 본부장님 좀 뵙고 올게.”
“어, 다녀와.”
김 실장이 회의실을 나가자마자 나는 곧장 공부에 집중했다.
그렇게 몇십 분이 지났을까?
공부에 열중하던 중, 문을 노크하는 누군가.
똑똑.
그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희성아.
“어, 서빈 선배님!”
최서빈이 밝게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고.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저 공부 좀 하고 있습니다, 하하. 선배님은요?”
그는 바깥을 가리키며 답했다.
“나 회사에 볼일이 좀 있어서. 회사에서 이렇게 예고 없이 만나니까 반갑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선배님은 이제 들어가십니까?”
“아니, 나는 막 도착했어.”
최서빈이 회의실 시계를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곧 들어가겠네?”
“네, 조금만 더 하다가 들어갈 것 같습니다.”
“그래? 끝나면 뭐 해?”
“저… 그냥 집 가야죠.”
최서빈은 술을 마시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내게 물었다.
“그럼 끝나고 한잔할까?”
그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알겠어. 그럼 나 일 끝나면 전화할게.”
“넵, 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연락주시면 바로 나갈게요.”
“그래, 이따가 보자.”
***
챙-.
“크으, 오랜만에 희성이랑 술 마시네.”
“그러게요.”
나는 최서빈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선배님, 저번에 말씀하셨던 일본 류노스케 감독님과 작업하고 계십니까?”
“이제 곧 들어갈 것 같아.”
“이야, 일본어는요?”
내 말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어휴, 내가 일본어 공부하느라 죽는 줄 알았잖아.”
“맞습니다. 언어 공부라는 게 쉬운 게 아니니까요.”
“응, 그래도 이제는 술술 나오는 편이야. 하하.”
“오오, 대단하신데요?”
최서빈은 술잔을 들었고.
다시 한번 술잔을 부딪친 우리.
최서빈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희성이 너는. 아까 무슨 공부하고 있던 거야?”
“저 영어 회화 공부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할리우드에서 연락이 왔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레 펼치기 쑥스러웠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답했다.
“이번에 할리우드에서 연락이 왔는데, 회화가 부족한 것 같아서 공부 시작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최서빈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뭐, 할리우드?”
놀란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되묻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네, 얼마 전에 연락이 왔는데, 아직 할리우드 가는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최서빈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지만.
입을 모으고 탄성을 보내며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한국의 톱 급 배우답게, 최서빈도 할리우드에 진출을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축하해. 할리우드라니, 진짜 대단한데?”
내게 축하를 하는 최서빈의 말투에서는 묘한 질투의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알아차렸다고 해서 최서빈에게 반감이 들지는 않았다.
물론 온 마음을 다해 축하해주면 더 좋았겠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최서빈의 말이 끝나고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근데 아직 할리우드에 다녀온 건 아니니까, 다녀오면 그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할리우드에 관한 이야기를 끝내려 마무리를 지었고.
최서빈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내게 물었다.
“근데 출연이 확정인 거야?”
“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고.
최서빈은 이내 진지한 얼굴로 조언을 던졌다.
“섭외가 아니라, 혹시 미팅 요청인 건가 싶어서.”
“음… 제가 할리우드에서 연락이 온 게 처음이라,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연락이 왔고, 곧 할리우드에 제작진을 만나러 간다는 것 외에는요.”
그는 내 말에 턱을 어루만지며 쓰읍, 소리를 내뱉었다.
“섭외면 당연히 좋은 거기는 한데. 혹시 캐스팅이 아니라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경우가 있거든.”
“오디션이면 떨어질 수도 있는 거잖습니까?”
최서빈은 심각한 얼굴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지. 뭐, 당연히 오디션 보고 붙을 수도 있지만 떨어질 수도 있는 거니까. 한번 다시 알아봐.”
그의 말에 나는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져갔다.
설마 내게 연락이 온 게, 오디션인 건가?
…느낌이 싸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