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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87)화 (187/303)

187화 #33 – 미담 제조기 (5)

“로라, 갑자기 무슨 청소를 하는 거야?”

로라는 책상 위 널브러진 자료를 치우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쁜 업무 중에 책상을 치우는 모습이 너무 뜬금없었으니까.

내 말에 그녀는 오늘 처음 보는 가장 밝은 얼굴로 내게 답했다.

“곧 우리 아들이 오거든.”

“왜?”

그러자 로라는 자신의 옷을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 어제 집도 못 들어갔잖아. 그래서 남편이 아기랑 잠시 회사에 들른다고 하더라고.”

“근데 책상은 왜 치우는 거야, 여기로 올라온대?”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연신 미소를 보였다.

“응, 아들이 항상 엄마 회사를 궁금해했거든. 잠깐 옷만 주러 오는 거라, 올라오라고 했어.”

“하긴, 로라가 내려갔다 오기에도 시간이 없겠네.”

“맞아. 게다가 우리 아들이 요즘 엄마 일하는 거에 관심이 많아.”

나는 아이 생각에 웃으며 답했다.

“로라 아들이 8살이라고 했나?”

“어, 시간 진짜 빠르지?”

“그러게. 로라가 아들 어릴 때 사진은 보여줬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때.

그녀의 책상 위 전화가 울렸고.

로라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전화를 받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그렇게 삼십여 분이 흐른 뒤.

“엄마!”

입구에서 해맑게 들어오는 어린아이.

로라의 아들임이 틀림없었다.

이런 무역 회사에 어린아이가 들어올 리는 없었으니까.

또다시 울리는 로라의 전화.

나는 서둘러 로라에게 말했다.

“내가 전화 받을 테니까, 얼른 아들한테 가봐.”

내 말에 로라는 손을 모으며 답했다.

“오우, 고마워. 알렉스.”

그러고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아들을 향해 검지를 들었다.

“쉿!”

로라의 아들은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귀여운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로라의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아, 네. 잠시 담당자가 자리를 비워서….”

짧은 통화 후.

수화기를 내려놓자, 로라의 자리에는 조금 전 보았던 귀여운 아이가 앉아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나는 한껏 밝은 얼굴로 손 인사를 보냈다.

“안녕?”

아이는 내 인사에 주변 눈치를 살피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엄마는?”

아이는 손가락으로 화장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는 옷 갈아입으러 갔어요. 엄마 갈아입은 옷 갖고 아빠한테 가야 해요.”

아이의 작은 목소리에 나는 몸을 숙여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작게 이야기하는 거야?”

내 말에 아이는 입을 손으로 막으며 속삭였다.

“엄마가 회사에서는 큰 소리 내는 거 아니라고 그랬어요. 얌전히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요.”

“그래, 착하네.”

아이는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몸을 푹 기댔고.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타자를 치던 그 순간.

쾅-!

콰콰콰쾅!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고.

“꺄아!”

“아악!”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몸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리에서 멀리 날아가 벽에 부딪쳤고.

“아악….”

눈을 떴는데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야.”

뿌연 잿빛 연기가 내 눈앞을 뒤덮고 있었고.

이곳은 혼비백산, 그 자체였다.

“빨리 대피해!”

“아악, 살려줘!”

앞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고.

저 멀리에서는 불꽃도 보이는 듯했다.

콰콰쾅-.

계속해서 들리는 굉음.

어딘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건물이 무너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소리와 광경.

그리고 건물의 흔들림까지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출구가 어딘지도 모르는 채 그저 앞만 바라보며 각자 달리기 바빴고.

다다다다다.

우르르 달리는 와중에 앞이 보이지 않으니, 곳곳에서는 사람들끼리 부딪쳐 도미노처럼 넘어지고 있었다.

쾅.

“아악!”

또다시 들려오는 커다란 소리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빠르게 달려갔고.

나 역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넘어져 있던 곳에서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분명 세게 벽에 부딪쳤지만.

그 아픔을 잠시라도 느낄 순간조차 없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건물 안에서 이 정체 모를 잿빛의 연기와 함께 눈을 감게 될 테니까.

두려움과 공포심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그런 감정에 떨릴 틈조차 없었다.

나는 옷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비틀거리는 다리로 겨우 지탱하며 앞을 향해 걸어갔다.

“이쪽이야!”

사람들은 출구를 찾은 듯 소리쳤고.

“이쪽에….”

“꺄아아!.”

“나 죽기 싫어.”

“살려줘!”

출구를 알리는 고함은 이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의 비명에 묻히고 말았다.

그럼에도 나는 소리가 들렸던 쪽으로 발길을 옮겼고.

주변에는 목을 놓아 우는 사람.

절망에 빠진 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얼른 도망쳐요!”

그때.

강한 빛이 새어 들어왔고.

그곳은 출구가 틀림없어 보였다.

그 빛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정신을 놓은 채 달리기 시작했고.

우르르 한곳을 향해 빠르게 달리자, 바닥은 더욱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나 또한 그 빛을 따라 내달리던 그때.

잠깐….

문득 떠오른 로라의 아들.

출입구 끝에 거의 다 도착했지만.

빠르게 뒤돌아 다시 안을 향해 뛰어갔다.

이곳의 유일한 아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단 한 명.

로라의 아들뿐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그대로 숨을 참고 기억을 되짚어 내 자리를 찾아 달려갔고.

그곳에는 아이가 로라의 자리에 그대로 가만히 앉아 울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1초도 지체할 틈 없이 나는 아이를 번쩍 품에 안아 올렸다.

아이는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몸을 파르르 떨었고.

나는 아이를 진정시키듯 꽉 안은 채 빛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아이를 달랠 시간이 전혀 없었다.

당장 이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빠져나가야 하니까.

나는 앞만 바라보며 젖 먹던 힘을 다해 다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환하게 보이는 바깥 풍경.

건물 밖 또한 온전하지는 못했다.

이곳까지 잿빛으로 덮여 있었고, 나는 한쪽으로 달려가 품에 안은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가쁜 숨을 내쉬며 연신 기침을 토해냈다.

“콜록, 콜록.”

아이는 기침을 하며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고.

내 몸 하나 가누기 힘들었지만, 우선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괜찮아.”

하지만 아이는 엉엉 울며 연신 로라를 찾았고.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로라도 곧 여기로 올 거야. 너는 이름이 뭐니?”

“…윌리엄.”

“이름이 멋있네.”

내 말에 윌리엄은 팔로 눈물을 훔치며 답했다.

“수호자라는 뜻이에요. 엄마가 지어준 이름.”

“내 이름은 알렉스. 내 이름도 수호자라는 뜻인데.”

윌리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알렉스… 수호자….”

그때.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내 뒤에 있던 건물.

그곳에 다름 아닌 비행기가 충돌했고.

나는 아이를 감싸 안은 채 몸을 웅크렸다.

“안 돼!”

***

잠에서 깬 뒤.

내 잠옷과 이불은 모두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런 꿈을 꾸고도 멀쩡할 수가 없었지.

기분 나쁜 악몽이었다.

너무나도 생생한 모든 순간.

비행기가 건물에 충돌하는 그 찰나까지, 전부 머릿속에 떠올랐고.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

그 괴로움에 사로잡혀 한참을 침대에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그동안 읽었던 대본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분명 최근에 본 대본에 이 내용은 없었는데. 아니, 비슷한 장면조차 없었잖아….”

서둘러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김 실장에게로 전화를 걸었고.

-희성아!

김 실장은 마치 내 전화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신호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에 놀랐지만, 나는 황급히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 혹시 나한테 새로 대본 들어온 거 있….”

김 실장이 내 말을 잘라내며 소리쳤다.

-야, 희성아!

“어?”

-너 지금 집이지?

나보다 다급한 듯한 그의 말투.

“응, 집이지.”

-나 지금 너의 집에 거의 다 왔거든?

“뭐라고?”

-급한 일이라, 바로 집 가고 있었어.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무슨 일인데?”

내 물음에 김 실장이 가쁜 숨을 내쉬며 답했다.

-좋은 소식인데, 만나서 이야기해 줄게.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는 거야?”

내 말에도 김 실장은 흥분을 누르는 어투로 말했다.

-5분 안에 도착하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김 실장은 그렇게 통화를 종료했고.

나는 멍하니 꺼진 전화기를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

딩동-.

김 실장이 말한 대로 5분이 지나자 초인종이 울렸고.

그를 기다리며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초인종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쾅쾅쾅쾅!

“희성아!”

그 잠시를 참지 못한 김 실장은 현관을 주먹으로 쿵쿵거렸고.

굳게 닫힌 문을 향해 그는 계속해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희성아, 얼른 문 좀 열어줘.”

“아휴, 잠깐만 기다려.”

그의 성화에 서둘러 발길을 옮겨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김 실장은 헥헥거리며 숨을 몰아 내뱉었고.

“형, 대체 무슨 일인데 이러는 거야?”

김 실장을 본 이후로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큰 배역을 맡았을 때에도.

신인상, 인기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을 때에도.

이렇게까지 흥분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하아, 하아.”

그는 엘리베이터도 못 참고 뛰어왔는지 양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잡은 채,

고개를 숙여 숨을 크게 내쉬었다.

“형, 설마 계단으로 온 거야?”

“하아… 어, 중간에 내리는 사람이 있어서… 따라 내려서 그냥 달려왔어.”

그는 말 중간중간에 숨을 내쉬며 겨우 말을 이어갔다.

김 실장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러는 거야. 뭔데, 대체?”

내 말에 김 실장은 숨을 삼켜내며 외쳤다.

“너한테 영화 제안이 들어왔어.”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답했다.

“뭐, 제안이야 늘 들어오는 거잖아.”

김 실장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달라.”

단호하게 말하는 김 실장의 대답.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잔뜩 들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물었다.

“뭐가 달라, 뭔지 말 좀 해주면 안 돼?”

김 실장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읊조렸다.

“할리우드에서 연락이 왔어.”

그의 말에 나는 찌푸렸던 미간을 풀어냈다.

“…뭐?”

당황한 내 표정과 말투.

김 실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집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희성이 너한테 할리우드에서 영화 제안이 온 거야!”

나는 그의 말에 입을 떡 벌린 채 눈을 연신 깜빡였고.

김 실장은 양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흔들며 외쳤다.

“할리우드에 진출할 기회가 생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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