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33 – 미담 제조기 (4)
챙-!
“송유나 배우를 위하여, 건배.”
“위하여!”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잔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축하드려요.”
“유나 씨, 진짜 축하해.”
“나는 유나 씨가 대상 받을 줄 알았다니까? 하하.”
이 술집에서의 주인공이자 오늘 연기 대상의 주인공인 송유나.
그녀는 평소의 보기 힘든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짧고 차가운 인사는 여전했지만 말이다.
드라마 ‘닥터’의 시청률은 어마어마한 영향을 일으켰다.
27%라는 그 높은 숫자에, 주연을 맡았던 나는 최우수상을.
그리고 함께 주연을 맡았던 송유나는 연기 대상을 받았으니까.
송유나는 나보다 훨씬 높은 톱 급의 배우였기에, 그녀가 대상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작년에도 송유나는 대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의 배우였고.
나는 인기상, 신인상을 탄 배우였지.
송유나와 사적인 친분은 두텁지 않았지만, 그녀와 많은 작품을 함께했고.
더군다나 이번 상을 받게 해준 닥터에서 호흡을 맞췄기에.
그녀의 대상 수상에 나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유나 씨, 진짜 축하해요.”
내 앞에 앉은 송유나는 한쪽 입꼬리를 옅게 올리며 답했다.
“네, 뭐….”
다른 사람이라면 그녀의 성의 없는 대답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제 그녀의 성향을 알고 있기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빈 잔에 술을 따르자, 송유나가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희성 씨도 최우수상… 축하해요.”
축하한다는 송유나의 말에 놀란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내 얼굴을 흘긋 바라본 그녀는 서둘러 내 시선을 피하며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통째로 빌린 큰 식당에 절반의 사람들이 빠져나갔고.
테이블 위아래에는 빈 술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 앞에는 송유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
평소 송유나라면 회식이 시작하고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자리를 비웠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런 사람이 많이 모이는 회식 자리에 참석도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이 자리의 주인공이 그녀였기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지금 이 회식 자리에는 여러 배우가 자리를 지켰고.
그 무리는 몇 개의 부류로 나뉘었다.
이번 닥터를 함께 촬영했던 배우와 스태프들.
그리고 평소 송유나와 같이 촬영했거나, 친분이 있는 배우들.
마지막으로 송유나와 촬영을 하거나 친분도 없는 배우, 바로 김하나였다.
다만 그녀는 최근 송유나와 함께 예능 프로그램에 나갔기에, 그 당시에 친분이 생겼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 같은 회사 식구니까 자리에 남아 송유나를 축하하는 듯 보였다.
그때.
김하나가 내 옆으로 다가왔고.
“저 여기 앉아도 될까요?”
마침 비어 있던 자리였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요. 하나 씨, 잘 지냈어요?”
내 말에 김하나는 밝게 웃으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네, 희성 씨 제가 이번에 친구들한테 선물 받은 좋은 와인이 있는데. 다음에 또 한 번 모여요. 제가 이번에 뇨끼도 배워놨는데, 진짜 맛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감자로 만드는 뇨끼요? 그거 집에서 만들기 손 엄청나게 가잖아요.”
김하나는 내 말에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렇긴 한데….”
김하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에 앉았던 송유나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을 잘라냈다.
“어머, 하나 씨도 있었네요?”
마치 반기는 듯한 말이었지만.
송유나의 목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딘가 가시가 박혀 있는 듯한 말투.
그녀의 말에 김하나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 송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나 씨, 대상 정말 축하드려요.”
“아, 네.”
김하나는 눈웃음을 보낸 뒤, 다시 나를 바라보았고.
송유나는 마른기침으로 시선을 끌어낸 뒤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근데 바쁘면 안 오셔도 됐는데, 여기까지 와주셨네요.”
환하게 웃는 얼굴과 다른 묘한 말투.
하지만 곧바로 김하나 역시 비슷한 투로 입을 열었다.
“아휴, 당연히 와야죠. 대상까지 받으셨는데, 제가 축하해 드려야죠.”
김하나는 송유나를 향해 말하고는 나를 흘긋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희성 씨가 최우수상 받은 것도 축하드리고. 같은 회사에 축하드릴 분이 이렇게 많은데, 제가 당연히 참석해야죠. 안 그래요, 희성 씨?”
질문은 내게로 돌아왔고.
김하나와 송유나는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따가운 그녀들의 시선에 나는 말을 얼버무린 뒤, 황급히 술을 들이켰다.
***
곧 한 해가 끝나가는 연말.
눈을 뜨자마자 여유로움이 아닌, 불안감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며칠 전, 받은 최우수상.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나니, 다음 작품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최서빈의 말대로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작품을 골라도 된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한 해가 끝나가는 것이 눈에 보이자, 대본을 빨리 골라야 한다는 스스로의 압박감이 들고 있었다.
아침의 여유를 만끽할 새도 없이 서둘러 회사로 향했다.
그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대본을 보고 작품을 고르고 있었지만.
상을 탄 후, 그리고 연말이라는 핑계로 이 일을 미루거나 거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회사에 도착하자, 김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나를 반겼다.
반갑다기보다는 놀란 표정이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말이다.
“희성아, 회사에는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 당연히 대본 보러 왔지.”
“아니, 그래도 연말인데 좀 쉬다가 나와도 되는데.”
김 실장은 나를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고.
“아니야. 연말이라고 쉬고, 무슨 날이라고 쉬면 언제 일해.”
내 말에 김 실장이 곧바로 내 마음을 읽은 듯 보였다.
곧바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늘어뜨리고는 입을 열었다.
“다음 작품… 급하게 고를 필요 없잖아. 조금 더 휴식을 가지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형, 나한테 대본 들어온 건 없어?”
내 말에 김 실장은 잇지 못한 말을 삼켜내며 답했다.
“…있지. 회의실로 가자, 보여줄게.”
“응.”
회의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기를 십여 분이 흐르자,
곧 대본을 양손에 한가득 쌓아올린 채 다가오는 김 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손이 부족했던 그는 몸으로 문을 열며 내게 말했다.
“시상식한다고 며칠 쌓인 건데, 영화랑 드라마 들어온 대본이거든?”
“와아, 엄청나게 많네?”
“어, 우선 분류 안 된 거고, 전부 가져온 거야.”
나는 양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좋아. 한번 훑어볼게.”
김 실장은 손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천천히 보고 있어. 추우니까, 내가 따뜻한 커피 좀 가져올게.”
“고마워.”
그는 곧장 탕비실로 향했고.
한참 이어질 것 같은 대본들을 바라보며, 나는 손목과 목을 스트레칭하기 시작했다.
“자, 시작해볼까?”
의욕이 넘치는 지금.
불안한 마음으로 왔지만, 막상 쌓여 있는 대본을 바라보니 조급한 마음이 한결 누그러드는 것 같았다.
김 실장의 말대로 대본은 영화, 드라마 가릴 것 없이.
장르 역시 여러 종류가 뒤죽박죽 섞여 있었고.
그 탓에 장르를 가리지 않은 채, 우선 눈에 보이는 순서대로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대본을 몇 장 넘기던 그때.
김 실장이 내게로 다가와 커피를 건넸다.
“추운데 이거 마시면서 봐.”
“잘 마실게.”
김 실장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내게 말했다.
“나 오전에 업무가 있어서, 같이 대본을 못 볼 것 같은데….”
그는 미안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고.
나는 미소 지으며 손을 가로저었다.
“괜찮아. 오늘 쉬라고 했는데, 내가 온 거잖아. 얼른 가서 일 봐.”
“대신에 오후에는 같이 대본 보자. 금방 일 보고 올게.”
“응.”
김 실장은 끝까지 내게 시선을 고정하다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나는 고요한 회의실에 홀로 남아 대본으로 시선을 옮겼다.
“집중하고… 차분하게 읽어보자.”
대본을 바라보며 앉아 있기를 벌써 세 시간째.
글씨를 읽느라 뻑뻑해진 눈에 인공 눈물을 넣어가며, 건조한 눈에 휴식을 취했고.
그대로 눈을 감고 고개를 최대한 뒤로 젖혔다.
“하아… 진짜 대본 고르는 거 왜 이렇게 힘들지.”
수없이 많은 대본이 테이블 위에 쌓여 있지만.
아직도 내 마음을 사로잡는 대본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쓰읍, 소리를 내며 앞에 놓인 대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기준이 너무 높아진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지만.
“아니지. 기준이 높아져야 더 좋은 대본을 고를 수 있지….”
이내 스스로를 설득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점점 조급해진다고 해서 아무 대본이나 채택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여기서 더 쉬게 되면, 너무 오래 휴식을 취하는 것만 같아 불안한 마음이 엄습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는 대본을 찾아야 할 텐데….”
최근 드라마로 인기 덤에 오른 것을 느꼈지만.
휴식기가 길어진다면, 당연히 시청자들에게.
그리고 업계에서 점점 잊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잊히지 않기 위해 마음에도 들지 않는 대본을 고를 수도 없을 터.
정답은 단 하나.
내 마음에 드는 대본, 그리고 대박이 날 작품을 빠르게 고르는 것.
너무나도 분명한 정답이었지만.
그 답을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배우들이 쉬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는 건가?”
***
새하얀 책상들이 끝없이 펼쳐진 이곳.
“네, 전화 받았습니다.”
띠리리.
띠리리리.
여기저기서 전화벨이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자신의 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요. 서류는 오늘까지 보내주세요.”
“네, 금방 갑니다.”
각자 보는 업무 소리에 나는 넋을 놓고 주변을 멍하니 살펴보았다.
‘대체 뭐지?’
그때.
띠리리리.
띠리리리리-.
점점 커지는 전화벨.
나는 그 소리에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졌고.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전화 벨소리.
띠리리리-!
“알렉스.”
한 남자가 내게로 다가와 어깨를 세차게 두드렸다.
“알렉스, 멍하니 뭐 하고 있는 거야!”
그의 부름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뒤를 돌았다.
“응?”
“전화 받아야지. 알렉스, 무슨 일 있는 거야?”
그의 말에도 나는 어쩔 줄을 모른 채 몸이 굳었고.
나를 알렉스라고 부르는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책상 위에 놓인 전화를 받았다.
“대신 받았습니다. 네, 저 헨리예요. 예, 잠깐 알렉스가 자리를 비워서…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헨리는 서둘러 펜을 들고 책상 위에 메모를 적기 시작했고.
이내 전화를 끊은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 바쁘니까, 이따가 다시 이야기하자.”
그러고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알렉스….
헨리….
여기저기서 바쁘게 떠드는 목소리.
모든 말들은 한국어가 아닌, 영어였다.
물론 나 역시도 그들에게 영어로 답을 하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이름도….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그 순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은… 내 꿈속이다.
꿈인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곧바로 드는 생각.
난 아직 아무런 대본도 보지 않았는데?
근데,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거지?
고민하고 있을 찰나.
내 책상 위의 전화가 또다시 울리고 있었다.
띠리리리.
자연스레 손이 움직여 수화기를 들고 귀에 붙였다.
“네, 알렉스입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한국말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여기 한국에….
그 목소리에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예, 제가 한국 담당 민수호입니다.”
나는 전화를 받으며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들었고.
내 책상 위에는 작은 명패가 붙어 있었다.
‘무역(한국) 알렉스’.
무역 회사의 직원인 알렉스.
그러니까 나는 오늘도 숨 돌릴 틈 없이 업무를 이어갔다.
“하아….”
전화를 끊은 후, 잠시 짧게 찾아온 휴식 시간.
내 옆에 앉은 금발의 로라는 손목을 풀며 내게 말을 걸었다.
“알렉스,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 아침부터 업무가 난리야.”
잔뜩 지친 얼굴로 말을 거는 그녀에게 나는 코를 찡긋거리며 답했다.
“그러게. 근데 로라는 결국 어제 집도 못 들어간 거야?”
나는 그녀의 옷을 훑으며 말했고.
로라는 힘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집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래도 어쩌겠어. 이 시기만 지나면 좀 한가할 거야.”
“맞아.”
로라는 진하게 내려온 다크 서클을 손으로 문지르며 내게 물었다.
“너무 바쁘니까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네. 알렉스, 오늘이 며칠이더라?”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고.
“로라, 너도 참. 아무리 그래도 날짜도 모르는 게 말이 돼? 하하.”
고개를 돌려 달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2001년 9월 11일이잖아.”
내 말에 로라는 입꼬리를 올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잠깐만, 이 날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