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31 – 기회는 운명처럼 (9)
아무런 걱정 없이 집에서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는 건, 몇 개월 만이었다.
전라북도 남원에서 촬영을 하면서, 가끔 이틀 연속으로 쉬는 날이 생겨도.
서울에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아깝고 힘들어 자주 올라오지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간혹 서울에 스케줄이라도 생기면, 그때 한 번씩 올라오고는 했지.
그때도 다시 내려가 촬영할 드라마 대본 연습을 해야 했고.
거의 눈을 붙이러 올라오는 공간으로 집을 활용했기에.
이렇게 아무런 고민과 걱정 없이 오롯이 휴식을 취하는 건.
드라마 촬영이 시작된 후 처음이었다.
“하암… 너무 좋다.”
해가 중천에 뜬 지금 눈을 떴지만.
여전히 침대 위를 뒹굴면서 휴식을 만끽했다.
그때.
지이잉.
[발신인: 김지훈 실장]
머리맡에 있던 휴대 전화에 진동이 울렸고.
손을 더듬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희성아, 이제 일어났어?
“응, 형은?”
김 실장 역시 이제 막 일어났는지, 연달아 하품을 내뱉으며 말했다.
-나도. 오늘 뭐 할 거 있어?
“아니. 그냥 쉬어야지. 왜?”
-밥은 먹었고?
“당연히… 안 먹었지, 하하. 형은?
-잘됐다. 그럼 우리 남원에서 계속 이야기했던 식당 있잖아. 거기나 갈까?
김 실장과 함께 남원에서 노래를 부르던 식당.
우리가 평소 서울에서 자주 가던 게장 집이었다.
“헐, 좋아. 언제 갈까?”
-하하, 역시 좋아할 줄 알았어. 바로 먹으러 갈래?
“오케이. 당장 준비할게.”
김 실장과의 전화를 끊자마자 뭐에 이끌린 듯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한 시간 뒤.
김 실장과 도착한 게장 집.
점심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난 후라 그런지, 평소 북적이는 식당이었지만.
사람이 꽤 빠진 편이었다.
“이야, 나 여기 촬영 때 너무 생각났잖아.”
내 말에 김 실장이 군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 힘들 때마다 여기 이야기했잖아. 하하.”
“응, 드디어 먹네.”
우리는 그렇게 주방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세팅된 음식.
맑은 주황빛을 띠는 알이 꽉 찬 꽃게.
그 간장게장 옆에는 먹음직스러운 빨간 양념이 가득 묻은 양념게장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와아! 이거지.”
우리는 입맛을 다시며 수저를 들었고.
이후 우리의 테이블에서는 한마디의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그저 음식을 먹으며 내뱉은 감탄사만이 있을 뿐.
“이야.”
“와… 살 좀 봐.”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음식을 흡입하던 우리.
몇십 분 뒤.
앞에는 텅 비어버린 접시들이 가득했고.
김 실장은 가득 찬 배를 부여잡은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희성아.”
“응?”
김 실장의 시선은 나를 지나쳐 옆에 쌓인 그릇으로 옮겨갔다.
쌓여 있는 빈 접시.
그리고 빈 밥그릇 두 개가 쌓아올려져 있었고.
내 앞에는 세 번째 밥그릇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배 안 불러?”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한 수저를 더 뜨며 문득 깨달았다.
이건 밥이 맛있는 것을 떠나, 내 식사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이번 드라마를 찍으며 살을 찌우려 애썼는데.
그 식습관이 아직 남아 있던 것이다.
그 당시 늘어난 위와 식사량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밥 한 공기를 추가하려고 들었던 손은 자연스레 스르르 내려왔고.
“형.”
“응?”
“나, 살 빼야겠다.”
내 말에 김 실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다음 작품도 하려면, 좀 빼기는 해야겠다.”
“하아… 찌는 건 그렇게 안 어려웠던 것 같은데. 이제 빼느라 고생 좀 하겠다.”
김 실장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너는 평소에 운동하던 습관이 있으니까, 금방 뺄 거야. 이제 식단도 좀 조절하고.”
나는 결국 수저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운동, 바로 시작해야지.”
***
다음 날.
이제 휴식이라는 이유로 게으름을 피웠던 습관을 벗어던지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회사로 향했다.
아직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작품을 만날지, 준비할지 정해지지 않았기에.
몸부터 준비하고 있으려는 것이지.
운동은 집 주변의 헬스장을 찾는 것보다, 회사 안에 있는 헬스장으로 오는 것이 편했다.
굳이 따로 돈을 내며 다니는 헬스장이 아닌.
회사 내에 있는 헬스장은 소속 배우에게 무료로 이용이 가능했고.
이미 내 몸을 잘 알고 있는 트레이너도 있으니까.
“안녕하세요.”
트레이너는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한 뒤, 곧장 내 몸을 빠르게 위아래로 훑었다.
“희성 씨, 오랜만이네요.”
“네, 이제 촬영 끝나서, 운동하러 왔어요.”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에 불을 켰다.
“그럼 이제 살 빼도 된다는 거죠?”
트레이너의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동안 찌웠던 살을 다 빼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그는 내 걱정스러운 말에도 전혀 미동도 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당연하죠. 바로 시작할까요?”
“네.”
두 시간 동안 트레이너와 붙어 코칭을 받으며 운동한 뒤.
나는 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하아… 오랜만에 이렇게 운동하니까 죽을….”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트레이너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오랜만에 하니까 좋죠?”
“아… 네.”
트레이너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사람은 쉽게 안 죽어요. 우리 오늘은 몸 풀었으니까, 내일은 더 세게 달려봅시다.”
“오늘보다 더요?”
그는 내 팔과 허벅지를 손으로 누르며 답했다.
“당연하죠. 얼른 다음 작품 준비해야죠.”
“예, 그래야죠.”
트레이너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러닝머신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유산소 하시면서 몸 좀 풀고 들어가세요.”
이미 지친 몸이었지만.
불어난 체중을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희성 씨가 고생하셨죠.”
트레이너와 눈인사를 마친 뒤, 곧장 러닝머신 위에 발을 올렸다.
몇십 분 뒤.
“헥헥….”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발을 굴렸고.
그때.
비어 있던 러닝머신 위에 올라오는 사람.
“어? 희성아.”
최서빈이었다.
“서빈 선배님!”
반가운 나머지 우리는 러닝머신의 속도를 줄인 채 인사를 나눴다.
“뭐야, 촬영 끝났어?”
“네, 그저께 올라왔습니다. 안 그래도 올라오면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내 말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근데 우리 희성이… 좀 쪘네?”
최서빈은 나를 흘긋 바라보며 말했고.
나는 내 팔뚝을 손으로 누르며 답했다.
“네, 벌크업 좀 했습니다. 하하.”
“정말?”
“농담이고. 이번 촬영 때문에 살을 찌워야 해서 엄청나게 불렸다가, 이제 다시 빼려고 오늘부터 운동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평지에서 걷듯 천천히 러닝머신을 걸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럼 촬영은 아예 끝난 거야?”
“네, 사전 제작이라 지금 편집 중일 겁니다.”
최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방영이 언제야?”
“다음다음 달입니다.”
“오오, 나오면 꼭 볼게.”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선배님은 요즘 뭐 하고 계세요?”
최서빈이 여유로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나는 요즘 쉬고 있지.”
“아, 그냥 운동하러 오신 겁니까?”
“응, 그냥 놀고먹기만 하니까, 금방 살이 붙더라고.”
“맞아요. 한 번 찌면 빼기도 힘들잖습니까.”
최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에는 뭐 해?”
“저 오늘 스케줄 없습니다.”
그는 내 말에 술을 넘기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물었다.
“그럼 오늘 한잔할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고개를 돌려 트레이너를 찾았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트레이너를 확인한 뒤, 최서빈을 향해 눈웃음을 보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좋습니다.”
***
챙-.
최서빈과 나는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술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우리 둘이 얼마 만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벌써 3개월 만에 마시는 것 같은데요?”
빈속에 넘어가는 차디찬 소주.
“크으.”
알코올로 인해 찌르르, 하는 느낌이 온몸으로 번져왔고.
나는 술잔을 털어내며 최서빈의 빈 잔을 다시 가득 채웠다.
그는 술병을 건네받아 내 잔을 따르다 말고 내게 물었다.
“맞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너 다이어트 중 아니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근데 이렇게 마셔도 되는 거야?”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답했다.
“그럼요. 벌크업 중입니다. 하하.”
“야, 벌크업 아니고 다이어트잖아.”
이내 최서빈과 술잔을 부딪치며 답했다.
“에이, 하루 정도 마신다고 지금 이 살에서 더 찌지는 않을걸요?”
“하하, 그건 그렇다. 오랜만인데 오늘만 마시자!”
“네, 좋죠.”
우리는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며, 빠르게 술잔을 비워갔다.
술병이 하나둘 쌓여가던 그때.
“그 소식은 들었어?”
최서빈의 말에 내가 눈썹을 들썩이자, 그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HS 엔터 소식, 못 들었어?”
“네, 들은 건 없는데, 거기 무슨 일 있습니까?”
최서빈은 혀를 내두르며 내게 말했다.
“거기 지금 망하게 생겼잖아.”
그의 말에 나는 들고 있던 소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채.
순식간에 심각해진 얼굴로 최서빈을 바라보았다.
“왜요?”
내가 배우 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발을 담갔던 기획사.
물론 회사를 나오는 과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정확하지는 않은데, 최근에 콘텐츠 쪽으로 사업 확장하려다가 중국에 뒤통수를 크게 맞았나 봐.”
최서빈의 말에 나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그래서 자산 상황이 꽤 위태롭다고 하더라.”
“HS 엔터가 그래도 대형 기획사인데, 그렇게 흔들리기도 하네요.”
최서빈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그렇지. 투자 금액이 꽤 컸나 보더라고. 나도 금액까지는 정확하게 모르는데. 많이 위태롭다고만 들었어.”
HS 엔터에서 내가 크게 성장을 하기는 했지만.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
늘 ‘돈’을 추구했던 임 대표.
결국은 그와 돈이라는 매개체로 인해 좋지 않은 마지막을 맞이했으니까.
물론 한 회사가 망해간다는 사실이 내게 좋은 영향이나, 그렇다고 해서 나쁜 영향이 미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임 대표가 결국 돈 때문에 위태롭다는 사실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동시에 드는 생각.
HS 엔터의 임 대표가 아닌, 그곳의 소속 배우들이었다.
나 역시 소속 배우 중 한 명이었으니까.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최서빈을 향해 물었다.
“선배님, 근데 그렇게 회사가 위태로워지다가 망하게 되면, 소속 연예인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음… 끝까지 남아 있으면 하루아침에 소속사를 잃는 거지, 뭐.”
최서빈이 쓰읍, 소리를 내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신인이 아니면, 이런 소식을 이미 전해 들었을 거고. 다들 각자 알아서 살길 찾지 않겠어?”
“하긴. 저희도 들을 정도면, HS 엔터 소속 연예인들은 이미 회사 사정을 잘 알고 있겠네요.”
“그렇지. 다들 지금 멘붕이 왔을 거야.”
우리는 다시금 술잔을 부딪쳤고.
나는 술잔을 털어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까… 송유나도 HS 엔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