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31 – 기회는 운명처럼 (8)
“하암….”
입을 손으로 가린 채 하품을 쩌억 하며 대기 중인 김 실장의 차에 올라탔다.
내 모습을 본 김 실장이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물었다.
“희성아, 피곤하지?”
그의 말에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며 답했다.
“아니야. 이제 촬영이 막바지에 다가가니까, 조금 몸이 고되기는 하네.”
“힘든 게 당연하지. 그래도 조금만 더 힘내자. 이제 진짜 끝이 보인다.”
우리는 서둘러 현장으로 출발했고.
촬영장은 며칠 전부터 북적거리던 분위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고요하고 휑한 느낌이 더해졌다.
촬영은 이제 슬슬 끝물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그래서 단역 배우들부터 서서히 촬영이 끝나, 남원이 아닌 서울로.
퇴근이 아닌, 촬영 끝에 접어들었으니까.
나는 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늘은 인원이 더 빠진 것 같다?”
내 말에 김 실장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러게. 이제 단역 배우들도 마지막 촬영 몇 컷 남은 인원 빼고는 다 서울로 복귀했다고 하더라.”
그의 말에 내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자, 김 실장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 너랑 친하던 단역 배우들도 다 촬영 끝났다던데, 맞지?”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어, 안 그래도 어제 민규가 와서 자기네 촬영 끝났다고 인사하더라고.”
“희성이 너 촬영은 아직 며칠 남았는데, 같이 놀 배우들은 다 끝나버렸네?”
그의 말에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응, 이제 남은 배우들이 아무도 없긴 하네. 뭐, 막바지니까 더 열심히 해서 빨리 촬영 끝내봐야지.”
김 실장이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남은 건 주연인 나와 송유나.
그리고 몇 조연 배우들만이 이곳 남원에 남아 적은 인원이었지만 더욱 으쌰으쌰! 힘을 합쳤다.
“자, 이제 베테랑 배우들만 남았으니까, NG 없이 빠르게 촬영 가봅시다.”
“네.”
“레디, 액션!”
하루 내내 NG나 별다른 이슈 없이 촬영이 이어졌다.
단역 배우들이 빠져, 촬영의 대부분은 내가 나오는 신이었다.
덕분에 쉬는 시간 없이 촬영이 계속 이어졌고.
내 실수로 촬영이 지체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더욱 촬영에 몰입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긴 하루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어? 이제 펜션 가는 버스가 한 대뿐이야?”
나는 주차장에 서 있는 커다란 버스를 가리키며 물었고.
김 실장은 고개를 높게 빼들어 버스를 바라보며 답했다.
“응, 이제 펜션으로 가는 인원이 없잖아. 스태프들이랑 장비만 하면, 저 버스 한 대로 충분할걸?”
“이야, 진짜 이제 썰렁하네.”
우리는 짐을 싣고 있는 버스를 뒤로한 채, 호텔로 향했고.
이곳 역시 조용한 기운은 지워낼 수가 없었다.
물론 호텔에는 애초에 단역 배우들이나 조연 배우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항상 퇴근 후에 내게 찾아오고는 했으니까.
특히나 이미 나와 친분을 쌓은 김민규나 박철민, 손성진을 통해 다른 단역 배우들도 나와 친분을 가지고 싶어 했고.
그런 모임이 싫지 않았던 터라, 항상 호텔 로비에는 단역 배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는 했다.
모여서 딱히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각자 사는 이야기와 내게 조언을 얻기도 했고.
또 그들의 고민 상담을 하다가도, 나 역시 그들에게 얻는 점도 많았다.
그래서 그런 시간이 내게는 꽤 흥미롭고 의미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텅 비어버린 로비를 바라보며, 그저 고개만을 끄덕일 뿐이었다.
한 손에는 대본을, 그리고 한 손에는 맥주 대신 음료수를 든 채 로비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조용하네.”
이내 호텔 룸에 도착했고.
지친 몸을 그대로 침대에 던졌다.
로비처럼 정적인 방 안.
하지만 침대에 10초를 채 누워 있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눈앞에 아른거리는 조연 배우들과 단역 배우들의 얼굴.
그리고 그들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던 모습들.
특히나 예전의 나를 보는 듯했던 단역 배우 김민규까지.
그들과 함께 다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었다.
무료함에서 나오는 생각도 아니었지.
그저 그들이 잘되면 좋겠다는 생각, 그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적어도 지금보다 더 잘되게 하려면,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충분히 있었다.
바로 함께하는 이번 작품이 흥행하는 것.
배우 하나가 특출하게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흥행한다면 자연스레 그 작품의 배우들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이다.
그들이 관객들의 입에서, 기자들의 기사에서.
그리고 수많은 소속사의 눈에 들게 하려면, 무조건 이 작품이 대박 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품이 잘되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연습뿐이었다.
물론 단역 배우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작품에 도움이 될 테지만.
주연인 내가 작품의 흥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테니까.
“잘하자… 다들 잘되게 하기 위해서는!”
***
“컷, 오케이!”
홍 감독의 사인이 울려 퍼지고.
동시에 촬영 현장에는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들 수고했어요.”
“진짜 고생 많으셨습니다.”
드라마 ‘닥터’의 마지막 촬영이 기분 좋게 오케이 사인을 받아내며.
그렇게 남원에서 몇 달간 이어진 촬영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손뼉을 부딪치며 서로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바빴고.
홍 감독과 나는 서로를 감싸 안은 채 진하게 인사를 나눴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독님.”
“아니야. 희성 씨 덕분에 즐겁게 촬영했지. 고생 많았다.”
그는 감싸 안은 내 어깨를 토닥였다.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마지막 촬영 현장 앞으로 모두 모였고.
“자, 사진 찍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네!”
찰칵-.
그렇게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각자 서울로 향하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남원에서 뒤풀이하시는 건 아니죠?”
조연 배우의 질문에 홍 감독이 웃으며 답했다.
“에이, 우리 이제 남원에 있는 웬만한 식당은 다 가보지 않았나? 하하.”
“그건 맞죠.”
“서울 가서 제작 발표회 끝나고 나면, 다 같이 한번 회식합시다.”
“좋습니다.”
‘닥터’는 사전 제작 드라마라 아직 방영 전이었고.
더군다나 아직 제작 발표회 날짜도 잡히기 전이었다.
우리는 그날을 기약하며, 각자의 차량으로 발길을 옮겼다.
“희성 씨, 저희랑도 사진 한 장 찍어요.”
스태프들이 몇몇 몰려와 사진을 요청했고.
나는 웃으며 그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우와, 저희랑도 찍어주시면 안 돼요?”
사진을 찍던 중, 다른 스태프들이 다가와 내게 말했다.
“당연히 되죠. 얼른 오세요.”
스태프들과 사진을 찍으며 포즈를 취하던 그때.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 있는 사람들 옆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는 사람.
송유나였다.
‘뭐지? 송유나가 나한테 사진을 같이 찍어달라고 부탁할 사람도 아니고….’
나는 그녀를 보며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포즈를 바꿔가며 카메라 앞에서 미소를 지었고.
잠시 뒤.
“감사합니다. 조심히 올라가시고, 다음에 제작 발표회 때 봬요.”
나는 그들을 향해 허리를 접었다.
송유나는 곁눈질로 나를 힐끔거리며 바라보았고.
하지만 별다른 말이 없었기에, 나는 그저 그녀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김 실장에게로 향했다.
김 실장은 차에서 내려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고.
나 역시 그를 바라보며 허공에 손을 가로저었다.
“형!”
“응, 준비 다 됐어. 얼른 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차로 향했고.
이미 많은 배우가 출발한 뒤라,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다.
텅 빈 주차장을 두리번거리며 김 실장에게로 걸어가던 그때,
“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누군가.
그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내 시선 끝에는 송유나가 눈동자를 굴리며 서 있었고.
아까부터 자꾸만 내 근처에서 맴도는 것만 같다는 기분에, 그녀에게 물었다.
“유나 씨,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네?”
“아까 사진 찍을 때부터 옆에서 기다리는 것 같던데, 뭐 하실 말씀이 있는 거 아니에요?”
내 말에 그녀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요. 없는데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왜….”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유나는 나를 흘긋거리며 홱 뒤를 돌았고.
빠르게 자신의 차를 향해 달리듯 걸어갔다.
그녀의 행동에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 실장 역시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뭐야?”
김 실장은 송유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게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유나 씨… 좀 이상한데?”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원래 이상했잖아.”
내 말에 그는 웃음이 아닌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고, 요즘 뭔가 평소랑은 다른 것 같더라고.”
“그래?”
“응, 뭐랄까… 좀 고장 난 느낌?”
그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 고장 났다고?”
“정말이야. 요즘 따라 좀 뚝딱거리는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니까.”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그동안의 송유나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도….”
김 실장은 내게 말을 하다가 황급히 입을 닫았고.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내가 묻자, 김 실장이 나를 손으로 툭 치며 말을 잘라냈다.
그러고는 턱으로 내 뒤를 가리키는 듯했다.
“왜, 뭔데?”
나는 김 실장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다시 돌아온 송유나는 양손 가득 커다란 쇼핑백 두 개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요.”
“네? 이게 뭔데요?”
“그냥 받아요.”
***
“희성아, 그래서 유나 씨가 준 게 뭐야?”
달리고 있는 차 안.
김 실장이 룸 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맞다. 그거 확인해 봐야지.”
송유나가 내게 건넸던 쇼핑백 두 개.
그녀의 앞에서 절대 안을 확인하지 못 하게 하자, 여전히 그 쇼핑백은 내 옆자리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몸을 돌려 쇼핑백 하나를 펼쳤다.
그 안에는 커다란 상자가 하나 담겨 있었고.
내용물을 보지 않아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약이다.”
“응?”
김 실장은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고.
나는 한약 특유의 상자를 보며, 위에 적힌 글씨를 읽었다.
“관절에 좋은 약이라고 적혀 있어. 한약이네.”
김 실장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
“저번에 자기 구해주고, 너 어깨 다쳤잖아. 그래서 고맙다고 주는 선물인가 보네.”
“그러게. 한약까지 주고 고맙네.”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썹을 들썩였다.
“근데 쇼핑백 한 개 더 있지 않았어?”
“맞아. 이건 뭐냐면….”
나는 그 옆에 있는 쇼핑백을 내 무릎 위에 올려, 조심스레 꺼내보았다.
“이게 뭐지?”
그 안에는 상자가 또 하나 들어 있었고.
상자를 열자, 커다란 안마기가 하나 들어 있었다.
마침 신호에 걸린 덕에 김 실장이 몸을 돌려 내 손에 들린 안마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어깨 안마기잖아.”
“정말?”
“어, 그거 엄청 비싼 건데.”
그의 말에 나는 기계를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유나 씨는 그날 일, 고맙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하네.”
나는 한약과 안마기를 번갈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