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75)화 (175/303)

175화 #31 – 기회는 운명처럼 (7)

“유나야, 고생했어.”

최 실장은 룸 미러를 통해 뒷자리에 앉은 송유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녀는 최 실장의 인사를 받을 기운조차 없어보였다.

이상하리만큼 촬영 내내 NG를 냈으니까.

송유나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고.

그녀가 걱정스러운 최 실장은 한숨을 삼키며 운전에 집중했다.

차는 금세 현장을 빠져나왔고, 도로에 올라타자 송유나는 감았던 눈을 스르르 떴다.

그러곤 달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나 요즘 왜 이러지?”

송유나의 목소리에 최 실장이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뭐라고?”

작게 읊조린 탓에 말을 듣지 못한 최 실장이었지만.

송유나는 짜증이 난 듯한 얼굴로 그에게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운전에 집중해.”

“아… 알겠어.”

송유나는 며칠 내내 NG를 달고 살았던 자신에게 올라온 화를 최 실장에게 푸는 듯 보였다.

몇 분 뒤.

이내 차는 호텔에 멈춰 섰고.

“유나야, 저녁은….”

최 실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유나는 차 문을 벌컥 열며 답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럼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

“응.”

송유나는 빠르게 자신의 대본과 짐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호텔에 올라온 송유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곧바로 의자에 앉아 멍하니 대본을 바라보았다.

“나 진짜 왜 이렇게 실수하는 거지?”

평소 대사 실수라고는 없던 그녀였기에.

연달아 이어진 자신의 NG에 화가 난 건 그녀 자신이었다.

송유나는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특히나 오늘 NG는 역대급이었다고….”

그녀는 오늘 낮에 자신이 NG를 냈던 장면, 그 부분의 대본을 펼쳤다.

그러고는 대본을 손으로 가린 채 대사를 읊어 내려갔다.

“저… 선생님 좋아해요. 엄청 오래됐어요. 병실에 갔던 것도, 일부러 박 간호사랑 움직였던 것도 전부 선생님 때문이라고요.”

한 번의 실수 없이 대사를 이어나갔고.

송유나는 허탈하다는 듯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뭐야, 이렇게 잘되는데 왜 현장에서는 그러는 거야. 없던 카메라 울렁증이 생긴 것도 아니고.”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장을 다시금 떠올렸다.

“분명…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감정 몰입을 했는데. 게다가 대사도 다 외웠는데….”

평소 로맨스 장르에 최적화된 그녀였기에.

오늘 냈던 NG는 스스로에게 더욱 용납이 되지 않았다.

의학 용어가 들어가는 장면은 단 하나도 없었고.

오로지 진희성과 사랑을 주고받는 달달한 감정 신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대사는 송유나에게 어렵기는커녕, 눈 감고도 술술 나올 수준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진희성이랑 연기하면, 평소보다 감정이 더 세차게 몰아치는 느낌이야.”

송유나는 진희성의 얼굴을 눈앞에 그려냈다.

“분명 진희성을 보면 몰입도가 더 깊어지는 것 같은데. 됐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내일은 실수하면 안 되니까 얼른 연습하자.”

그녀는 창가에 기댄 채 대본을 펼쳤고.

이미 내일 있을 대본도 통으로 외운 그녀였지만, 재차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대사를 읊조렸다.

“저는 더 이상 밀릴 곳이….”

상대 배역인 진희성을 떠올리며 대사를 내뱉던 송유나는 턱하고 말문이 막혀버렸다.

“뭐야, 왜 자꾸 진희성 얼굴이 이렇게 자세히 그려지는 건데.”

대사를 멈춰버린 그녀는 떠오른 진희성의 얼굴을 곱씹으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진희성, 옛날이랑 다르게 살찌니까 확 달라졌어. 날렵한 느낌이 남기는 했지만, 이제는 뭔가 포동포동해.”

송유나는 진희성의 눈, 코, 입, 그리고 팔다리까지 생각하며 연신 헤실거렸고.

“포동포동하니까, 좀 곰 인형 같기도 하고.”

순간 저 멀리 거울에 비친 자신의 미소를 보고 말았다.

“아, 뭐야!”

진희성을 생각하며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본 송유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미소를 털어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녀는 얼굴을 일부러 잔뜩 찌푸렸고.

웃음기를 지우고 정색한 얼굴로 거울이 보이지 않게 뒤를 돌았다.

“하아… 그래, 바람 좀 맞으면서 생각을 돌리자.”

창문을 활짝 열어 밖을 바라보자,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일자로 펼쳐진 도로와 푸르른 산과 나무.

그녀는 평화로운 풍경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진희성의 생각을 훌훌 털어냈다.

“너무 좋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진희성에 대한 생각.

송유나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래, 그날 조명 사고 이후에 내가 진희성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자꾸 진희성이랑 연기할 때마다 NG를 내는 거야.”

그러고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아니면, 내가 진희성을 보고 떨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송유나는 자신의 생각에 힘을 보태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

평화로운 풍경 안에 들어온 두 사람.

진희성과 단역 배우 정아리였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송유나는 진희성에게 시선이 꽂혀버렸다.

“저거 진희성이랑 정아리 아니야?”

단역 배우 정아리는 자신과 함께했던 신이 몇 개 있었기에.

단번에 그녀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저렇게 둘이 있는 조합은 너무 뜬금없는데.”

송유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들의 발길을 따라 시선을 계속해서 옮겨갔다.

그녀가 머무는 룸의 층이 1층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대화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진희성과 정아리의 발길이 호텔로 걸어오는 것을 보며, 송유나는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둘이 언제부터 친했지? 대체 뭐 하러 같이 다니는 거야?”

***

“음… 그래서 아리 씨 혼자 왔구나?”

나는 정아리와 호텔로 향하며 그녀에게 물었고.

정아리는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답했다.

“네, 아까 민규 씨랑 이야기가 잘못 전달됐나 봐요. 민규 씨는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단역 배우들은 촬영 후 나와 약속을 잡았었다.

이번에도 볼링을 치거나, 낚시하러 가자는 건 아니었다.

그저 연기 선배이자 인생 선배인 내게 묻고 싶은 게 많다는 것이었지.

그들의 부탁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안을 승낙했다.

물론 촬영이 끝나면,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촬영이 많은 나는 피곤함이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시기를 지냈고.

그 당시 친분이 있는 선배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배우라는 이 업계는 회사처럼 선임이 정해져 있는 곳도 아니었고.

촬영장이 바뀌면, 선배도 바뀌었으니까.

더군다나 단역 배우의 수는 주연, 조연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많은 숫자였고.

이들을 하나하나 신경 써주는 주연 배우는 특히나 없는 편이었지.

나 또한 그 당시에 궁금한 점이나 선배 배우들과 소통하고 싶은 것을 나누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이들과 소통을 해주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보태고 싶었다.

내가 바랐던 것이니까.

그리고 누구보다 이렇게 열정적이고 열심히 하는 배우들이 성공했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했으니까.

“괜찮아요. 같이 로비까지 가면 되죠.”

“네, 근데 선배님. 어깨는 괜찮으세요?”

정아리가 내 어깨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어깨를 앞뒤로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예, 다들 아리 씨처럼 걱정해주신 덕분에 금방 회복했어요.”

“다행이다. 저희 펜션에선 항상 선배님 이야기를 하거든요.”

“제 이야기를요?”

내 말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네, 선배님께 배울 점은 연기뿐만이 아니라고. 거의 매일 모일 때마다 선배님 이야기는 안 빠지는 것 같아요. 하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에게 장난스레 물었다.

“설마… 그 이야기의 절반이 제 욕은 아니죠?”

“에이, 전혀 아니죠!”

정아리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답했고.

“하하, 농담이에요. 좋게 이야기해 주신다니까, 감동입니다.”

“저희가 감동이죠. 단역 배우들이 이렇게 많은데, 늘 하나하나 신경 써주시고.”

나 역시 이들과 친분을 쌓는 것이 좋았다.

드라마 ‘닥터’ 촬영이 처음 시작되고 무료했을 무렵.

김민규와의 친분을 쌓아갔고, 그 이후 자연스레 다른 단역 배우들과도 만남이 잦아졌다.

배우의 급을 나눠, 유명한 배우들과만 친분을 쌓고 싶어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많은 배우와 사람들과 소통을 하며 발을 넓히는 게 좋았기에.

나 또한 이런 시간들이 소중하고 의미 있게 느껴졌지.

로비로 향하니, 김민규를 포함한 몇 명의 단역 배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게로 달려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어, 오래 기다렸어?”

“아닙니다.”

우리는 호텔 로비에 있는 카페로 발길을 옮겼다.

“커피나 마시면서 이야기하자.”

“좋습니다.”

카페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들에게 물었다.

“오늘은 왜, 무슨 고민 생겼어?”

내 말에 손성진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선배님…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응, 뭔데?”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 앞에 자리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이번에 계약을 하게 됐는데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부딪쳤다.

“이야, 잘됐네. 축하해.”

손성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헤실거렸다.

“감사합니다. 근데 아직 도장은 안 찍었어요.”

단번에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물었다.

“조건이 궁금하구나?”

내 말에 손성진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나를 바라보았다.

“헐, 어떻게 아셨어요?”

“그래서 나한테 고민 상담하려고?”

손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휴대 전화에 적어온 내용을 내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이거 어떤지 한 번만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응, 말해 봐.”

“계약 기간은….”

손성진은 쉬지 않고 계약 조건을 읽어 내려갔고.

나는 커피도 밀어놓은 채,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한참 설명을 끝낸 후.

나는 손성진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야.”

내 말에 그는 수심이 깊어진 얼굴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저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별로인 겁니까?”

이내 나는 입술을 씨익 올리며 답했다.

“아니, 좋은데? 신생 회사인데 조건도 좋고. 지금 듣기로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오오, 정말요? 다행입니다.”

기뻐하는 손성진을 바라보며 나는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나중에 계약서 받으면, 조건 다시 봐줄게. 연락해.”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면, 저야 정말 감사하죠.”

손성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허리를 접었다.

이후에도 몇몇 단역 배우들은 내게 시시콜콜한 고민 상담을 포함해.

대화를 이어나갔고.

어느새 텅 빈 커피.

“그럼 내일 촬영도 있으니까, 슬슬 들어갈까?”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비에 위치한 카페였기에, 그들은 내게 허리를 숙이며 곧장 인사를 보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너네도 고생 많았어. 내일 현장에서 보자.”

“넵!”

그들은 내가 뒤를 돌 때까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얼른 가.”

“선배님 먼저 들어가십시오.”

“하하, 알겠어. 얼른 조심히들 가.”

그들에게 인사를 한 뒤,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그 앞에는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송유나가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이 눌리지 않은 것을 보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에게 놀란 것도 잠시.

송유나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뭐 하고 왔어요?”

“네?”

다짜고짜 묻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배우가 그렇게 막… 아무나… 어? 이렇게 돌아다니고, 사람도… 어?”

송유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횡설수설하며 내게 물었고.

나는 볼을 손가락으로 긁적이며 답했다.

“저 후배들 회사 상담 좀 해주고 왔는데. 그거 보신 거예요?”

송유나는 내 말을 들은 건지 다짜고짜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그걸 왜 이렇게 밖에서 해요. 사진 찍히면 어쩌려고!”

“다들 제 방으로 불러서 하기에는 좀 그렇고. 그냥 같이 바람도 쐬고, 커피도 한잔하면서….”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유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흥, 됐어요.”

그러고는 곧장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채, 문을 닫아버렸다.

“뭐야, …왜 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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