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71)화 (171/303)

171화 #31 – 기회는 운명처럼 (3)

“컷, 오케이!”

홍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고, 나는 스태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음 신 이어갈게요.”

“네.”

촬영장을 나오자, 김 실장이 내게 물을 건네며 말했다.

“힘들지?”

“아니, 괜찮아.”

“방금 신 대사는 진짜 긴데, 그래도 NG 몇 번 안 내고 잘 끝냈다. 고생했어.”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을 들이켰다.

독백으로 긴 대사를 틀리지 않기 위해 몇 번, 아니 몇십 번은 연습을 했으니까.

“다행이다.”

나는 타들어가는 목을 물로 겨우 식혀냈고.

카메라 밖에서 김 실장과 휴식을 취하며 다음 대사를 연습하기 위해 대본을 찾았다.

“형, 내 대본은?”

“맞다, 물 가지러 갔다가 두고 왔네. 바로 가져다줄게.”

“같이 가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어차피 바로 신 들어가야 하잖아. 여기서 연습하자. 내가 바로 가져올게.”

“응, 고마워.”

김 실장은 대본을 가지러 자리를 떠났고.

나는 손에 들린 물병을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옆에는 조명 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분주한 것 같은 그들의 분위기에 나는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장비 한 대의 금액이 어마어마하기에, 바로 옆에서 알짱거리다 선이라도 밟아 조명이 넘어지면 큰일일 테니까.

그 옆으로 발길을 옮겼지만.

주변이 조용한 탓에 그들의 대화 소리는 여전히 내 귓가에 들려왔다.

“이거 지지대 확인했어?”

한 스태프의 말에 옆에 있던 스태프가 입을 열었다.

“어, 근데 좀 불안하지 않아?”

“왜 어떤데?”

그들의 말에 할 일 없이 멍하니 서 있던 나는 귀를 쫑긋 세웠고.

“아직도 조금 흔들흔들하기는 해.”

그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돌려 그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다른 스태프가 손으로 조명 지지대를 흔들어 보았고.

“에이, 이 정도면 충분해.”

“아, 그래?”

“당연하지. 이번 주말에 아예 장비 바꾼다고 했거든. 그때까지만 쓰면 되니까, 괜찮아.”

“얼마 안 남았네.”

그들은 공구함을 꺼내 말을 이어갔다.

“저기 끝부분에 나사 좀 더 세게 조여. 주말까지만 버티면 되니까.”

“오케이. 신 들어가기 전에 손 좀 봐둘게.”

“나도 같이 보자.”

그들은 하늘 높이 서 있는 지지대를 내려 나사를 조이기 시작했다.

그때, 김 실장이 내게로 다가와 대본을 내밀었다.

“희성아, 여기 대본.”

“아… 고마워, 형.”

“여기 다음 신 체크해뒀어.”

김 실장은 펼쳐진 대본을 내 앞에 내밀었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본을 살폈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 옆에는 조금 전 조명 지지대를 보던 스태프들이 여전히 끙끙대며 나사를 조이고 있었고.

땀을 흘리는 그들을 보며 나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내가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면, 저 앞에 있는 홍 감독이 이리로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굳이 감독에게 전한다면, 조명 팀이 좋아하지 않을 터.

나는 서둘러 발길을 옮겼고.

다시 멀쩡해진 조명 지지대는 촬영장 앞으로 향했다.

“자, 그럼 바로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준비됐죠?”

조감독이 나를 향해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준비됐습니다.”

내 사인에 홍 감독은 메가폰을 쥔 채 소리쳤다.

“레디, 액션!”

***

코앞까지 다가온 맛있는 밥 냄새.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맛있는 냄새 나지?”

김 실장이 나를 보며 물었고.

“어, 벌써 밥차 왔어?”

“그럼.”

“오늘은 좀 빨리 왔네?”

내 말에 김 실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오늘 오전 촬영이 일정보다 빨리 끝나서, 식사하고 바로 오후 촬영을 시작한대.”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오, 그럼 오늘 촬영 일찍 끝나는 건가?”

“응, 아마 몇 시간은 일찍 끝나지 않을까 싶은데?”

김 실장이 밥차를 턱으로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지금 밥 먹으러 갈까?”

“좋아.”

우리는 한식 냄새가 폴폴 풍기는 밥차로 빠르게 발길을 옮겼고.

밥을 뜨고 나자 저 앞에 보이는 김민규와 박철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반겼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그들의 인사에 나는 손을 흔들었고.

식판을 든 채 그들에게로 향했다.

“여기 앉아도 돼?”

장난기 많은 박철민이 곧장 손바닥으로 의자를 쓸며 내게 말했다.

“아이고, 당연하죠. 함께 식사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의 말에 나와 김 실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진짜 철민이 때문에 못 살겠다.”

박철민은 호탕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들을 향해 물었다.

“너네는 오늘 촬영 끝났어?”

김민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게 말했다.

“저는 한 신 남았고, 철민이는 방금 촬영 끝났습니다.”

“빨리 끝났네.”

“네, 선배님은 늦게까지 하시죠?”

김민규의 말에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근데 오늘 촬영이 전체적으로 조금 일찍 끝나지 않을까 하던데?”

내 말에 김민규와 박철민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눈빛을 주고받는 듯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배님, 그럼 오늘 끝나고 뭐 하십니까?”

“나… 뭐 없지. 그냥 호텔로 가는 것밖에.”

내 대답에 그들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에게 물었다.

“왜, 또 볼링 치러 가자고?”

“아니요. 볼링은 며칠 전에 쳤으니까. 오늘은 다른 거 하려고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뭔데?”

박철민은 밥 먹던 수저를 내려놓고 양손을 뻗어 낚시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저희 낚시 스폿을 찾았거든요.”

“낚싯대는?”

“당연히 낚싯대도 마련해 뒀습니다. 근처에서 팔길래 저번에 샀거든요. 준비성 하면 역시 박철민 아닙니까. 하하.”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그래, 촬영 일찍 끝나면 가자.”

일찍 촬영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퇴근 후 호텔에서 딱히 할 일이 없을 거라는 걸 예상했었다.

늘 그랬으니까.

더군다나 후배들이 용기를 내 물어보는데, 굳이 약속도 없이 거절할 마음은 없었다.

그때.

송유나가 최 실장과 함께 내 앞으로 식판을 들고 지나가고 있었고.

나는 서둘러 그녀를 불렀다.

“유나 씨!”

내 말에 그녀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깜짝아.”

“아, 미안해요. 빨리 지나가길래, 크게 불렀더니.”

내 사과에 송유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왜요?”

지난번 호텔 칵테일 바에서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로.

그녀와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퉁명스럽고 차갑게 행동하고 있지만, 저건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원래 그녀의 성향이 그런 것임을 알고 있으니까.

더군다나 그녀의 본심은 그게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김민규와 박철민을 바라보고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유나 씨도 같이 낚시 가도 되지?”

내 작은 목소리를 들은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당연하죠!”

그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고 송유나에게 말을 이었다.

“유나 씨, 오늘 촬영 끝나고 같이 낚시하러 갈래요?”

내 말에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답했다.

“뭔 낚시예요?”

“왜요. 재밌을 거 같은데?”

그녀는 내 설득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같이 가요. 나는 호텔에만 있으니까, 심심하던데….”

내 말이 끝나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낚시는 별로….”

송유나는 그렇게 최 실장과 함께 테이블로 향했다.

몇 시간 뒤.

촬영이 끝난 후.

나는 단역 배우들이 말한 낚시 스폿에 도착했다.

“이야….”

감탄이 절로 나오는 광경.

노을이 지고 있어 바다는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잔잔한 파도가 우리를 반겨주는 것 같았다.

“선배님, 여기에서 낚시하면, 진짜 금방 잡혀요.”

우리는 나란히 서서 낚싯대를 던졌다.

김민규, 박철민, 그들과 늘 함께하는 손성진.

그리고 송유나까지…!

우리는 조용하게 낚시를 시작했고.

낚싯대를 던지고 낚아채기를 반복하던 그때.

“꺄아!”

송유나는 그렇게 가기 싫다는 듯이 거절하더니.

신이 난 아이처럼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

“이거 봐요. 나 물고기 잡았어!”

송유나가 눈웃음을 보이며 낚싯대를 내게 내밀었다.

“얼른 당겨요.”

나는 그녀의 낚싯대를 보며 말했고.

“나… 이거 물고기 못 만지는데…?”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보며 연신 눈을 깜빡이는 그녀의 모습.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낚싯대 던지는 건 강태공 같더니, 물고기는 못 만져요?”

내 말에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답했다.

“만지는 건 징그럽단 말이에요. 얼른 이거 빼줘요.”

그녀는 낚싯대 끝에 달린 물고기를 내 쪽으로 밀며 말했다.

“아… 알겠어요. 이쪽으로 밀면, 제 얼굴에 닿잖아요.”

나는 얼굴 가까이에 있는 물고기에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러니까 얼른 빼요.”

나는 서둘러 그녀의 낚싯대에 달린 물고기를 빼냈고.

송유나는 다시 여유로운 표정으로 미끼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 해요. 미끼도 껴줘야 던지죠.”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미끼를 끼며 답했다.

“이건 유나 씨가 낚시하는 게 아니라, 내가 다 하는 거 같은데?”

“에이, 희성 씨는 물고기 낚지도 못하던데?”

그녀의 말에 김민규와 박철민, 손성진이 웃음을 보였다.

“그냥 내가 낚을 테니까, 희성 씨는 물고기를 떼어줘요.”

우리의 대화에 박철민이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이 딱 환상의 낚시 파트너 같은데요?”

그의 말에 송유나는 언제 웃었냐는 듯 미소를 지워낸 채, 낚싯대를 멀리 던졌다.

퐁-!

머쓱한 미소를 지은 박철민은 자신의 낚싯대를 바라보았고.

우리는 다시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이 낚시에 집중했다.

어느덧 어둑해지고 있는 하늘.

나는 김민규를 향해 물었다.

“민규야, 여기 밤에 낚시하기에는 위험한 거 아니야?”

내 말에 단역 배우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맞아요. 여긴 빛이 없어서. 저희 정리할까요?”

“그러자.”

낚시를 오기 싫어했던 송유나는 정리하자는 말에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고.

단역 배우들은 나와 송유나 쪽으로 빠르게 달려오며 말했다.

“저… 희성 선배님, 저희 낚싯대 접기 전에 사진 찍어도 될까요?”

“무슨 사진?”

“유나 선배님과 희성 선배님이랑 같이 낚시한 거, SNS에 올리고 싶어서요.”

박철민의 말에 김민규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희 SNS에 선배님들과 시간 보낸 거 자랑하고 싶은데… 선배님들 얼굴 나온 거 올려도 될까요?”

그들의 말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휴, 당연히 되지.”

그리고 고개를 돌려 송유나를 보며 물었다.

“유나 씨는 괜찮아요?”

송유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뭐… 상관없어요. 대신 얼굴 잘 나오게 찍어요.”

“당연하죠. 송유나 선배님 미모는 워낙 출중하시니까, 저희 옆에서 찍으면 더 돋보이실걸요? 하하.”

박철민이 너스레를 떨며 휴대 전화 카메라를 열었고.

우리는 바다를 배경으로 서서 낚싯대를 든 채 포즈를 취했다.

찰칵-!

여러 번의 셔터 음이 울렸고, 박철민은 서둘러 찍힌 사진을 나와 송유나에게 보여주었다.

“오오, 잘 나왔는데요?”

“그러네.”

박철민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SNS 올려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이 사진으로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단역 배우들과 사진을 그 자리에서 공유했고.

빠르게 SNS에 사진을 업로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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