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31 – 기회는 운명처럼 (2)
작은 동네 볼링장.
볼링 레인은 총 6개가 깔려 있었고.
남원의 번화가에서 떨어진 곳이었기에, 지금 이 시간에도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저희 6명이요.”
김민규가 달려가 카운터에 인원을 이야기한 뒤, 서둘러 우리는 볼링화로 갈아 신었다.
“저쪽 1, 2레인으로 가시면 됩니다.”
직원은 우리를 향해 손을 뻗어 레인으로 안내했고.
“감사합니다.”
자리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팀을 나눴다.
“3:3으로 하면 되는데, 팀은 어떻게 나눌까요?”
박철민의 말에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근데 제가 볼링을 쳐본 적이….”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이번 생에 볼링을 쳤던 적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내 말에 단역 배우 한 명도 손을 들어 외쳤다.
“…저도요. 하하.”
그와 나, 둘만이 초보에 속했고.
“그럼 희성 선배님이랑 형규가 팀을 나누는 게 어때요?”
김민규의 말에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장형규와 나는 세상 가장 공평한 게임인 가위바위보로 팀 고르기를 시작했고.
“가위바위보!”
“나는 그럼 민규 씨.”
내 선택에 김민규가 활짝 웃으며 내 옆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그렇게 몇 번의 팀 가르기 후.
팀이 결정되었다.
박철민이 내 옆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랑 민규는 동갑이에요, 25살.”
그들의 나이를 듣고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진짜 부러운 나이네.”
“선배님,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박철민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까…?”
“네!”
그들은 동시에 내게 답했고.
우리는 한층 더 가까워진 기분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김민규의 스타트로 첫 라운드가 시작됐고.
그는 오른손으로 볼링공을 쥐고, 왼손으로 공을 받친 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내 그의 손에서 떨어진 공.
공은 빠르게 굴러 핀이 서 있는 끝까지 다가갔고.
쾅-!
김민규는 제자리에 서서 핀이 쓰러지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10개의 핀이 완전히 넘어졌다.
“와아!”
“이야, 민규 실력 장난 아니네.”
나는 김민규를 향해 양손을 내밀어 하이 파이브를 했고.
그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하하.”
상대편의 차례가 이어지고.
이후 다가온 우리 팀 박철민의 차례.
그 역시 전문가적인 자세를 취하며 공을 굴렸다.
쾅-.
핀은 하나씩 쓰러지며, 총 9개의 핀을 넘어뜨렸고.
그들의 기록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뭐야, 철민이도 엄청 잘하네.”
“하하, 감사해요. 선배님.”
“너네 무슨 볼링 선수들 같다.”
내 말에 박철민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희 요즘 촬영 끝나고, 이 주변에 할 게 없어서 항상 볼링만 치거든요.”
“맞아요. 그래서 금방 실력이 늘었어요.”
나는 그들에게 엄지를 치켜들었고.
잠시 뒤 찾아온 내 차례.
단역 배우들은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긴 심호흡을 내뱉은 뒤.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고.
공은 스르르 내 손을 빠져나가 레인으로 굴러갔다.
툭-.
김민규나 박철민과는 달리, 내 공은 힘없이 떨어졌고.
이내 공은 레인 가운데가 아닌 거터로 빠져버렸다.
“아… 고랑으로 빠졌네.”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뒤를 돌았고.
그 모습에 김민규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외쳤다.
“아쉽습니다, 선배님.”
그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아쉽기는. 처음부터 거터로 빠졌는데?”
내 말에 김민규와 박철민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찾아온 순서.
“방금 하나도 못 쓰러뜨렸지만, 이번에 다 치시면 스페어입니다.”
공을 들고 있는 내게, 김민규가 다가왔고.
“또 거터로 빠질까 걱정되는데?”
“괜찮으시면, 제가 좀 알려드려도 될까요?”
김민규는 공손한 말투로 내게 말했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고맙지.”
“그럼 여기서 공을 이렇게 쥐고, 왼손은 그냥 거든다고 생각하고 받치시면 돼요. 그리고 자세는….”
김민규는 열정 가득한 표정과 말투로 내 자세를 봐주며 설명했고.
“자, 여기서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공을 포물선 그리듯이…!”
그의 코치에 나는 공을 레인에 내려놓았고.
쾅-!
부드럽게 떨어져 굴러가는 공.
“오오.”
뒤에 있던 우리 팀 박철민을 포함해.
상대 팀까지 내 공이 굴러가는 모습에 숨을 죽였다.
“와아아아!”
그리고 끝내 터진 함성 소리.
10개의 핀이 모두 쓰러졌다.
“이야,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놀란 얼굴로 김민규를 바라보았고.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내게 달려와 손바닥을 부딪쳤다.
“선배님! 크으, 역시 못 하는 게 없으십니다.”
“다 민규 덕분이지. 하하.”
“아닙니다. 이걸 알려 드린다고 해서 한 번에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완전 사기캐.”
박철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맞죠. 설명한 대로 해서 10개 핀 다 쓰러트리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선배님은 진짜… 진희성, 그 자체입니다.”
“하하, 그게 무슨 말이야.”
“진희성이, 진희성 했다. 뭐 이런 말이죠. 하하하.”
우리는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게임을 이어갔다.
***
마지막 공이 굴러가고.
“와아아아!”
결국, 우리 팀의 승리로 게임이 끝났다.
우리는 손뼉을 부딪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손 씻고 올까요?”
화장실을 가리키며 묻는 박철민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손을 씻기 전, 서둘러 카운터로 향했다.
게임에서 진 팀이 계산을 하기로 했지만.
모두 단역 배우들이 모인 이곳.
나 역시 그들과 같던 시절이 있기에, 그들이 계산하게 둘 수는 없었다.
결제를 마치고 카드와 영수증을 받던 그때.
“아… 선배님!”
저 멀리서 달려오는 상대 팀 손성진의 모습.
그는 서둘러 내게로 다가와 카운터에 카드를 내밀었다.
“여기서 계산 다 하셨습니다.”
직원이 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손성진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희가 졌는데,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아니야. 덕분에 내가 너무 재밌어서, 내는 거야.”
“그래도….”
“괜찮아. 애들 기다리겠다, 얼른 나가자.”
그는 나를 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우리는 볼링장에서 나와 입구에 옹기종기 모였다.
“선배님 계시는 호텔이 이 근처이죠?”
김민규가 바로 근처에 있는 호텔을 바라보며 내게 물었고.
“응, 나는 저기 호텔. 너희 숙소는 여기서 먼가?”
“아니요. 저희도 멀지는 않습니다. 선배님 모셔다 드릴게요.”
“에이, 뭘 모셔다줘.”
내 말에 그들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혼자 가면 위험해요. 저희랑 같이 가요.”
그의 말에 박철민이 동참해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저희 사실 숙소 들어가도 할 거 없어요. 선배님이랑 이야기 나누면서 가고 싶어요.”
박철민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
볼링장에서 호텔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호텔로 걸어가는 내내 그들은 내게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선배님은 그럼 연습은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나는 촬영하는 동안은 맡은 배역에 몰입해서 사는 편이야.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내가 그 인물이 됐다고 생각하면서.”
“오오, 그래서 그렇게 소름 돋는 연기가 나오는 거였네요.”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새로운 질문들이 이어졌다.
“아, 선배님. 최서빈 선배님과도 친분이 있다하시던데, 작품 하다가 친해지신 거예요?”
“그렇지. 서빈 선배랑 작품을 몇 개를 같이했거든. 그래서….”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금방 호텔 앞에 도착했고.
순간.
박철민의 배에서는 배꼽시계가 울리고 있었다.
꼬르륵-.
그 소리에 나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고.
그러고 보니, 오후에 촬영을 마친 후.
우리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었다.
다들 열정적으로 볼링을 치며 음료만 마셔서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지.
“너희 저녁은?”
“아, 맞네. 저녁도 곧 먹어야죠.”
나는 김민규를 바라보며 물었다.
“식대는 다 나오고 있어?”
내 말에 그는 주변 단역 배우들을 한 번 훑어본 뒤에 말했다.
“네, 저희 전부 다 식대 나오고 있어요. 6천 원씩 나오는데, 평소에는 숙소 근처에서 먹고. 가끔은 모아서 치킨 시켜 먹거나 편의점 가거나 해요.”
6천 원….
누군가에게는 식대로 큰돈일 수도 있고, 적은 돈일 수도 있지만.
한창 연기를 하고 힘들게 배우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 몇 달을 남원이라는 한정적인 곳에서 버텨야 하는데.
항상 편의점을 다니며 먹는다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든 게 사실이지.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나 여기 데려다줘서 고마운데, 같이 저녁 먹고 가라.”
내 말에 그들은 하나같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 아닙니다.”
“내가 고마워서 그래. 내가 사고 싶어서.”
김민규는 호텔 위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근처에서 간단한 거 사주시면 안 됩니까? 여기는 너무 비쌀 것 같은데….”
내가 산다는 말에, 내 주머니 사정까지 걱정해주는 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여기 맛있어.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먹고 가.”
“그래도…. 앞에 중국집 있는데, 거기서 사주시면 안 돼요?”
진짜로 중국집을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밖에 없는 저 표정.
말은 중국집이라고 하고 있지만.
그들의 눈은 호텔 로비에 붙어 있는 레스토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함 때문에 중국집이라고 하는 것이지.
나는 서둘러 그들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
“그럼 중국집은 다음에 또 오면 사줄게. 오늘은 여기 로비까지 들어왔는데, 이거 먹자.”
그들은 내 말에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럼… 감사합니다.”
“이야, 호텔 레스토랑이라니!”
“와, 나 이런 데 처음 와봐.”
“야, 촌스러운 티 내지 말자. 하하.”
“여기 비쌀 거 같은데….”
그들은 내 뒤를 따라오며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고.
나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옛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
호텔 칵테일 바.
지난번과 같은 자리에 앉은 송유나는 벌써 칵테일 두 잔을 깔끔히 비웠다.
“뭐야….”
그녀는 테이블에 올려둔 휴대 전화를 바라보며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데, 왜 안 오는 거야?”
송유나가 기다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진희성이었다.
그를 기다리며 벌써 그녀의 앞에는 세 번째 칵테일이 올라왔고.
송유나는 칵테일을 홀짝홀짝 들이켜며 멍하니 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 오전에 촬영 없는데, 꼭 이런 날에 칵테일 바 오던데…. 오늘은 왜 이렇게 안 오지?”
끼이익-.
그때 칵테일 바의 커다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턱을 괴고 있던 그녀는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았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인물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송유나는 실망 가득한 눈빛으로 다시 자신 앞의 칵테일을 바라보았다.
“휴우… 진희성이 뭐라고, 내가 왜 걔만 기다리고 있는 거야?”
뾰로통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송유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됐어. 애초에 나는 진희성이 아니라, 술 마시러 온 거니까. 흥.”
그녀는 반 정도 남은 칵테일을 가득 입에 부어넣었고.
직원을 향해 말했다.
“이거 같은 거로 한 잔 더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