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31 – 기회는 운명처럼 (1)
영화감독 제임스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아… 치코, 그때 말한 오디션은 어떻게 된 거야?”
그의 말에 치코는 태블릿 PC 화면을 열어 그에게 건넸다.
“여기 19명의 오디션 영상입니다.”
치코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임스는 한껏 집중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그가 보고 있는 영상에는 한국 배우들이 영어로 연기를 펼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임스의 표정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니야, 다음.”
그의 말 한마디에 치코는 급히 다른 배우로 파일을 넘겼고.
다음 배우의 연기가 시작함과 동시에, 제임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배우는 우리 배역이랑 톤이 너무 안 맞아. 다음!”
“네.”
그렇게 한 시간가량 같은 패턴을 반복했고.
제임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다음….”
화를 넘어 이미 체념한 듯이 숨을 내뱉었고.
그의 말에 치코는 파일을 넘기다 말고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이게 끝입니다.”
“뭐?”
“19명의 오디션 파일 전부 보셨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틀까요?”
치코의 말에 제임스는 손을 허공에 가로저으며 외쳤다.
“아니, 이렇게 한국에 연기를 잘하는 인물이 없단 말이야?”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어가 아닌 영어라 그런지 예상보다 좀 별로네요.”
“조금이 아니야. 이렇게 인재가 없다니. 하아….”
치코는 그의 말에 태블릿 PC를 덮었고.
제임스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20명이 전부인 거지?”
치코는 화면을 넘기며 답했다.
“아닙니다. 20명에게 오디션 제안을 보냈고, 그중 총 19명만이 오디션 파일을 보내왔습니다.”
“그럼 한 명은?”
“한 명은 그쪽에서 스케줄 조정이 안 된다고 거절 의사를 전해 왔습니다.”
“뭐?”
제임스는 놀란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고.
“재차 물었지만,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몇 달 전.
진희성에게 제안이 온 할리우드 오디션이었다.
그 당시 진희성은 자신이 국내에서 더 오를 자리가 많이 남았기에.
국내에 집중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에 WG 엔터에서는 완곡하게 오디션 제안을 거절했다.
몇 번이나 되묻는 할리우드 측에 확실한 답을 내놓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 배우는 무슨 스케줄을 하는데?”
제임스의 말에 치코는 자신이 찾아놓은 자료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현재 드라마를 찍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 드라마인데? 설마… 제프리 감독 드라마 찍는 건 아니겠지?”
제임스는 미간을 찌푸리고 할리우드의 유명한 감독을 언급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한국에서 드라마를 찍고 있다고 합니다.”
“뭐? K-드라마?”
그는 실망감이 가득함과 동시에,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고작 K-드라마 때문에 이 오디션을 거절했다고?”
치코는 고개를 주억거렸고.
“다른 한국 배우들은 할리우드로 진출하고 싶어서 난리가 났던데. 그 친구는 대체 뭐 하는 배우인 거야. 얼굴이나 좀 보자.”
치코는 그에게 진희성의 프로필을 건넸다.
그러더니 이내 진희성의 프로필을 다시 치코에게로 세차게 내밀었다.
“됐어.”
제임스의 짜증 섞인 표정과 말투.
치코는 그의 성격을 알기에, 서둘러 플랜 B를 꺼내들었다.
“제임스, 이건 어떠십니까?”
“이게 뭔데?”
치코는 다시 영상을 틀어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몇 달 전에 뉴욕의 한 공연장에서 찍힌 영상인데요. 여기에 관객으로 온 한국인이 즉석 연기를 펼쳐서 난리가 났던 영상입니다. 한번 보시죠.”
제임스는 턱을 어루만지며 영상에 집중했다.
영상 속에는 진희성이 뉴욕 여행 당시.
관객석에서 나와 즉흥 경찰 연기를 펼치는 모습이 담겨 있었고.
짧은 영상이었지만, 그 임팩트는 꽤나 강렬했다.
제임스는 금방 끝나버린 영상을 몇 번이고 재생시켰고.
“와우! 이 친구 뭐야. 알아봤어?”
“지금 알아보는 중입니다. 어떠십니까?”
“대박인데?”
제임스의 눈이 반짝였고.
그때.
“잠깐…!”
“네?”
“이 친구, 아까 그 오디션 거절했던 배우 아니야? 아까 그 배우 프로필 다시 줘봐.”
일시 정지된 영상.
영상을 확대해 프로필 사진과 영상 속의 얼굴을 비교했고.
“맞네. 동양인들이 다 비슷하게 생겨서 못 알아봤는데, 확실히 같은 인물이야. 여기 눈 밑에 작은 점까지.”
그의 말에 치코는 그에게로 다가가 영상과 프로필을 비교해 보았고.
“그러네요. 희성, 이 배우가 확실해요.”
제임스는 쓰읍, 소리를 내며 진희성의 프로필을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얘… 섭외 요청 다시 해보면 안 되겠지?”
“아무래도 두 번이나 거절을 해서…….”
“하아, 얘 연기가 기가 막히는데. 딱 내가 찾던 그런 배우란 말이지.”
제임스는 여전히 진희성의 거절이 아쉬운지, 눈독을 잔뜩 들인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치코는 그런 제임스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볼까요?”
“아니야. 우리도 자존심이 있지. 놔둬.”
“아….”
“뭐, 연기 잘하는 동양인이 저 친구밖에 없는 건 아닐 테니까.”
큰소리를 치는 제임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눈은 영상 속 진희성을 향하고 있었다.
“한국에 할리우드를 사랑하는 관객이 많아서, 관객을 좀 끌어오고 싶었지만.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
“그럼 아예 다른 나라로 오디션을 돌릴까요?”
치코의 제안에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본이나 중국 쪽은 어때?”
“제 생각에는 일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좋아. 일미 교포 배우가 있는지 먼저 알아봐.”
치코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튕기며 답했다.
“이번에 데뷔한 괜찮은 친구가 하나 있는데, 연기했던 영상 먼저 보시겠습니까?”
“어, 먼저 보여줘.”
***
“고생하셨습니다.”
진희성과 스태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인사를 보냈고.
송유나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둘러 매니저 최 실장에게로 발길을 옮겼다.
“유나야, 오늘도 호텔로 바로 갈 거지?”
그의 말에 송유나는 짜증 섞인 투로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다.
“그럼 어디로 가. 여기 주변에 뭐 혼자 할 만한 것도 없고.”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 미안, 바로 호텔로 갈게.”
“어.”
송유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꽉 감아버렸고.
최 실장은 룸 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긋 바라보며, 하려던 말을 주워 담았다.
그렇게 몇 분 뒤, 차는 호텔 로비 앞에 멈춰 섰다.
“유나야, 다 왔어.”
조심스레 송유나를 깨운 최 실장은 그녀가 내리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내일 오전에 일정 없고, 오후에 시작하니까. 푹 쉬고 나와도 돼.”
“알겠어.”
“나는 주차하고 올라갈 거니까, 먼저 호텔에 가서 쉬어.”
“응.”
최 실장이 문 열림 버튼을 눌렀고.
송유나가 차에서 내리자, 그는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외쳤다.
“혹시 방에서 심심하거나 나 필요하면 연락해. 어차피 방 근처니까.”
“됐어. 저녁에 나도 할 일 있어.”
송유나는 다시 도도함을 장착한 채 호텔 안으로 향했다.
몇 시간 뒤.
호텔에서 할 일 없이 뒹굴고 있던 송유나는 무료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아… 진짜 할 거 하나도 없네.”
몇 번을 보던 대본은 손때가 잔뜩 묻은 채 해져 있었다.
이미 대본 연습은 수도 없이 한 모양.
송유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그때.
“맞다. 칵테일 바!”
떠오른 생각에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읊조렸다.
“내일 오전 촬영 없는데, 진희성… 오늘도 칵테일 바에 오겠지?”
설렘이 묻어 있는 그녀의 얼굴.
송유나는 겉옷을 걸치며 미소 지었다.
“가서 진희성이랑 이야기나 하고 싶다….”
그녀는 급히 휴대 전화를 챙겨 호텔 방 문을 벌컥 열었다.
***
“야, 오늘 뭐 할 거냐?”
박철민이 김민규를 향해 물었고.
“볼링이나 칠까?”
“또?”
“근처에 할 만한 게 볼링밖에 없잖아. 아니면 뭐 할 거 있어?”
김민규의 말에 박철민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주변에 볼링장밖에 없지….”
그때 그들에게 다가온 손성진이 대화에 참여했다.
“그래, 다른 단역 배우들도 물어봐서 같이 볼링 한 게임 하러 가자.”
“좋아.”
“누구누구한테 물어볼까?”
“어차피 단역 배우들은 끝나면 여기로 오잖아. 곧 촬영 끝나니까, 오면 물어보자.”
***
“희성아, 오늘도 고생 많았다.”
김 실장은 촬영이 끝난 내게로 다가와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아니야. 형도 고생했어.”
“고생은 뭘. 아, 내일 오전 촬영 없는 거 기억하지?”
“맞네.”
그는 내게 다시 설명을 늘어놓았다.
“내일 야외 촬영부터 시작하는데, 오후에 쨍쨍할 때 하자고 하셨어.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천천히 일어나서 나와.”
“오오, 좋네.”
내 말에 김 실장이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그럼 저녁에 뭐 하려고? 호텔에서 심심하지는 않아?”
그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답했다.
“심심하기는 한데, 대본 연습도 하고 모니터링하면서 시간 보냈지.”
“그저께 촬영 없는 날 저녁에는 안 심심했어? 거기 할 게 없잖아.”
“그날은 호텔에 있는 칵테일 바 갔지. 괜찮더라.”
송유나와 함께 칵테일 바에 있던 날이었다.
당연히 심심할 틈이 없었지.
그때, 김 실장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희성아, 잠깐만 기다려줘. 나 회사 전화 좀 받고 올게.”
“응, 천천히 갔다 와.”
나는 자연스레 발길을 벤치로 옮겼다.
걸어가는 도중 오늘도 역시 모여 있는 단역 배우들.
내가 눈여겨보고 있던 김민규도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그를 슬쩍 바라보다가 김민규와 눈이 마주쳤고.
김민규와 그의 옆에 있던 다른 단역 배우들이 갑자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내 급히 내게로 달려왔다.
“선배님,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깍듯이 인사하는 그들에게 나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배우님들도 고생 많으셨어요.”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마친 뒤, 멈췄던 발을 움직였고.
그때 뒤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야, 뭐 어때. 혹시 모르니까 여쭤보기라도 하자.”
“그래, 같이하면 우리야 영광인 거 아니냐?”
“그럼, 네가 해.”
티격태격하는 소리.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몇 초 뒤, 그들이 다시 빠른 걸음으로 내 앞에 다가왔다.
“저… 선배님.”
“네?”
박철민이 김민규의 팔을 툭툭 건드리자,
김민규는 내 눈을 피하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혹시 오늘 저녁에 약속 없으시면, 저희랑 같이 볼링 치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옆에 있던 단역 배우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연신 눈을 깜빡이며 그들을 번갈아 보았고.
김민규는 머리를 긁적이며 재차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선배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건데… 실례가 되었다면….”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입을 열었다.
“나도 같이 가도 되는 자리예요?”
내 말에 그들은 하나같이 짜기라도 한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당연하죠!”
“선배님, 같이 가실 수 있는 겁니까?”
그들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좋아요. 바로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