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68)화 (168/303)

168화 #30 – 주연의 무게 (6)

“고생하셨습니다!”

인사를 보낸 후 현장에서 나오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김 실장에게로 향했다.

“수고했어.”

“고마워. 방금 괜찮았어?”

“어, 이거 봐.”

김 실장은 항상 내 연기의 장면을 따로 찍어주고는 했다.

물론 드라마 촬영 카메라로 찍히는 것에 비하면 화질이나 음질 등 모든 것이 떨어지지만.

그와 별개로 김 실장의 시선에서 내 연기를 촬영했다.

그게 더 객관적으로 내 연기를 볼 수 있으니까.

그가 내민 휴대 전화 속 영상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고개를 숙였고.

그때.

김 실장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나를 불러 세웠다.

“왜?”

그의 부름에 나는 고개를 들었고.

내 옆에는 다름 아닌, 방금 함께 촬영한 단역 배우 김민규가 서 있었다.

“어, 민규 씨?”

“네, 저 선배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내 말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김민규는 멋쩍은 얼굴로 촬영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답했다.

“조금 전에 저한테 애드리브 던져주신 덕분에, 제가 대사할 수가 있었잖아요. 이유가 어찌 됐든 감사해서요.”

그는 허리를 깊게 접었고.

그런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많이 긴장한 것 같길래 그랬어요. 저도 단역 때는 카메라 앞에만 서면 머리가 하얘졌거든요.”

“헐, 선배님이요?”

그는 못 믿겠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럼요. 저도 민규 씨처럼 신인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그때 오히려 달달 외우던 대본이 아닌, 다른 애드리브를 하니까 저도 모르게 말이 툭 튀어나오더라고요.”

그러자 김민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민규 씨한테 애드리브 던진 건데, 역시나 잘 받아주셔서 저도 감사해요.”

그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아까 열심히 연습한 거,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게 기반이 되어 더 성장한다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열심히 해서 같이 연기해요.”

“네, 진짜 열심히 해서 선배님과 꼭 함께 연기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활짝 입꼬리를 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도 민규 씨랑 또 같은 작품을 하고 싶네요. 파이팅입니다.”

김민규는 주먹을 쥐고 양손을 하늘 높이 들었다.

“파이팅!”

나와 김민규는 눈인사를 주고받았고, 그는 고개를 한 번 더 꾸벅 숙인 뒤.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런 김민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저 배우… 잘됐으면 좋겠다.”

내 말에 김 실장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많이 본 배우야?”

“아니. 그건 아닌데, 나 쉬는 공간 있잖아. 그 옆에 단역 배우들이 쉬는 곳이 있더라고.”

“아, 어딘지 알아.”

나는 그때의 김민규를 떠올리며 고개를 잘게 끄덕이며 말했다.

“근데 항상 열심히 하더라. 뭐, 다른 배우들이 열심히 하지 않는 건 아닌데. 유독 김민규 배우가 뭐랄까… 열정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김 실장은 내 말이 공감된다는 듯 답했다.

“알지. 네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만 봐도, 저 배우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는지 알겠네. 나도 응원하게 된다, 김민규.”

우리는 멀어져 가는 김민규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저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

“오늘 우리 방에서 노는 거 어때?”

“오오- 좋지. 저번에 성진이네 방에서 논 후에 안 치우고 갔다고, 성진이한테 혼났어.”

김민규는 앞에 있는 박철민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맞아. 우리 안 치웠구나. 오늘은 성진이네 방 말고 우리 방으로 와.”

“오케이!”

박철민은 펜션으로 들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애들 데리고 바로 너희 방으로 갈게.”

“응, 세팅해둘게.”

김민규는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들려오는 노크 소리.

똑똑.

“무슨 노크야. 얼른 들어와.”

함께 노는 단역 배우인 박철민과 손성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성진은 김민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일 촬영인 사람?”

그의 말에 박철민과 김민규가 동시에 손을 들었다.

김민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성진에게 되물었다.

“근데 너도 있지 않아?”

“어, 맞아.”

“그래. 우리 내일 오전 일찍 단체 신 있잖아, 인마.”

그러자 김민규는 냉장고에서 술이 아닌, 커피를 꺼내며 자리에 앉았다.

“내일 다들 촬영 있으니까, 간단하게 커피나 한잔하자.”

박철민과 손성진은 김민규의 맞은편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 그래도 떨리는데, 숙취까지 있으면 진짜 고생이야.”

“어, 그래도 기분이라도 내게 짠! 할까?”

“좋지.”

그들은 커피에 빨대를 꽂아 위로 들어 올려 부딪쳤다.

챙-.

“건배.”

“다들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

그들은 커피를 술처럼 들이켜며 탄성을 내질렀다.

“크으, 오늘도 힘들었다.”

박철민의 말에 김민규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답했다.

“너 오늘 한 신 있었잖아.”

“민규야, 그 한 신이 얼마나 중요한 신인지 알기는 하니?”

그의 장난스러운 농담에 손성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철민이 오늘 신, 그냥 희성 선배님 옆에 지나가는 역할 아니었나?”

“항상 대사가 있다가 오늘만 없던 거야. 게다가 오늘은 눈빛 연기로 카메라에 한 신 가득 잡혔다고.”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커피를 들이켜는 그들.

손성진은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김민규를 향해 물었다.

“오늘 민규도 희성 선배님이랑 촬영 있지 않았어?”

그의 질문에 김민규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희번덕거리며 몸을 끌어당겼다.

“야, 말도 마. 오늘 진짜 대박이었어.”

김민규의 말에 그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에게 집중했다.

“왜, 뭔데 그래. 감독님한테 혼났냐?”

박철민의 말에 김민규는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아휴, 장난하냐?”

“아, 미안.”

“감독님한테 혼나는 건, 거의 매일 있는 일이지. 하하.”

김민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고.

“그래도 민규가 이제는 카메라 앞에서 좀 덜 떨잖아.”

“아니야. 나 오늘도 엄청나게 떨어서, 감독님이 꼴랑 있던 내 두 줄 대사도 없애 버리셨어.”

“헐, 정말?”

손성진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물었고.

“어, 물론 내가 너무 못하고, NG가 계속 나니까 그러신 거긴 해. 내가 봐도 너무하기는 했지.”

“그럼 대박이 뭔데?”

박철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그래서 내 대사가 다 사라진 거야.”

“그래서 너도 나처럼 표정 연기만 했어?”

박철민의 이야기에 김민규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 그래서 완전 좌절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탁!”

“마지막에 탁… 뭔데?”

긴장감을 조성하듯 말을 끊는 김민규에게 손성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희성 선배님이 나한테 갑자기 애드리브를 하시는 거야.”

“대박. 그래서?”

“그래서 나도 모르게 대답이 툭 터져 나왔고….”

김민규는 무용담을 펼치듯 진희성과 호흡을 맞췄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재연하며 한참 동안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김민규의 말이 끝나자, 박철민과 손성진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와아, 진짜 짱이다.”

“희성 선배님은 너한테 대사 하나라도 주시려고 한 거잖아.”

“어, 맞아. 그러셨대.”

박철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연신 손뼉을 부딪쳤다.

“진희성 선배님이 잘나가는 이유가 있었네. 인성 진짜 미쳤다. 어떻게 잘생기고, 연기도 잘하고 인기도 많은데, 인성까지 좋을 수가 있지?”

그의 말이 끝나자 손성진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사실… 나 김지빈 선배님이 인터뷰에서 희성 선배님 인기는 거품이네, 인성 파탄이네 하길래 진짜 성격 안 좋은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네.”

손성진의 말에 김민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전혀 아니지. 가식이라고 하기에는 우리가 벌써 오래 봤잖아. 그것도 촬영장에서 내내. 촬영장 갑질이네, 뭐네 하더니. 하나도 맞는 게 없어.”

“하긴, 그러네. 촬영장에서도 스태프들한테 엄청 친절하시던데?”

김민규는 자신의 턱을 찬찬히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쯤 되니까, 오히려 김지빈이 이상하지 않냐?”

그의 말에 박철민과 손성진이 공감하듯 머리를 흔들었다.

“나도 그 말에 한 표.”

“어, 나도!”

김민규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

“김지빈… 라이벌 의식 느끼는 거 아님? 그냥 질투 나니까, 깎아내리려고.”

“그럴 수도. 자기 자리에 위협을 느끼는 거지.”

박철민이 혀를 차며 말했다.

“어휴, 못났다, 못났어. 앞으로 난 희성 선배님 더 응원해야겠다!”

***

촬영이 끝난 후, 가는 곳이라고는 ‘호텔’ 딱 여기뿐이었다.

호텔에 있는 배우들은 나와 송유나, 그리고 나이가 한참 위이신 선배 배우 두 분.

송유나는 주말마다 서울 집을 왔다 갔다 하며 지냈고.

촬영이 계속 있는 평일,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은 뭘 하며 지내는지 그녀의 스케줄을 알지는 못했다.

그만큼 우리가 친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선배들은 나이가 연로하신 탓에, 촬영 외에는 늘 호텔 안에서 휴식을 취하신다고 했다.

다른 조연 배우나 단역 배우들은 자신들끼리 재미있게 놀며 시간을 보냈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내가 너무나 어려운 선배의 위치에 오른 듯 보였다.

“하아… 오늘은 뭘 하나.”

항상 대본을 보고 모니터링을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마저도 모두 마친 후에는 정신을 리프레시하기 위해 호텔 로비를 돌아다녔다.

호텔이 꽤 큰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칵테일 바와 사우나, 헬스장은 구비되어 있기에.

나는 칵테일 바로 향했다.

평소라면 못 왔을 테지만, 내일은 유일하게 촬영이 없는 날이었으니까.

몇십 분이 흘렀고.

칵테일 바에서 첫 번째 칵테일 잔을 비워가던 그때.

“어? 희성 씨.”

칵테일 바 문을 열던 송유나가 나를 보자 흠칫 놀란 얼굴로 내 이름을 불렀다.

“유나 씨?”

그러곤 자연스레 내 옆자리로 다가와 자리에 앉았고.

“희성 씨가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항상 방에만 있는 줄 알았던 그녀가 여기에, 그리고 내 옆에 와 있으니까.

“저는 내일 오프 날이라서, 가볍게 한잔하러 왔어요. 방에만 있기도 심심하고 해서. 유나 씨는요?”

“오오, 저두요. 내일 오전에 단역 배우들이랑 조연 배우들 단체 신 있다고, 저도 내일 오프라서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잘됐다, 그럼 같이 한잔할까요?”

“네, 뭐.”

평소 그녀라면 퉁명스럽게 자리를 옮겼겠지만.

그녀도 홀로 마시는 것보다는 말동무할 상대라도 필요했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앞에 주문한 칵테일이 나오고.

“근데 희성 씨, 대체 살은 어떻게 그렇게 찌웠어요?”

“아, 뭐 열심히 먹었죠. 하하.”

“빼는 것도 힘든 거긴 한데, 강제로 찌우는 것도 힘들잖아요.”

그녀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렇긴 했는데, 그래도 맡은 배역을 소화하려면 몸을 맞춰야 하잖아요.”

“와아, 힘들지는 않았어요?”

“조금요. 그래도 딱 역할에 맞아 보이죠?”

내 말에 송유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딱 배역에 잘 어울리는 푸근한 곰돌이 같기는 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희성 씨는 이번에 친분 있는 배우는 없나 봐요?”

나는 그녀의 질문에 놀라 눈을 연신 깜박였다.

질문의 내용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송유나가 내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말했던 적이 있나?

내게 이토록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나?

그리고 곧바로 확신할 수 있었다.

송유나가 내게 갑자기 관심이 생긴 것이 아니라, 촬영장이 남원이라 그녀가 할 일이 없어 심심했을 거라는 것.

나 또한 그랬으니까.

친분이 있는 배우도 없고, 친분을 쌓을 수도 없게 호텔에만 머무느라.

나 역시 심심함이 극에 달해, 호텔 이곳저곳을 항상 누비고 다녔는데.

무뚝뚝하고 차가운 송유나가 홀로 칵테일 바에 왔다는 건, 극도로 심심하기 때문이겠지.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무료함 속에 만나, 몇 시간 동안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연스레 친분이 쌓여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