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67)화 (167/303)

167화 #30 – 주연의 무게 (5)

“레디, 액션!”

홍 감독의 사인에 나는 빠르게 배역에 몰입했다.

부릅뜬 눈으로 힘을 준 채, 앞에 있는 송유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7호에 있던 환자, 누가 확인한 겁니까?”

내 말에 송유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송유나 옆에 있는 간호사 역할의 배우에게 화를 누르며 차분하게 물음을 던졌다.

“박 간호사, 7호에 있던 환자… 누가 확인한 거냐고 묻잖아요.”

“그… 그게….”

그녀는 불안한 듯 눈을 연신 깜빡이며 내 시선을 피했고.

나는 송유나의 팔을 낚아채며 카메라 옆쪽을 향해 걸어 나섰다.

“따라 나와요, 당장.”

송유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 내 손길에 이끌려 나왔고.

터덜터덜 카메라 밖으로 우리가 빠져나오자마자, 홍 감독이 소리쳤다.

“컷, NG!”

그의 말에 나와 송유나는 다시 카메라 앵글 안으로 걸어갔다.

홍 감독은 내가 아닌, 간호사 배역을 맡은 배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음… 거기서 그냥 말을 더듬는 게 아니라, 불안에 떠는 목소리도 나와야지.”

“아, 죄송합니다.”

“다시 가볼게요.”

그녀와 송유나, 그리고 나는 다시 빠르게 역할에 몰입했고.

“레디, 액션!”

홍 감독의 사인에 우리는 대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7호실에 있던 환자, 누가 확인한 겁니까?”

조금 전과 다름없이 연기는 이어졌고.

잠시 뒤,

“컷, NG!”

또다시 NG가 터져 나왔다.

이번에도 단역 배우인 간호사 배역의 실수였기에.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연신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하아….”

홍 감독은 머리를 헝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그런 홍 감독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감독님, 제가 여기서 대사를 칠 때, 차라리 박 간호사에게 화를 참지 말고 소리치는 건 어떨까요?”

내 말에 홍 감독이 대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그게 낫겠나?”

“어차피 곧바로 유나 씨 손목을 끌고 밖으로 나가는 건데, 여기서 박 간호사를 향해 화가 난 걸 바로 표출하고. 그래서 박 간호사가 벌벌 떠는 게 더 맞지 않을까 해서요.”

내 말에 홍 감독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가보자고.”

“알겠습니다.”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고.

홍 감독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이런 소소한 거나 애드리브 같은 건, 희성 씨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돼요. 뭐, 말투나 뉘앙스, 추가 대사도 얼마든지 마음대로 해도 되고.”

“아, 정말요?”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답했다.

“당연하지. 해보고, 거기서 기존에 정해졌던 느낌이 너무 달라진다, 싶으면 그때 내가 이야기해 주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바로 지난 작품에서 아주 사소한 애드리브, 표정 변화까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물론 대본에 나온 대로 하는 게 연기이기는 하지만.

대본을 읽고 내가 읽기 편하게, 그리고 내 생각에 맞는 표정과 말투를 구사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작품은 내가 연기를 하기에 훨씬 마음이 편안했다.

확실히 내 감정을 표출하며 연기하는 게, 내게는 더 맞는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내가 다시 카메라 앞으로 걸어가 표정을 취하자, 홍 감독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소리쳤다.

“레디, 액션!”

***

“컷, 오케이!”

홍 감독은 사인을 뱉음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부딪쳤다.

“이야, 이번 연기 좋았어.”

“감사합니다.”

나는 홍 감독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고.

그는 우리에게로 다가와 엄지를 치켜들었다.

“희성 씨는 말할 것도 없고, 유나 씨도 그렇고. 충민 씨랑 태준 씨도 아주 완벽했어.”

“하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촬영이었지만.

현장 분위기는 최상이었다.

쉬지 않고 이어진 촬영에 다들 지칠 법도 하건만, 그 누구도 지친 기색 없이.

그리고 연기 구멍 하나 없이 연달아 오케이가 터져 나왔다.

“아, 오늘 무슨 일이야? 하하.”

홍 감독이 옆에 있던 조감독을 향해 말하며 만족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요. 그래서 오늘 홍 감독님도 기분이 유독 더 좋아 보이십니다.”

“그런가? 이렇게 배우들이 잘 따라와 주니까, 감독이 신이 날 수밖에.”

화기애애한 현장 분위기.

“그럼 잠깐 쉬었다가 다음 신 들어가겠습니다.”

스태프의 외침에, 우리는 각자 휴식을 취하러 카메라 밖으로 빠져나왔고.

송유나는 자신의 매니저인 최 실장을 따라 곧장 차량으로 발길을 옮겼다.

“희성아, 차에서 쉴래?”

그때 기다리고 있던 김 실장이 내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차 안에 있으면 답답해서. 곧 촬영이기도 하니까, 그냥 밖에서 대기할게.”

“안 쉬어도 괜찮아?”

“저기 대기하는 곳에서 앉아 있으려고. 잠깐 휴식이니까, 형도 차에 가서 편히 쉬어.”

내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니야. 나도 같이 밖에서 쉴래. 거기 벤치로 갈 거지?”

항상 내가 밖에서 쉬는 자리였기에.

김 실장이 당연하다는 듯 턱짓으로 벤치를 가리켰고.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응, 같이 가자.”

그와 벤치로 걸어가는 길에 보이는 곳.

단역 배우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오늘도 자연스레 내 시선은 그쪽을 향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텅 빈 공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오늘 단역 배우분들 안 나왔어?”

내 말에 김 실장이 머리를 흔들며 답했다.

“아침 일찍 촬영하고, 뒤에 촬영 없어서 다들 들어갔어.”

“근데 평소에 다 같이 움직이지 않았나?”

“어, 그랬는데 오늘은 촬영 끝난 배우들끼리 낚시하러 갔어. 그래서 매니저 몇 명도 같이 갔다고 들었어.”

그의 말에 나는 입을 벌린 채 눈을 깜빡였다.

“아… 그래서 다들 안 계셨구나.”

“응, 몇 명은 낚시하러 가고. 몇 명은 숙소에 있거나, 나와서 연습한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이내 벤치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고.

나는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돌려 텅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사람.

첫 촬영 때 마주친 단역 배우 김민규였다.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첫 만남 때문만은 아니었다.

항상 떠들썩한 단역 배우들 무리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보고 있으면, 김민규는 늘 중심에서 배우들과 어울리며 상황을 주도하고 있었지.

촬영 중에 김민규와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이곳에서 그를 자주 보았기에, 익숙한 이름과 얼굴이었다.

그는 대본을 쥐고 난간에 기대어 입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본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고.

그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허공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대사를 읊조렸다.

“진짜 열심히 한다.”

내 말에 김 실장이 나를 따라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누가?”

“아, 저 단역 배우. 열심히 연습한다고.”

“아….”

김 실장은 그를 흘긋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옮겨왔다.

무슨 신이길래, 저렇게 열심히 하지?

나는 서둘러 대본을 뒤적였고.

머지않아 김민규의 대사를 찾을 수 있었다.

오늘 오후에 촬영할 신.

나와 함께 호흡을 맞추는 신이었다.

김민규의 대사는 달랑 두 줄이었지만, 그 두 줄이 저 시절에는 얼마나 소중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집중한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드디어 시작된 김민규와의 촬영.

눈여겨보고 있던 단역 배우였기에.

그와의 호흡에 기대를 하고 촬영장 앞으로 나섰다.

긴장한 듯 얼어 있는 그의 모습에 나는 온화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민규 씨, 긴장할 거 없어요. 하던 대로 편하게 해요.”

내 말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했다.

“어? 제 이름 기억하시는 겁니까?”

자신을 기억 못 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피식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김민규 씨잖아요. 아까도 열심히 연습하던데, 잘해봅시다.”

“네, 감사합니다.”

잠깐의 대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긴장감이 풀어진 모습.

그는 옅게 입꼬리를 올리며 깊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럼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예.”

우리는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바라보며 준비했고.

홍 감독은 미소를 띤 얼굴로 메가폰을 쥐고 소리쳤다.

“레디, 액션!”

그의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김민규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내가 말한 거 체크 다 했어?”

내 말에 김민규는 다시 잔뜩 긴장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아… 바이탈… 체크가….”

그는 결국 극도의 떨림을 이기지 못하고, 대사를 얼버무리고 말았다.

“컷, NG!”

홍 감독의 NG 사인에 그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나는 그의 팔을 쓸어내리며 읊조렸다.

“너무 떨지 말고, 차분하게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요.”

“…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바로 다시 갈까요?”

“예,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에 홍 감독은 여전히 미소를 보이며 외쳤다.

“레디, 액션!”

잠시 뒤.

“컷, NG!”

어느새 홍 감독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아니, 그 짧은 대사 가지고 벌써 7번 NG가 말이 돼?”

“…죄송합니다.”

김민규는 연신 허리를 접었고.

잔뜩 위축된 그의 모습에 나는 안타까움과 안쓰러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결코 어려운 대사가 아니었음에도.

경험이 부족하고, 잘하고 싶다는 부담감에 터져 나오는 어이없는 실수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김민규와 같은 시절을 겪었으니까.

나도 그때 눈물을 뺀 적이 엄청 많았지.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오르며, 화는커녕 그의 처진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민규 씨, 대본 다시 한번 읽고….”

그에게 위로를 건네던 그때.

홍 감독이 메가폰을 내려놓고 빠르게 내 앞으로 걸어왔다.

“아니, 이게 지금 몇 번째 NG야! 장난해?”

하루 내내 기분이 좋던 홍 감독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소리쳤고.

그의 말에 김민규는 고개를 푸욱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도 한두 번이지. 지금 이게 몇 번… 하아…. 이럴 거 없고.”

김민규를 향해 소리치던 홍 감독은 말을 끊어냈고.

뒤를 돌아 조감독을 향해 소리쳤다.

“야, 얘 대사 빼버려!”

그 순간.

김민규의 표정은 나라를 잃은 듯했고.

주변은 순식간에 싸하게 얼어붙었다.

짧은 대사조차 사라지고, 김민규는 대사가 없는 단역 배우.

그러니까 이미지 단역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렇게 되면 이후의 신에서도 홍 감독은 김민규에게 절대 대사를 주지 않을 것이다.

홍 감독이 내게 다가와 김민규의 대사 없이 가는 것을 설명했고.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상황에서 내가 홍 감독에게 김민규에게 다시 대사를 달라고 하는 건, 선을 넘는 행동이었으니까.

홍 감독은 자리로 돌아가 한숨을 내쉬며 외쳤다.

“레디, 액션!”

그의 사인과 함께 나는 대사를 이어나갔다.

“그럼 바이탈 체크하고, 내가 내준 숙제 똑바로 해서 다시 내 방으로 찾아와.”

내 대사가 끝나자, 김민규는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본상에 있던 대사는 여기가 끝이었다.

김민규의 대사가 사라진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김민규의 팔을 툭 치며, 애드리브를 던졌다.

“근데 너 머리는 감았냐? 어휴, 떡 진 거 봐라.”

내 말에 김민규의 눈빛이 흔들렸다.

애초에 대본에 없는 대사이니, 놀랄 수밖에.

동시에 허공에서 우리의 눈빛이 마주쳤고.

내가 할 수 있다는 무언의 눈빛을 보내자, 김민규가 곧바로 머리를 긁적였다.

“교수님, 머리 감을 시간에 잠자는 게 더 낫더라고요. 그래도 회진은 돌아야 하니까, 머리 감고 오겠습니다.”

실제 상황인 듯, 김민규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말을 내뱉었고.

나는 손으로 코앞을 휘이 저으며 말했다.

“그래, 아무리 인턴이라고 해도 인간적으로 우리, 냄새는 안 나게 하자.”

“네… 바로 머리 감고 회진 돌겠습니다.”

“컷, 오케이!”

이내 홍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외쳤다.

“그래, 진작 그렇게 연기했어야지!”

홍 감독은 흡족한 듯 입꼬리를 활짝 올렸고.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는 김민규를 향해 작게 읊조렸다.

“잘하네. 고생했어요.”

내 말에 김민규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고 허리를 깊게 접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그의 인사에 나는 미소로 화답한 뒤, 현장을 빠져나왔다.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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