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30 – 주연의 무게 (4)
드디어 다가온 첫 촬영 날.
밤새 달리는 차 안에서 잠을 청한 나는 떠오르는 해를 보며 기지개를 켰다.
“형, 피곤하지?”
내 말에 운전에 집중한 김 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운전하고 오는 거라, 나는 미리 잠자뒀지. 너는 눈 좀 붙였어?”
“응, 덕분에.”
김 실장이 룸 미러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의 다 왔어.”
“남원이 멀긴 머네.”
그는 내 말에 공감하며 답했다.
“응, 전라북도니까 멀긴 하다. 게다가 남원 끝 쪽에 위치한 곳이라 더 머네.”
나는 그의 말에 머리를 흔들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번 드라마 ‘닥터’의 촬영장은 전라북도 남원.
북남대학교의 병원이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폐병원이 되었고, 그 장소를 빌려 이번 드라마의 세트장이 된 것이지.
나는 달리는 창밖을 보며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이번 드라마는 비교적 여유롭게 촬영하겠다.”
“그렇지. 사전 제작이니까.”
이번 드라마는 촬영을 하면서 방영하는 것이 아닌, 사전 제작 드라마였다.
그래서 급하게 촬영하거나, 생방송처럼 촬영을 한 후 곧바로 편집해 TV에 송출하지 않아도 되는 것.
사전 제작이라 일반 드라마와는 다르게, A팀과 B팀 이런 식으로 나눠서 찍지 않았다.
영화처럼 홍 감독이 전부 도맡아 촬영하는 방식.
그래서 사전 제작 드라마는 보다 퀄리티가 높은 편이다.
물론 모든 드라마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팀을 나눠 여러 감독이 촬영하는 것보다, 한 감독이 전체를 디렉팅하기에 퀄리티가 일정한 편이지.
그렇게 몇십 분을 더 달리던 차는 촬영장에 멈춰 섰다.
“형, 고생했어.”
“고맙다. 내려서 인사드리자.”
“응.”
우리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고.
홍 감독과 스태프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어, 희성 씨 왔어요?”
홍 감독은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주변에 있던 배우들도 나를 향해 인사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폐병원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세팅.
방금 전까지도 이곳에서 환자와 의료진이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이야, 진짜 병원 같다….”
한쪽에서 촬영장을 보며 감탄을 쏟아내고 있는 배우.
한눈에 보아도 그가 단역 배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본 리딩에서 본 적 없는 얼굴.
그리고 이런 세트장을 하나하나 감탄하며 보는 것으로 보아, 그는 촬영장에 많이 와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예전 단역 배우 시절이 떠올랐고.
순간 그와 허공에서 눈빛이 마주쳤다.
“어?”
그는 놀란 눈빛으로 얼어붙었고.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김민규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그는 나와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고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넵.”
그때,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김민규에게 눈인사를 보내곤 서둘러 현장으로 향했다.
첫 촬영 날이라 몇 개의 신을 찍은 뒤.
“고생하셨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모두 모인 자리.
스태프는 숙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미 김 실장을 통해 숙소를 알고 있었다.
“여기 병원 근처에 펜션을 빌려 뒀으니까, 앞에서 방이랑 나눠 드릴게요.”
“네.”
조연 배우들과 단역 배우들은 스태프의 말에 합창하듯 소리쳤다.
그리고 그 스태프는 나와 송유나, 주조연급의 배우들에게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매니저님들 통해서 말씀드렸는데, 배우님들은 펜션이 아닌 근처 호텔로 잡아 뒀습니다. 들으셨죠?”
스태프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호텔로 이동하시면 거기에 스태프가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내일 촬영 일정은….”
우리는 펜션과 동떨어진 호텔이 숙소였다.
주연 배우와 주조연급의 배우들을 배려한 숙소였지.
저 멀리 우르르 걸어가는 단역 배우들.
그들을 보며 예전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나 역시도 저랬을 때가 있었으니까.
어느새 나는 소수의 무리가 되어, 펜션이 아닌 호텔로 발길을 옮겼다.
***
몇 주간 이어진 촬영.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에서 나와 김 실장과 함께 촬영장으로 향했다.
“희성아, 몸은 괜찮아?”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응, 이제 시작이잖아.”
그는 차에 올라타 말했다.
“오늘 촬영은 그래도 몇 신 없더라. 오후에 몇 개 찍고, 이른 저녁에 마무리될 거 같아.”
“어, 그래도 오늘 늦게 시작하는 거라 오랜만에 늦잠도 좀 자고 편했어.”
“그러니까, 다행이지. 내일의 촬영은 오전에 시작할 거야.”
“알겠어.”
나는 의자에 기대어 대본을 펼쳤다.
“형, 나 대본 좀 볼게.”
“그래.”
김 실장은 내 말에 음악 소리를 거의 끄다시피 줄이고, 운전에 집중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도착한 현장.
“안녕하십니까.”
현장은 촬영이 한창이었고.
내 인사에 한 스태프가 내게로 빠르게 달려와 말을 걸었다.
“희성 씨, 오셨어요?”
“네, 저 바로 준비하면 되나요?”
대본을 쥔 채 그에게 물었고, 스태프는 내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앞에 신이 좀 길어져서요.”
“아, 아직 많이 남았나요?”
배우의 기본 덕목 중 하나인 ‘대기’.
촬영장에서 배우가 제일 많이 하는 것은 연습보다 대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장에서는 항상 대기하고, 또 대기를 한다.
짜여 있는 스케줄대로 정시에 시작하고, 1시간 후에 다음 신을 시작하는 게 아니다.
첫 번째로 찍은 신이 오케이를 받아야 다음 신으로 넘어갈 수가 있지.
그런데 한 신에서 한 번에 오케이를 받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대사를 하다가 실수할 수도 있고, 감독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혹은 배우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NG가 나기도 하고.
그렇게 다시 촬영하면서 완벽한 신이 나올 때까지 촬영을 하다 보니.
끝나는 시간을 미리 정해둘 수가 없는 것이지.
그러다 보니, 예상 시작 시간은 있지만 그게 제대로 지켜지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평소 자신의 촬영 스케줄이 있는 날이면, 미리 현장에 도착해 대기를 한다.
언제 시작될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차례가 됐을 때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어야 하니까.
그래서 단역 시절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부터 현장에 도착해 있어야만 했다.
언제 촬영할 줄 몰랐으니까.
내 신이 있는 날이면, 몇 시간 전부터 현장에서 대기하고.
촬영이 끝난 후, 다음 신을 위해 무기한 대기에 들어갔지.
하지만 이제 나는 단역이 아닌, 주연의 포지션이었고.
이제는 촬영이 시작되는 예상 시간에 스태프의 연락을 받고 현장에 오고는 했다.
그런다 하더라도 대기를 안 할 수는 없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하루 내내 촬영장에서 머무를 필요가 없는 것이지.
스태프는 눈썹을 늘어뜨린 채 내게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해요. 앞에 NG가 너무 많이 나는 바람에….”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뭐, 배우가 기다리는 게 힘든 것도 아니고요.”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현장 상황을 보고 다시 시간 말씀드릴게요.”
“네.”
그는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고.
김 실장은 차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차에서 한숨 잘래?”
“아니. 푹 자고 와서, 그냥 밖에서 좀 대기할게.”
“그럴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장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간혹 이렇게 대기가 길어질 때면, 굳이 홀로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어차피 숙소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데, 현장에서도 차에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현장 한쪽에 배우들이 모여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에.
나는 어슬렁거리며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휘이이-.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갔고, 나는 바람을 쐬며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옆쪽에 모여 있는 단역 배우들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야, 우리 다음 신 하려면 4시간은 있어야 된다는데?”
“4시간이라고 했으면… 최소 5시간은 더 걸리겠다.”
그들은 휴대 전화로 시간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오늘 4시간은 뭐로 때우나….”
나 역시 단역 배우 시절이 있었기에, 그들의 한숨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땅히 대본 연습을 하기에는 대사가 없었고.
오롯이 홀로 쉴 수 있는 자신의 차도 없었지.
그렇다 보니 대기 시간에 할 수 있는 거라곤 동료 배우들과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그뿐이었다.
돈조차 여유롭지 않을 때였기에, 함께 돈을 모아 놀기도 했지.
“우리 볼링이나 치고 올래?”
“오오, 좋은데?”
그들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볼링을 치러 가자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내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지만, 귀는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여기 바로 앞쪽에 볼링장 있잖아.”
“맞아. 거기 가서 한 게임만 치고 오자.”
“같이 가실 분?”
그들은 주변에 있는 단역 배우들에게 물었고.
“나도 갈래!”
“헐, 나도.”
나는 그 모습을 곁눈질로 흘긋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
‘나도 저랬을 때가 있었는데….’
나 또한 현재 대기를 하며 이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지만, 저 많은 무리 중.
그 누구도 내게 다가와 볼링을 권유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제 내가 단역 배우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는 급이 달라진 것이지.
급을 나눠서 놀아야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주연인 내게 다가와 함께 시간을 때우러 볼링을 치자고 말하기가 어려워졌을 뿐.
힘들고 지친 촬영장에서 자신들끼리 하하 호호 웃으며 놀러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때 소소하게 재미있었는데… 조금 그립네.”
쓰읍, 소리를 내며 옆에 있는 대본을 집어 들었다.
오늘 촬영할 신의 대사에서 저들의 대사를 모두 합쳐도 내 한 신의 대사보다 짧을 터.
나는 저들과 함께 놀러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지.
일의 강도도, 그리고 배우로서의 거리감도.
***
“고생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다 같이 인사를 나눴고.
스태프들은 곧장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우들은 딱 두 무리로 나뉘었다.
나와 함께 호텔로 갈 주연, 조주연 배우들.
그리고 펜션에서 머무는 단역 배우들.
“야, 우리 오늘은 방별로 팀 먹고 게임할래?”
“하하, 좋지. 그럼 딱 4명씩 팀이지?”
“어, 우리 방은 5명이니까, 우리만 5명이서 팀 할게.”
그들은 펜션으로 돌아가는 길이 꽤 즐겁게만 느껴지는 듯했다.
하긴.
한 방에 4명, 5명씩 모여 지내면 여행을 온 것처럼 매일 떠들고 노느라 재미있지.
물론 일을 하기 위해 여기에 모였지만.
촬영 후에는 배우들과 함께 술도 한잔 기울이고, 노는 재미로 지내니까.
나는 저들을 바라보며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눈 뒤, 차에 올라탔고.
차는 금방 호텔 앞으로 도착했다.
주연급 배우가 된 이후, 이제는 어딜 가나 항상 최고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최고급 호텔, 홀로 쓰는 스위트룸.
시끌벅적한 곳이 아닌, 한적하고 조용하게 쉴 수 있는 곳.
카메라 앞에서 하루 내내 연기를 한 뒤, 이렇게 오롯이 나 혼자만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조금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빈 호텔 방으로 들어왔고.
“대본 연구나 해야지.”
넓은 이곳에 홀로 앉아, 내일 촬영할 대본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