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30 – 주연의 무게 (3)
드라마 ‘닥터’를 준비한 지도 벌써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연기 연습과 더불어 내가 해야 하는 준비는 ‘살’이었다.
30kg를 불려야 하는 어마어마한 과제가 주어졌고.
나는 그 목표 몸무게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밥 두 공기를 먹는 것은 물론이었고.
점심, 저녁은 물론이고 거기에 야식까지.
하루도 빼지 않고 살을 찌워갔다.
빼는 것보다 찌우는 게 쉬울 거라는 생각이었기에, 나는 행복하게 음식을 먹어 치웠다.
하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음식으로 계속해서 몸을 채우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원래 먹는 것에 대해 욕심이 크게 없는 스타일이었기에, 음식을 입에 달고 사는 데 힘듦을 겪었다.
하지만 매일 몸무게가 늘어가는 것을 체중계에서 볼 때.
그리고 거울로 내 몸이 불어나는 것을 알아차릴 때마다 느껴지는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한 뒤, 체중계 위로 조심스레 한쪽 발을 올렸다.
숫자는 정신없이 올라가고 있었고.
-92kg.
체중계 위에 최종으로 뜬 숫자를 확인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와아!”
기존의 내 몸무게는 72kg.
그리고 목표 몸무게는 95kg.
무려 20kg의 몸무게가 불었고, 이제 내가 목표한 몸무게까지는 3kg만이 남은 상황.
입꼬리를 올리고 서둘러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집에서 나와 차에 올라타자 김 실장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반겼다.
“희성아, 왔어? 몸이 조금 더 불은 것 같다?”
그의 말에 나는 뿌듯한 얼굴로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티 나?”
“어, 볼 때마다 신기하다. 살이 어쩜 그렇게 잘 붙냐.”
“하하, 형. 살찌우기가 얼마나 힘든데. 엄청난 노력으로 불린 거야.”
“대단하다, 진짜.”
김 실장은 감탄을 쏟아내며 핸들을 잡았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 오늘 점심은 제육볶음 집으로 가자.”
“그때 갔던 거기 말하는 거지?”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고.
“그래, 거기 맛있더라. 가까우니까 금방 갈 거야.”
김 실장은 서둘러 이동했다.
십여 분 만에 도착한 식당.
금방 나온 음식에 나와 김 실장은 정신없이 음식을 흡입했다.
그렇게 아무런 대화 없이 우리는 음식에 집중했고.
한순간.
김 실장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희성아.”
“응?”
“너 옛날에는 샤프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좀… 동글동글한 인상이다.”
그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어, 형. 나 목표까지 3kg 남았어.”
내 말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답했다.
“뭐야, 벌써 92kg야?”
“응, 대박이지?”
“와아, 어쩐지 이제는 느낌 자체가 확실히 변했다 싶었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다시 밥에 집중했고.
어느새 텅 비어버린 밥그릇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형, 이거 좀 부족한데, 공깃밥 하나 더 시킬까?”
“…….”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김 실장의 태도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근데 희성아, 너 나중에 살 뺄 때 진짜 힘들지 않겠어?”
드라마 이후를 걱정하는 김 실장의 말과 표정.
나는 그의 말에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형… 나, 진희성이야.”
그 한마디로 김 실장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내가 별걱정을 다 했다. 희성이 너는 뭐든 한다면 해냈으니까.”
“그럼 나 밥 더 시킬 건데, 형은?”
“나는 이거면 됐어.”
그의 말에 서둘러 추가로 음식을 주문했고.
김 실장은 손가락을 튕기며 내게 말했다.
“맞다. 우리 대본 리딩 날짜 잡혔어.”
“오오, 언제야?”
“다음 주에 할 거고, 그리고 라인업도 이제 다 정해졌어.”
그의 말에 나는 수저를 내려놓은 채, 김 실장에게 집중했다.
“라인업, 어떻게 되는데?”
김 실장 역시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우선 제일 중요한 거!”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반짝였고.
김 실장이 말을 이어갔다.
“상대 배역이… 송유나야.”
***
-94kg.
목표까지 마지막 1kg를 앞두고 있는 지금.
촬영 시작 전까지 목표 체중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다시 한번 더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대본 리딩 현장.
넓은 주차장에 차가 멈춰 섰고.
나는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차에서 내렸다.
“형, 나 먼저 올라가서 준비하고 있을게.”
“알겠어.”
차에서 내린 뒤, 서둘러 대본 리딩실을 향해 걸어갔고.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
나는 그 소리에 뒤를 돌았고, 그곳에는 송유나와 그녀의 스타일리스트, 매니저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송유나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발길을 멈춰 세웠다.
나의 상대 배역이자, 이미 친분이 있는 그녀였기에.
그녀임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리는 없었으니까.
“유나 씨!”
그녀를 부르자,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머리를 들었고.
“유나 씨,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송유나는 그저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얕게 숙였다.
그리고 서둘러 내 앞을 가로질러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
뭐지?
인사를 받고 싶을 때만 받아준다는 건가.
이제는 인사 정도는 받아줄 때도 되지 않았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앞을 향했다.
물론 송유나가 차갑다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이제 함께 드라마를 찍을 건데, 이런 인사를 보내는 그녀에게 서운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순간.
“어?”
내 앞을 지나쳐 걸어가던 송유나가 몇 걸음 가지 않아 발길을 멈춰 세웠다.
갑자기 멈칫한 그녀는 뒤를 돌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진희성 씨예요?”
그녀는 의심을 가득 품은 눈빛으로 내게 물었고.
나는 그녀의 물음에 눈썹을 들썩이며 머리를 흔들었다.
“네, 갑자기 그걸 왜….”
진희성이냐고 묻는 그녀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일 정도로 황당했고.
말끝을 흐리자, 그녀는 내게로 한 걸음 다가와 잔뜩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헐, 희성 씨 맞네. 대체 살이 왜 이렇게… 쪘어요?”
“아….”
진심으로 놀란 듯한 그녀의 얼굴.
조금 전 인사를 나눌 때, 내가 진희성이라는 걸 몰랐던 듯했다.
더군다나 이런 걸 물어보는 스타일이 아닌데, 그녀가 다시 걸음을 돌려 와 묻는 걸 보니 내가 정말 많이 찌긴 한 모양이었다.
입이 떡 벌어진 그녀의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제가 맡은 배역이 살집이 있어야….”
살을 찌운 이유를 설명했고.
그녀는 내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야 탄성을 내뱉었다.
“아, 맞네. 희성 씨 역할이 후덕한 인상이었지.”
“네, 그래서 감독님이랑 이야기해서 찌웠어요.”
그녀는 나를 쓰윽 훑어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근데 뺄 때 힘들 텐데….”
“괜찮아요. 그거 생각하면 찌울 수도 없었겠죠.”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다이어트할 때, 연락해요.”
***
대본 리딩실 근처에 도착한 송유나와 그녀의 스태프들.
스타일리스트는 송유나를 향해 작게 읊조렸다.
“언니, 근데 진희성 씨, 살 진짜 많이 찌우니까 완전 다른 사람 같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송유나는 관심 없다는 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송유나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스타일리스트는 멋쩍은 미소로 입을 열었다.
“언니, 저 잠깐 물건 좀 챙겨올게요.”
“알겠어. 빨리 다녀와.”
“네.”
스타일리스트가 자리를 비운 후.
송유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조금 전 만났던 진희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뭐야… 진희성 동글동글한데, 어떻게 이목구비는 그대로냐?”
진희성을 생각하던 송유나의 입가에는 사르르 미소가 번져왔다.
그리고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가린 채 작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좀… 귀여워진 것 같기도 하고?”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진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송유나는 서둘러 입가에 미소를 지운 채.
언제 진희성을 떠올렸냐는 듯 팔짱을 끼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
“이야, 희성 씨. 진짜 살 많이 찌웠네.”
홍 감독은 대본 리딩실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그렇습니까?”
“진짜 찌우기 힘들었겠다.”
“하하, 쉽지는 않았는데,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는 내 팔을 손으로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이제 더 안 찌워도 되겠는데?”
“딱 1kg만 더 찌우려고요.”
홍 감독은 흡족한 얼굴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짧은 기간에 이렇게 몸도 만들어오고, 역시 진희성 배우라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감독님.”
나는 홍 감독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고.
그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자, 그럼 우리 준비되면 바로 대본 리딩을 시작해 봅시다.”
“네.”
대본 리딩실에 있던 우리는 합창하듯 외쳤고.
각자 목을 가다듬거나 물을 마시며 대본 리딩 준비에 나섰다.
주연부터 순서대로 앉은 테이블.
나와 송유나는 나란히 앉아 대본의 첫 장을 넘겼고.
그렇게 우리는 각자 연습한 대로 연기를 시작했다.
“비키세요. 응급 환자입니다!”
내 첫 대사에 대본 리딩장은 언제 어수선했냐는 듯.
쥐 죽은 듯 조용해진 뒤, 모두가 내 연기에 집중했다.
“이 환자부터입니다. 아무리 VIP라고 해도 응급 환자부터 수술을….”
“아니요. 상황 똑바로 판단해요.”
이곳에 있는 배우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진지한 태도로 리딩을 이어갔다.
그렇게 몇 시간이 훌쩍 지난 후.
창밖에는 어둠이 내려앉았고.
우리는 힘찬 박수와 함께 마지막 대본 페이지를 넘겼다.
짝짝짝-.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대본 리딩에 지칠 법도 하지만, 나를 포함한 배우들은 밝은 미소로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홍 감독은 뿌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부딪쳤다.
“아, 너무 좋았어요. 이대로만 간다면, 우리 드라마 분명 대박 날 겁니다.”
“맞습니다.”
“촬영 때까지, 중간에 피드백했던 내용들을 체크해서 오시면 됩니다.”
“네.”
홍 감독이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우리 ‘닥터’ 힘내서 촬영해 봅시다!”
“파이팅!”
다시 한번 대본 리딩실에 끊이지 않는 박수와 함성 소리가 퍼졌고.
홍 감독은 우리를 쓰윽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대본 리딩하느라 고생도 했고, 앞으로 매일 보고 지낼 사이인데. 다 함께 회식하는 거 어떨까요?”
그의 시선은 나로 시작해 모든 배우를 한번 훑었고.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배우들이 말을 이어갔다.
“저도 가능합니다.”
“저두요.”
홍 감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 근처 식당으로 가죠.”
그의 말에 우리는 앞에 놓인 대본과 각자의 짐을 정리했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끝 쪽에 앉았던 조연 배우 조충민이 홍 감독을 향해 물었다.
“감독님, 저희 방영 일정도 나온 겁니까?”
그의 질문에 홍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게 사전 제작이니까, 대략 6월 정도에 방영 시작될 거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홍 감독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옆에 있던 조연 배우 장태준에게 말했다.
“6월이면 딱 좋다, 그렇지?”
그의 말에 장태준은 눈동자를 굴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 6월이면 그 작품이랑 겹치겠다.”
그들의 대화는 내 귓가에 또렷이 들려왔고.
나는 짐을 챙기며 장태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작품인데?”
조충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고.
장태준은 손가락을 뻗어 조충민에게 답했다.
“있잖아, 그 김지빈 주연으로 나온다는 드라마.”
“아… 김지빈 드라마도 6월 방영이래?”
“응, 확실히 기억하지!”
나를 저격했던 김지빈… 그와 마주쳤으면 했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될 줄이야.
나는 그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