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64)화 (164/303)

164화 #30 – 주연의 무게 (2)

“혹시… 얼마나 찌워야 하는 겁니까?”

사실 대본을 읽으면서도 내가 맡을 캐릭터의 체격에 대해 느끼기는 했다.

그 배역이 어느 정도 덩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꽤 마초적인 성격이라 호리호리한 몸집보다는 풍채가 있는 몸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현재 내 몸은 그 배역과는 정반대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배역을 상상하면서 그만큼 몸을 만들어야겠다고는 생각했지만 말이다.

다만, 문제는 얼마나 찌우느냐다.

홍 감독은 앉은 자리에서 나를 빠르게 스캔했다.

“음… 희성 씨 지금 키가 얼마죠?”

“저 183cm입니다.”

나는 그에게 몸을 보여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답했다.

“몸무게는요?”

“72kg이요.”

그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고.

나는 새삼스레 고개를 숙여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항상 78kg 정도를 유지하던 몸.

하지만 좀비물을 찍으며, 잘 먹지 못하고 날렵한 이미지를 보여야 했기에 68kg까지 뺐지.

그 이후 다시 평소대로 먹기 시작했지만, 다이어트를 하며 줄어든 배통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굳이 찌워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현재 72kg에 머물고 있는 몸무게.

홍 감독은 쓰읍, 소리를 내며 내게 말했다.

“이게 굉장히 후덕한 이미지여서….”

그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그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답했다.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얼마나 찌우면 될까요?”

“…최소 90kg은 찌워야 할 것 같아요.”

“최소라면…?”

홍 감독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그래도 100kg까지는 찌워줬으면 좋겠어요.”

그는 말을 한 후 내 반응을 살폈고.

나는 전혀 놀라거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무덤덤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근육도 필요할까요?”

내 말에 그는 안심하듯 잘근 깨물던 입술을 풀며 답했다.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근육이 없는 게 낫죠.”

“예,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박 작가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30kg 이상 체중을 불리는 게 쉬운 건 아니니까. 희성 씨도 한번 고민해 보시고….”

그녀의 걱정 어린 눈빛.

나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아니요. 한번 몸집을 키워 보겠습니다.”

“그래주면 저희야 고마운데, 이게 희성 씨에게 부탁드리기 어려운 거니까.”

홍 감독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 말했다.

“저도 ‘닥터’ 작품을 꼭 하고 싶습니다. 촬영 때까지 꼭 몸 만들어 오겠습니다.”

내 말에 그들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야 너무 좋죠. 희성 씨가 해준다고 할 때 좋았는데, 사실 체격 때문에 걱정이었거든요.”

그의 말에 박 감독도 공감하듯 입을 열었다.

“맞아요. 희성 씨가 주연 캐릭터에 맞춰준다면, 저희가 정말 감사하죠.”

“아닙니다. 배우가 원래 배역에 맞추는 거 아닙니까.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홍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우리 한번 잘해봅시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잘하고 왔어?”

내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김 실장은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럼.”

나는 그를 향해 밝은 미소를 보이며 답했고.

김 실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뭐래?”

“근데 형… 나 살찌워야 해.”

“진짜? 안 그래도 너 대본 보자마자 그 얘기 계속했잖아.”

처음 대본을 보고 김 실장과 내가 맡을 배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살집이 꽤 있는 역인 것 같아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였고.

그럼에도 나는 이 배역을 무조건 하고 싶다고 했지.

그때 김 실장은 내 말에 미팅할 때 조율해 보라고 조언했고.

결국, 나는 미팅 때 살을 찌우기로 합의를 보고 나왔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고.

답을 망설이자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답을 요구했다.

“뭐랬는데, 살 안 찌워도 된대?”

그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야, 살찌우기로 했어?”

나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고.

“야, 희성아. 그거 이야기하고 온다며.”

“근데 홍 감독님이랑 박 작가님도 그 배역은 꼭 살집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 역시 대본에서 본 캐릭터를 소화하려면 어쩔 수 없나 봐.”

내 말에 김 실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랬는데… 한다고 했어?”

“응, 나 이 드라마 꼭 하고 싶어.”

“그래도. 희성아, 할 수 있겠어?”

“그럼. 형도 대본 봤잖아. 내용도 좋고, 배역들이랑….”

김 실장이 내 말을 잘라내며 말했다.

“아니, 드라마 말고. 살찌우는 거 말이야.”

그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지. 살을 막 빼라는 것도 아니고, 찌우는 건데.”

“몇 kg 찌워야 하는데?”

이미 나를 걱정하고 있는 김 실장이기에, 최대한 조심스러운 말투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손가락 3개를 살짝 펴보였다.

“뭐… 30kg?”

김 실장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졌고.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조심히 끄덕였다.

“희성아…!”

나는 서둘러 양손을 뻗어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며 답했다.

“형, 무슨 걱정인지 아는데, 나 충분히 할 수 있어.”

“희성아, 살 빼는 거랑 찌우는 건 정말 다른 거야.”

“빼는 것보다는 쉬울 것 같은데. 할 만하지 않을까?”

내 말에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너 한 번도 살쪄본 적 없잖아.”

“…내가?”

그는 내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누군가에게 살쪘다, 통통하다, 라는 등의 말을 들어본 적도.

누가 봐도 살이 쪄보였던 적도 없다.

물론 이번 생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생은 단순히 내 앞에 있는 김 실장과 같은 사람들과는 다르다.

무려 1만 년의 삶, 천 번의 생을 살아왔는데.

그중에서만 꼽아도 살이 쪄본 적은 셀 수도 없었다.

비만이었던 적도, 과하게 말랐던 적 등 그 모든 경험을 다 해봤지.

그런데 촬영을 위해 30kg를 찌우는 것?

그건 내게 일도 아니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뚝딱 30kg가 불어날 수는 없었다.

모든 건 노력이 더해져야 하는 것이니까.

단, 내가 그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

자신이 있다.

전생에서 수없이 많은 고난과 경험을 해봤기에 부담이 없었다.

김 실장은 한껏 처진 눈으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너 좀비 찍을 때 기억 안 나?”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영화 촬영?”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어, 좀비 영화 찍는다고 힘들게 살 뺀 거, 그거 원상 복구도 못 했잖아.”

“에이, 그건 내가 굳이 몸무게를 원상 복구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가 내뱉는 잔소리는 살을 찌우는 것에 대해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내가 걱정되어 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근데 마음만 먹으면 금방 찌울 수 있어.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형.”

“아무리 그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지. 10kg 수준이 아니라, 지금 몸무게에서 30kg 찌우면 100kg가 넘잖아.”

“그렇긴 하지.”

그는 내 허벅지를 손으로 주무르며 말했다.

“잘못하면 튼살이 생길 수도 있어. 노출 신을 찍을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배우 몸에 튼살이 남으면 그렇지 않겠어?”

“형, 관리 잘하면서 찌우면 괜찮다고 했어.”

창과 방패의 싸움 같았다.

김 실장은 끝까지 내게 살을 찌우는 것을 막으려 애썼고.

그런 그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에, 순간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김 실장도 실소를 터트렸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던 우리.

나는 서둘러 웃음을 지워내며 진지한 얼굴로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살찌우는 것도 당연히 힘들게 노력해야겠지만, 무엇보다 나 정말 이 작품이 하고 싶어.”

내 말에 그는 입술을 말아 넣고 내 눈을 피했다.

“형… 알잖아. 나 좀 믿어주라.”

잠시 차 안에는 고요하게 정적이 흘렀고.

그는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너를 누가 말리겠냐.”

김 실장도 이제 나를 말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듯했다.

항상 내 설득에 못 이기는 척 넘어와 주는 그였으니까.

나는 그의 눈을 보고 밝게 웃었다.

“고마워, 형.”

내 인사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네 설득에 백기 들었다.”

“하하, 관리 잘하면서 해볼게.”

“그래. 이왕 하는 거, 너무 무리는 하지 말되 열심히 해보자. 도와줄게.”

“알겠어.”

김 실장은 그제야 몸을 돌려 운전대를 잡았고.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형, 우리 그럼 살찌우게 밥 먹으러 갈까?”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손을 더듬거리며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늘 그렇듯 인터넷과 SNS를 살폈고.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다. 빨리 밥부터 먹어야지.”

오늘은 스케줄이 없는 날.

이런 날은 늘 아침 일찍 일어나 헬스장으로 향하고는 했다.

다이어트 목적으로 운동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체력을 증진시키고,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헬스장에 출근 도장을 찍었지.

공복 유산소를 하기도 하고.

저녁에 시간이 날 땐 웨이트를 하며 몸을 다졌다.

하지만 어제 미팅을 다녀온 후, 곧장 트레이너에게 연락을 보냈다.

당분간 운동은 하지 않겠다고.

운동을 하며 살을 찌우는 것이 건강하게 찌울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맡을 배역은 근육질의 살집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푸근한 이미지의 의사였기에, 굳이 운동하며 찌울 필요는 없었던 것이지.

더군다나 체계적으로 살을 찌우면 나중에 오히려 빼기가 힘들 거라는 생각에.

나는 그저 식단만으로 목표 몸무게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집에서 음식을 챙겨 먹었던 적이 별로 없기에, 늘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배달 음식을 먹거나, 밖에서 김 실장을 만나 먹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말이다.

먹는 것에 그리 욕심이 없었던 나는 홀로 집에 있을 때면, 음식을 챙겨 먹는 편이 아니었다.

그저 과자 한 봉지로 식사를 때우거나 굶기도 했지.

하지만 살을 찌워야 했기에, 전날 고기와 쌀, 그리고 여러 음식들을 주문해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냉장고를 활짝 열었고.

그 안을 두리번거리며 음식을 집어 들었다.

몸매 유지를 위해 먹던 닭 가슴살.

단백질 위주의 식단에서 벗어나, 탄수화물 위주의 식단으로 바꿨고.

프라이팬 가득 삼겹살을 올려 구워냈다.

치이익-.

평소 아침을 먹지는 않았지만, 오늘부터 아침은 필수.

“지방도 좋기는 한데, 탄수화물이 살찌우는 데 최고지.”

삼겹살과 함께 먹을 밥.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을 국그릇에 가득 퍼 담았다.

십여 분이 흐른 뒤.

“아… 진짜 배부르다.”

밥그릇을 치우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룸에 있는 체중계로 향했고.

조심스레 발을 올렸다.

-72kg.

“뭐야, 아침을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1kg도 안 쪘다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체중계에서 내려왔고.

“그래, 오늘부터 시작한 거니까 차근차근 올려보자.”

그러고는 살짝 불안한 마음을 눌러내기 위해 주방 찬장에 마련해둔 간식 창고를 열었다.

그곳에 있는 초코가 가득 묻은 칼로리 바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목표는 95kg.”

나는 듬성듬성 차 있는 간식 창고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음식부터 좀 채워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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