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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62)화 (162/303)

162화 #29 – 내가 모르던 (5)

여행을 마친 뒤, 한국에 돌아와 쉰 시간은 단 하루였다.

시차 적응을 하기에는 하루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뉴욕에 다녀와 나는 연기에 대한 열정이 가기 전보다 더 타올랐고.

서둘러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싶어졌다.

결국, 단 하루를 쉰 뒤에 곧장 회사로 출근을 한 것이지.

김 실장은 오늘도 어김없이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고.

나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형!”

내가 한참 쉬고 있을 거라 생각한 김 실장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희성아 네가 왜 여기 있어?”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을 떡 벌리고 물었고.

“여행 끝났으니까, 이제 일해야지.”

내 말에 김 실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어제 아침에 온 거 아니야? 좀 쉬었다가 와도 괜찮은데.”

“에이, 빨리 일하고 싶어. 그리고 이건 선물.”

나는 그에게 쇼핑백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김 실장은 신이 난 얼굴로 쇼핑백 안을 살폈다.

“오오, 기념품 사온 거야?”

쇼핑백 안, 상자를 연 김 실장은 곧장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뭐야, 희성아… 이거 명품 지갑 아니야?”

눈썹을 들썩이며 미소 짓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나는 뉴욕에서 그냥 작은 거 말한 건데, 이건 너무 비싼 거잖아. 못 받아.”

“에이, 형 받아줘. 뉴욕에서 뭐 사올 만한 게 과자나 작은 것들밖에 없더라고. 뭐, 그런 것도 형 거 챙겨 왔으니까 줄게.”

“그럼 그것만 줘도 돼.”

나는 쇼핑백을 그의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도 받고, 이것도 받아. 나 혼자 너무 잘 쉬다가 와서 그래. 안 그래도 형 지갑 바꿀 때 된 것 같던데, 내가 선물해주고 싶었어.”

김 실장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고는 손으로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내게 답했다.

“…고마워. 잘 쓸게.”

그제야 김 실장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지갑을 구경하듯 뒤적였다.

“뭐야, 안에 돈 들어 있는데?”

김 실장의 물음에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원래 지갑 선물할 때, 돈 넣어서 주면 부자 된대. 내가 열심히 연기할 테니까, 우리 부자 한번 돼보자!”

그는 눈을 연신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 선물이 꽤 마음에 든 모양.

감동받은 얼굴로 말을 망설이더니, 이내 김 실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더 열심히 뛰어야겠다. 고마워.”

그리고 회의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회의실 가자, 안 그래도 너 뉴욕 가 있는 동안 좋은 작품 하나 챙겨뒀어.”

“오오, 얼른 보자.”

회의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김 실장이 건넨 대본을 펼쳤다.

“아직 제목이 없네?”

“응, 가제만 붙어 있어. 읽어봤는데, 난 괜찮더라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본 첫 장을 읽어 내려갔다.

대본을 읽는 내 눈과 넘기는 손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고, 순식간에 내용에 몰입했다.

아직 내가 한 번도 도전해본 적 없는 ‘의학 드라마’.

의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나에게는 그저 진입 장벽이 꽤 높은 장르였고.

쉽게 시도해볼 생각을 못 했지.

그런데 이 드라마는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흡입력이 상당했다.

결국 대본을 끝까지 읽지도 않은 채 고개를 들어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형, 이거 대본 장난 아닌데?”

“어, 나도 보자마자 이건 희성이 네 거다, 싶어서 바로 챙겨뒀어.”

내가 여행을 가 있는 동안에도 김 실장은 나를 위한 작품을 살펴보고, 엄선해 뒀다는 사실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거 신인 작가이긴 한데, 감독이 베테랑 감독이야.”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읊조렸다.

“이거 괜찮은데?”

***

웅성웅성.

소란스러운 분위기.

많은 사람이 주변에 가득했고,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시야 탓에 정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몇몇 사람들은 같은 옷, 그러니까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뭐지?

그때.

“원장님, 원장님?”

앞으로 다가온 사람이 내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며 외쳤고.

순간 뿌옇던 시야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나는 가빠오는 호흡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었고.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기는….

내 꿈속이라는 것을.

“원장님!”

간호사 유니폼을 입은 사람.

그러니까 이 병원의 간호사인 이현아가 내 팔을 흔들며 나를 급히 불렀다.

“아… 이 간호사.”

“원장님, 지금 바로 진료 들어가셔야 하는데, 왜 여기서 이렇게 계시는 거예요?”

“알겠어. 들어가자고.”

나는 하얀 의사 가운을 펄럭이며 진료실 안으로 바삐 들어갔다.

넓은 진료실 안.

내가 받은 많은 상과 자료들, 의학책들로 벽면을 가득 채운 모습.

나는 서둘러 자리에 앉았고.

이 간호사는 내게 차트를 읊기 시작했다.

“원장님, 다음 박한철 환자분이시고요. 지난주에 정밀 검사하셨던 분입니다.”

“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환자는 퀭한 얼굴로 내 앞에 앉았고.

나는 그에게 검사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환자분, 지난주에 정밀 검사하셨던 결과가 나왔어요. 몸은 괜찮으셨어요?”

그는 내 말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선생님, 저 심각한 거죠…?”

나는 차트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음… 환자분 결과를 보시면….”

환자의 검진 결과가 너무나 좋지 않았기에,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설명을 했고.

한참 이어진 설명 후에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는 옆에 있던 이 간호사를 향해 말했다.

“이 간호사, 방금 환자분 바로 입원 잡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차트를 넘긴 후, 내게 말을 이어갔다.

“원장님, 그리고 712호 오늘 NR 환자, adm 예정이라, bed marking해 두었습니다.”

“알겠어요. 이따가 가서 한번 볼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 문을 열었고.

순간.

팟-!

눈을 뜨자 진료실 앞이 아닌, 내 방 침실이었다.

나는 꿈에서 깨자마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고.

머릿속에서는 배운 적도, 읽어본 적도 없던 의학 용어들이 사전처럼 촤르르 펼쳐졌다.

의학 지식이 머리에 꽉 차버린 느낌.

“으윽.”

양손으로 머리를 누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떠오르는 꿈속의 내용.

저번에 꿨던 꿈과는 확연히 달랐다.

오늘은 의사인 시점.

단 하나의 시점만이 보였고,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는 단 한 장면도 펼쳐지지 않았지.

대체 왜 오늘은 다른 사람의 시점이 보이지 않는 거지?

그리고 나는 서둘러 서재로 향해, 며칠 전 김 실장에게 받았던 대본을 펼쳐들었다.

꿈에서 봤던 장면들, 머리에 박힌 의학 지식을 떠올리며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환자분, 검진 결과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앞으로 환자분에게 남은 날이 얼마 없어요.”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빠르게 배역에 몰입했고.

“수술을 해서 몇 달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느냐, 아니면 남은 시간을 바깥에서 보내느냐는 환자분의 선택에 있습니다.”

환자를 생각하며 대사를 내뱉은 후, 내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살짝 고였고.

그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겨우 참아내며 천천히 다음 대사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냥 연습하지 말고, 필사를 한번 해볼까?”

나는 서둘러 필사 노트를 꺼내, 대본을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내 필사 노트는 까만 글씨로 가득 찬 모습.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감정선과 다른 배역의 느낌까지 새롭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필사를 하기 전 연습했던 대사를 다시 읊어 내려갔다.

“환자분, 검진 결과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앞으로 환자분에게 남은 날이 얼마 없어요.”

나는 아까와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수술을 해서 몇 달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느냐, 아니면 남은 시간을 바깥에서 보내느냐는 환자분의 선택에 있습니다.”

그리고 느껴지는 찌릿한 감정.

아까와는 다른 내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눈물은커녕, 오히려 단호함이 묻어난 얼굴이었다.

시한부 선호가 슬프지 않아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환자를 위한 배려일 뿐.

내가 환자에게 이입해 함께 슬퍼하는 것보다 오히려 덤덤한 편이 그에게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다.

나는 다시 필사 노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이런 생각으로 대사를 쳤겠네….”

필사 노트에 만족감을 느낀 채, 나는 서둘러 다시 펜대를 잡았다.

“이번에는 다른 인물들까지 집중해서 필사를 한번 해봐야겠다.”

***

웅성거리는 사람들.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나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기가 꿈속이라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어제 꿨던 꿈과 같은 꿈이라는 것.

“원장님!”

나는 차트를 정리하다 말고, 다급히 가운을 입은 원장에게로 달려갔고.

멍하니 서 있는 원장의 눈앞에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다.

“원장님, 진료 들어가셔야 하는데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내 부름에 원장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이 간호사. 바로 진료 들어가지.”

“네, 저 차트 챙겨서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박 간호사에게 입을 열었다.

“뭐야, 오늘 원장님 왜 이렇게 멍 때리셔?”

박 간호사는 내 말에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다음 환자분, 검사 결과 나왔잖아. 근데 결과… 많이 안 좋은 것 같더라.”

“정말? 그 환자분 병원장님한테 오래도록 진료 받던 분이었지?”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얼른 원장님한테 들어가 볼게.”

“응, 고생해.”

나 역시 오래 본 환자였기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고.

안타까운 마음에 목이 메어왔다.

하지만 그 마음을 겨우 삼켜내며, 서둘러 진료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때.

알 수 없는 하얀 연기가 눈앞에 펼쳐졌고.

눈앞이 어지러이 빙글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빙글빙글 돌던 시야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멈췄고.

나는 숨을 몰아쉬며 앞을 바라보았다.

“환자분. 박한철 님?”

나를 부르는 의사의 목소리.

곧바로 알 수가 있었다.

이현아 간호사였던 나, 그리고 지금은 환자인 박한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앞에 앉은 의사는 나를 보며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아… 네.”

“검사 결과가 많이 안 좋아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린 걸 충분히 고민해 보시고, 결정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저 이제 길어야 3개월이라는 거죠?”

내 말에 의사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덤덤한 표정과 말투로 답했다.

“…네.”

오히려 슬퍼하지 않고, 평온한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나를 위로해주는 듯했다.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슬픔? 그런 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가 아프다는 진단이 아닌, 시한부를 받은 이 느낌은.

어쩌면 오히려 담담하기까지 했다.

3개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내 주변 사람들과 행복하게 보내며 생을 마감할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생을 이어나갈지 최대한 빨리 정해야 했으니까.

나는 한숨을 내뱉지 않고, 마음을 눌러내며 진료실 문을 벌컥 열었다.

팟-!

꿈에서 깬 나는 머리가 핑 돌듯 어지러웠다.

“이게 대체 무슨 꿈이야?”

분명 어제 꿨던 꿈에서의 의사.

그리고 지금 꿈에서는 그 의사 옆에 있던 간호사와 환자의 시점으로 유기적으로 돌아갔고.

그 덕에 그들의 심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드라마에서 맡을 배역은 의사이지만.

주변 인물들의 심리를 정확히 알고 연기한다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을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아닌, 다른 배역까지 필사를 한 덕분인가?

어제 내가 한 필사 노트를 떠올렸고, 어느새 내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왔다.

…지금까지 했던 연기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김 실장에게 곧바로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형, 나 그 작품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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