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29 – 내가 모르던 (4)
“혹시 오늘 극장에 오지 않으셨나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남성을 바라보았고.
그는 낮에 보았던 그 사람이었다.
연극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을 맡고 있었던 사람.
그리고 나는 주연을 포함해 총 5명의 배우 중, 그의 연기를 보기 위해 계속 방을 옮겼었지.
이 배우의 연기에 취해 연극 내내 그에게 집중했는데.
그가 지금 내 눈앞에서, 그것도 관객이었던 나를 알아보며 말을 걸었다.
물론 이 연극은 관객 수가 많지는 않았다.
소수의 관객이 비싼 티켓 값을 지불하고 보는 연극이었기 때문이지.
특히나 그 관객 중 5개의 방에서 이 배우의 방을 선택해 보는 것은 더 적은 확률이었다.
그럼에도 어두운 관객석에 있던 나를 발견하고 기억한다는 사실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답했다.
“맞으시죠? 오늘 공연에서 빵 훔쳤던 그 배역, 브라이언!”
그는 내 말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이렇게 만나네요.”
“그러니까요. 오늘 연극 너무 잘 봤습니다.”
“반가워요. 저는 브라이언이라고 해요.”
브라이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배역도, 실제 이름도 브라이언인가요?”
“네, 오늘 연극에서 배우 대부분의 이름은 실제 이름을 그대로 넣었어요.”
“와아, 그렇군요. 저는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그는 내 이름의 발음이 어려운지 천천히, 그리고 틀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했다.
“진…희…성?”
“예, 맞아요. 편하게 ‘진’이라고 불러줘요.”
“좋아요, 진. 오늘 공연 잘 봤다니까, 다행이에요.”
“다행은요. 정말 대단했어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진은 어디서 왔어요?”
“저는 한국에서 여행 왔어요.”
“오오, 저 한국 알아요. 예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거든요. 서울.”
나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놀러 와요. 한국에 좋은 곳 많으니까.”
“너무 좋았던 기억이 많아요. 한국 사람들은 다 친절하더라고요.”
“하하, 정이 많은 사람들이거든요.”
그와 나는 어느샌가 친구가 되어 자연스레 몸을 돌리고 술잔을 기울였다.
“근데 혼자 공연을 보러 온 것 같던데, 원래 이런 거에 관심이 있는 건가요?”
브라이언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사실, 저 한국에서 연기하는 사람이에요.”
“배우예요? 우와.”
그는 한층 더 밝아진 얼굴로 나를 반겼다.
동종 업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더욱 친밀감이 깊어졌지.
“네, 어릴 적부터 연기가 좋아서 시작했어요. 브라이언은요?”
그는 자세를 낮추고,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 놓기 시작했다.
“저는 어릴 적에 영화를 보고, 며칠 내내 그 영화의 꿈을 꾼 적이 있어요. 미칠 정도로 그 꿈만 꾸더라고요.”
“그 영화가 엄청나게 감명 깊었나 보네요.”
“맞아요. 그래서 며칠 후, 또 그 영화를 봤고. 이후에도 그 영화는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더라고요.”
그는 그 당시를 회상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그 영화뿐만이 아니었어요. 제게는 모든 영화, 드라마가 그러더라고요.”
브라이언은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켰고.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답했다.
“브라이언은 연기가 하고 싶었던 거네요. 정말 어렸을 그 시절부터.”
내 말에 그는 방긋 웃어보였다.
“연기를 하면 행복해요. 진도 그렇죠?”
그가 내게 물었고.
나는 그의 질문을 듣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도 연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치얼스.”
우리는 그렇게 술잔을 부딪쳤고.
한층 더 깊게 연기 이야기를 나누었다.
“브라이언은 드라마나 영화를 하지 않고, 연극을 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는 오디션에서 계속 탈락해 드라마나 영화를 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연기는 너무나도 완벽했으니까.
오죽하면 연극 내내 주연이 아닌 그만을 따라가 봤으니까.
브라이언이 연극의 주연이 아니었던 건,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었다.
성공한 커리어우먼의 스토리였기에, 여성 배우가 주연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브라이언의 연기는 흠잡을 곳이 단 하나도 없었다.
내 질문에 브라이언이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저는 카메라 앞에 서는 것보다, 관객들 앞에 서서 연기하는 게 더 좋더라고요. 실시간으로 내 연기를 봐주잖아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브라이언… 정말 멋있네요.”
“아닙니다.”
“진심이에요. 브라이언, 당신의 연기에 내내 감탄했어요. 마치 브라이언의 일상생활을 보는 듯할 정도로, 연기라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설마… 브라이언의 실제 이야기는 아니겠죠? 하하.”
브라이언의 역은 도둑이었다.
생계를 위해 음식과 옷 등 생필품을 훔치는 역.
내 말에 그는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하하, 당연히 아니죠. 제가 그럼 여기가 아니라, 감옥에 있겠죠?”
우리는 호탕하게 웃으며 술을 마셨고.
그는 쓰읍, 소리를 내며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단순히 경험하거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연기를 할 때만큼은 그 사람 자체가 되어야만 하죠.”
브라이언의 말에 나는 충분히 공감해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그렇게 연기를 해요. 내가 배역과 한 몸이 된 것처럼. 그래서 저는 연기가 끝난 후에도 몰입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하거든요.”
“맞아요. 하지만 저는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브라이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역과 내가 한 몸인 거, 그 이상이요?”
그를 본 이후로 브라이언은 가장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완벽한 연기를 하려면, 그 사람의 시점뿐만 아니라 모든 배역을 다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브라이언은 열변을 토하듯 말을 이어갔다.
“저는 대본을 보면, 그 대본을 전부 그대로 필사해 보면서 작품에서 주요 인물들, 내가 맡은 배역과 상호 작용이 있는 모든 배역이 어떤 생각으로 그 대사를 뱉었는지 공부해요.”
나는 감탄을 자아내며 답했다.
“나머지 모든 배역에 다 이입을 해보는군요. 대본을 전부 그대로 적으면서 곱씹는 거죠?”
“그렇죠. 필사를 하게 되면 빠르게 눈으로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르더라고요. 나머지 배역들도 어떠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그걸 한 번 더 정리하면 훨씬 좋아요.”
“그래야 비로소 100% 그 배경과 캐릭터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겠네요.”
내 말에 브라이언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완벽해요!”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맞는 것 같아.
브라이언의 말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고, 나 역시 그의 방식을 고수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또….”
그는 일 이야기에 신이 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한참 대화를 나눈 우리는 칵테일 바가 문을 닫을 때까지 함께했다.
“진, SNS 아이디 알려줄 수 있나요?”
“당연하죠.”
나는 그에게 내 SNS를 알려주었고.
검색을 해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쳤다.
“뭐야. 진, 당신 엄청나게 유명한 스타였잖아?”
“하하, 아니에요. 나도 팔로우하게 브라이언 SNS 알려줘요.”
“영광이네요.”
나는 그의 SNS를 보며 답했다.
“멀리에 있지만, 앞으로도 연락하고 지내요. 친구!”
“좋아요. 우리 하고 싶은 연기, 평생 하면서 살아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함께 연기해보고 싶어요.”
그렇게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마무리 지었다.
***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침대가 아닌 서재로 향했다.
짧은 뉴욕 여행이었지만,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그저 힐링을 하기 위해 떠났던 여행.
하지만 그 힐링 속에서, 나는 연기에 대한 갈망을 더욱 느끼고 깨닫게 되었다.
연기라는 게 단순히 그 배역이 어떤 심리로 대사를 뱉었는지.
그 캐릭터가 어떤 감정을 느꼈나만 알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꿈으로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는데.
이번 여행으로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 잠시 쉴 것도 없이, 서둘러 서재 책상에 놓인 대본을 하나 꺼내들었다.
내가 연기력으로 상을 받은 작품이자 가장 최근 연기를 했던 ‘블랙맨’.
이 배역에 대해서는 그 어떤 작품보다 많은 공부를 했다.
대타로 중간에 들어갔던 만큼, 그리고 부담감이 심했던 만큼.
엄청나게 노력을 쏟았던 작품 중 하나이지.
이미 블랙맨에서 내가 맡았던 배역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필사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한번 믿어보자, 라는 마음으로 대본을 펼쳤다.
그리고 빈 노트 하나를 꺼내, 대본 맨 첫 페이지부터 대사를 읽으며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필사를 시작한 지 꼬박 두 시간이 흘렀다.
“하아….”
뻣뻣하게 굳은 목과 등을 펴기 위해 펜을 내려놓았고.
몸을 뒤로 뻗어 스트레칭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릴 적 멍하니 오답 노트를 적던 깜지가 아니었기에.
온 신경을 집중해 적는 필사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 소비를 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글씨를 옮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
한 글자 한 글자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글씨를 쓰면서 배역의 상황, 말투, 분위기가 모두 머릿속에 떠올랐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뒤죽박죽 어지럽혔고.
그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창밖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아 대본을 덮었다.
대본이 아닌, 내가 적은 필사 노트를 눈을 부릅뜬 채 바라보았다.
“한번 읽어볼까? 흠흠.”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순식간에 몰입했고, 필사 노트를 양손으로 들고 얼굴 앞으로 가져다 댔다.
“그때 만약 내가 그곳에 없었다면… 우리가 이런 짓을 벌이지는 않았을까?”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허공을 주시했다.
“아니, 나는 그날… 그곳에, 나 홀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생각해. 너 역시도 나와 다르지 않아, 착각하지 마.”
순간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그 탓에 시야가 흐릿해져 왔다.
뭐지?
분명 그 당시에는 이 감정을 분노로 해석했다.
촬영 때 내가 지었던 표정은 지금 눈물이 고인 얼굴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지.
그런데 지금 배역에 대한 내 해석은 그 시절을 회상하며 느끼는 미련과 아쉬움이었다.
“지금 한 것처럼 연기했다면, 표현이 달랐을 텐데….”
그 당시에 연기를 잘못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분명 느끼는 건, 이렇게 필사를 한 뒤에 연기를 했다면.
그때보다는 조금 더 다채롭게 연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배경으로 나와 있는 심리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생각까지 품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브라이언이 내게 해준 조언.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필사를 해봤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내게 잘 맞는 연습 방법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대본도 한번 해볼까?”
필사를 하기 전과 후가 너무 다르다는 걸 깨달은 나는, 내가 연기했던 대본들을 모두 책상 위로 꺼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