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60)화 (160/303)

160화 #29 – 내가 모르던 (3)

작은 소극장.

극장 이름과 내 손에 들린 종이 속 장소를 대조해 보았다.

낮에 센트럴 파크에서 만났던 길거리 공연 속 배우.

그가 건넨 저녁 공연 팸플릿.

“여기다.”

같은 장소임을 확인한 뒤, 서둘러 극장 안으로 향했다.

센트럴 파크까지 와서 길거리 공연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연극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공원에서 무료로 공연했을 거라 생각한 것이지.

하지만 막상 공연장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낮에 공원에서 공연을 펼쳤던 모양이다.

서둘러 티켓을 구매했고.

티켓 어디에도 좌석 번호는 적혀 있지 않았다.

“이거 티켓에 제 자리는 안 적혀 있는데요?”

직원에게 티켓을 보여주며 묻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자유롭게 편한 곳에 앉으면 돼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내게 답을 보내고는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고.

“뉴욕은 자리까지 자유롭게 하네.”

티켓을 보며 읊조리고는 자리를 맡기 위해 공연장 안으로 입장했다.

좌석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꽉 찬다면, 꽤 많은 사람이 공연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팸플릿에 나오는 짧은 소개 글로 보면 가볍게 즐기는 코미디 연극인 것 같았고.

하지만 지금 어떤 장르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까 낮에 봤던 그 배우의 연기에 나는 충분히 매료되었기에.

그의 연기를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즉흥으로 뉴욕에서 연극을 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했다.

잠시 뒤, 입구의 문이 닫히며 불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하나 보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입을 닫았고.

나는 앞에서 두 번째 줄, 가운데에 앉아 반짝이는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팟-!

무대의 불이 켜지고, 낮에 보았던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며 한 명씩 무대로 올라왔다.

“우리 이렇게 인생을 즐기지 못하는 삶이 과연 맞다고 생각해?”

“음… 난 충분히 즐기고 있어, 에이든.”

배우들은 시작부터 자신의 배역에 몰입해 연기를 펼쳤다.

마치 연기하고 있는 그 모습들이 실제의 모습인 것처럼.

나는 어느새 그들에게 빠져들어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연극이 시작한 지 1시간이 지나갈 무렵.

“브라이언, 여기에 경찰이 숨어 있다는 게 사실이야?”

“뭐라고…?”

경찰에게 쫓기던 연기를 하던 그들은 바들바들 떠는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가 들었어. 경찰 한 놈이 숨어서 우리를 잡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하하, 경찰 한 놈? 그렇다면 우리는 두 명이니까 충분히 제압이 가능하겠는데?”

말을 내뱉은 브라이언이 복싱을 하듯 허공에 주먹을 번갈아 쳤고.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관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브라이언이 관객석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웃는 걸 보니… 이 중에 경찰이 숨어 있는 거 같은데?”

“맞아. 분명, 이 앞에 있을 거야. 브라이언, 네가 숨어 있는 경찰을 끌고 오는 게 어때.”

“알겠어. 내가 데려오지.”

브라이언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은 채, 관객석으로 내려왔다.

“하하.”

“꺄아.”

그가 관객석으로 내려오자,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고.

환호하며 그를 맞이하기도 했다.

브라이언, 그가 바로 내게 팸플릿을 건넨 배우였고.

너무나 실감 나는 코미디 연기에 나는 웃음을 보이며 그를 지켜보았다.

순간.

턱-!

“찾았다, 경찰…!”

웃고 있던 내 팔을 홱 가로채는 브라이언의 손.

“어?”

브라이언은 그대로 내 팔을 잡아끌었고.

“이 경찰, 아까 낮에 공원에서도 잠복 중이었다고. 내가 똑똑히 봤어!”

나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이 부분이 관객 참여형 연극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아아!”

사람들은 나를 보며 환호를 질렀다.

내가 누구인지, 한국의 배우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이 연극에 짧게 참여하게 된 일반인이기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환호였을 뿐.

브라이언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경찰인 척 연기를 하시면 돼요. 어떤 말이든 상관없어요. 저희가 알아서 받겠습니다.”

그는 베테랑 연극배우였다.

항상 짜인 대본 연기만 하던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도 흥미로웠고.

순간 온몸이 짜릿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와 같은 데시벨로 입을 열었다.

“네, 해볼게요.”

“결말은 저희가 도망가는 거니까, 뒤를 돌아 도망칠 때까지만 해주시면 됩니다. 얼버무리셔도 좋아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브라이언은 무대에 있던 배우를 향해 소리쳤다.

“내가 경찰을 잡았어. 역시나 한 놈만이 숨어 있더라고. 이제 어떻게 할까, 제니?”

나는 브라이언의 손에 이끌려 무대에 올라섰고, 무대에 발을 디디는 순간.

그의 팔을 뿌리치며 외쳤다.

“내가 혼자면, 네놈들을 못 잡을 줄 알고?”

서둘러 경찰이라는 배역에 몰입해 연기했고.

그들과 허공에서 눈빛이 마주쳤다.

그들은 내가 급히 펼친 연기에 깜짝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내 말에 다음 대사를 애드리브로 이어갔다.

“하아, 너 아무 무기도 없잖아. 맨몸으로 우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제니의 말이 끝나자, 나는 곧장 양손으로 깍지를 낀 채 검지를 폈다.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들을 저격했고.

관객석에서는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아… 안 돼. 쏘지 마!”

브라이언은 손으로 만든 내 총에 손사래를 치며 떨었고.

“세상을 살면서 범법 행위는 하면 안 되지. 아무리 인생을 즐기고 싶어도, 법은 지키면서 놀아.”

“그건… 인생에서 재미를 찾기 위해서….”

제니는 양손을 하늘 높이 들어 항복하는 자세를 취하며 떨었고.

나는 그들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범죄를 저지르면, 이렇게 잡히는 거야. 나 같은 경찰한테.”

그리고 나는 총을 쏘듯 손을 길게 뻗었다.

그러자 제니와 브라이언은 쏜살같이 무대 뒤로 도망쳤다.

“하하하하!”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그들의 모습과 갑자기 무대에 올라 펼친 내 연기에 관객석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최고다, 최고!”

그렇게 무대의 불이 탁탁 꺼지며, 다음 장면이 빠르게 준비되고 있었다.

몇십 분 뒤.

연극이 끝이 나고, 배우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인사를 보냈다.

짝짝-.

그들을 향한 박수가 끊이지 않았고, 브라이언은 나를 바라보며 일어나 달라는 듯 제스처를 보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브라이언이 내게 물었다.

“오늘 저희 연극의 1등 공신입니다. 박수 한번 보내주세요.”

그의 말에 관객들은 나를 바라보며 환호와 박수를 보냈고.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브라이언의 질문에 나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대한민국, 한국에서 왔어요.”

“오오, 저 한국 알아요. 뉴욕에서도 케이 팝 유명하다고요. 내가 아는 케이 팝 가수만 해도 손에 꼽을 수가 없다니까요?”

“하하, 감사해요.”

옆에 있던 제니는 나를 보며 손뼉을 부딪쳤다.

“저희 연극은 항상 관객분들과 소통을 하면서 연기하는데, 오늘 와주신 한국분이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 주셨어요.”

“그렇죠. 웃음이 터지는 게 아니라, 감탄이 쏟아졌다고요.”

브라이언은 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당신을 우리 연극단으로 스카우트합니다!”

그의 말에 다시 한번 공연장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 장난스러운 말투로 답을 보냈다.

“미안해요.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요. 거기서 바쁜 사람이거든요.”

“하하하.”

그렇게 내 연기는, 아니 그들의 연극은 성황리에 마무리를 지었다.

***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한국에 돌아간다면, 이제 다시 한국에 맞춰 시차 적응을 해야 할 정도.

완전히 뉴욕에 맞춰진 내 신체 리듬.

나는 이곳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 잔상처럼 남는 장면 하나.

바로 지난주 연극을 보러 갔을 때의 일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애드리브를 하고, 상대방은 그런 내 연기에 맞받아 애드리브를 보내던 연기.

그 연기에 내게 쏟아지던 환호와 박수갈채까지.

연극의 짜릿함에 빠져 계속 그 장면을 떠올렸고.

결국, 오늘 일정을 ‘연극’으로 모두 바꿔버렸다.

뉴욕에서 지내며 자주 마주친 호텔 직원이 추천을 해준 공연장이었다.

이곳은 일반 연극과는 차원이 다를 거라며 극찬을 보냈고.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곧장 공연장 티켓을 끊었다.

금액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너무나 다르게 비싼 금액이었고.

하지만 비싼 값을 할 거라 생각하며, 기분 좋게 금액을 지불했다.

그리고 티켓을 바라보자, 여기에도 좌석은 적혀 있지 않았다.

“여기도 티켓에 좌석이 없네? 그럼 나는 어디에 앉을까?”

미소를 지으며 입장한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뭐야?”

무려 5층짜리 공연장.

각층마다 한 개의 공연장이 있었고, 그러니까 즉 총 5개의 공연장이 있었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직원이 나와 같은 사람들을 모아 설명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공연장에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공연은 출연진이 총 30명 참여합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래서 비싼 티켓이었나?

“그리고 이들은 모두 각자의 서사가 있습니다. 1관에서 첫 번째 연극을 보신 후, 원하는 배우를 따라 2, 3, 4, 5관으로 이동하시면 그들의 서사를 이어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그녀는 밝게,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천천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1관에 남은 몇 명의 배우의 다음 이야기를 보시려면, 그대로 1관에 남으셔도 되죠. 30명의 배우 중, 원하는 극 중 배역의 이야기를 보실 수 있다는 겁니다.”

직원의 말에 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충격적이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연극.

“중간에 다른 관으로 넘어가셔도 되고, 보시는 건 관객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보시다가 다른 배우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그 배우가 있는 관으로 가시는 거죠.”

그녀는 이해가 됐냐고 묻는 듯 눈썹을 들썩였고.

내 옆에 있던 사람이 손을 들며 물었다.

“티켓에 좌석이 없던데, 그래서 없는 건가요?”

“맞습니다. 원하시는 관, 원하는 자리에 마음껏 착석하셔서 연극을 관람하시면 됩니다. 그럼 즐거운 관람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녀가 자리를 떠난 후.

스태프 한 명이 다가와 우리를 1관으로 안내했다.

“이건 말도 안 돼….”

너무나도 신선한 관람 방식이었다.

지금껏 항상 한 명의 주연.

주인공인 그의 이야기에 대해서만 궁금해했지, 그 외의 조연들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연극은 없었으니까.

이내 연극은 시작되었고.

나는 다음으로 어떤 배우의 이야기를 따라갈까, 생각하며 무대에 집중했다.

***

연극이 끝나고 난 후.

처음 보는 방식의 연극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채로 밤길을 거닐었다.

호텔에 들어왔지만, 좀처럼 기분 좋은 이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고.

결국 호텔 근처에 있는 조용한 칵테일 바로 향했다.

“오늘 같은 밤은 한잔하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지.”

홀로 온 칵테일 바였기에, 나는 테이블이 아닌 바에 자리를 잡았고.

칵테일을 받아 한 모금 마시던 그때.

“어?”

내 옆에 앉은 손님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혹시 오늘 극장에 오시지 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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