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29 - 내가 모르던 (2)
쏴아아.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오후의 뉴욕.
노란 택시 안에 몸을 실은 나는 달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맨해튼을 향해 갔다.
비가 오는 길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알록달록 우산을 쓰고 걷는 사람들.
적은 비였기에, 그냥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들.
모든 이들이 자유로워 보였고.
운치 있는 이곳에 내가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행복했다.
끼익-.
차는 어느새 예약한 호텔 앞에 멈춰 섰고.
“감사합니다.”
영어로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내뱉은 후, 차에서 짐을 꺼내 내렸다.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건물의 호텔.
한국에서 이 외관의 사진을 보자마자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이, 곧장 예약을 했다.
이보다 멋있는 곳은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호텔 앞에 서서 멍하니 건물을 바라보기를 몇 분.
이내 만족스러운 얼굴로 로비를 향해 걸었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로비에 서 있는 직원은 나를 향해 물었고.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체크인을 좀 하려고 하는데요.”
내 말에 그녀는 서류를 내밀었고.
나는 펜을 들고 서류의 빈칸을 채워갔다.
영어가 유창한 편은 아니었다.
여행을 위해 따로 학원이나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연기를 시작하며 봤던 미드.
그러니까 미국 드라마를 보며 연기를 연습했고.
그들의 감정 표현과 제스처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미국 드라마를 통해 연기 연습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영어가 귀에 익숙해져 왔지.
더 나아가 나중에는 자막 없이 미국 드라마를 보는 게 목표가 되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틈이 날 때마다 영어 단어를 하나둘씩 외웠다.
하루에 영어 단어 5개를 외우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눈을 떠서 하나, 점심 먹을 때쯤 또 하나.
그리고 쉬는 시간에 하나, 저녁에 하나.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하루에 영어 단어 5개쯤은 결코 힘든 일은 아니지.
단, 이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는 게.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이지.
하지만 그마저도 익숙해진다면, 오히려 영어 단어가 일상에 없는 것이 더 힘들 때도 있었다.
한 단어를 외울 때만큼은 잡생각이나 고민이 싸악 사라지기도 하니까.
그렇게 며칠, 몇 달,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면.
어느샌가 내가 외운 영어 단어는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아진다.
그러다 보면 미국 드라마를 보며 귀가 트이기 마련이지.
그리고 지금.
이제는 미국인 앞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 요청할 것들을 자연스레 내뱉고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네, 진희성 님 이름으로 예약 확인되셨습니다.”
금발 머리의 직원은 내게 호텔 카드키를 꺼내 건넸고.
한쪽에 밀려 있던 내 캐리어는 어느샌가 벨보이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영화에서나 보던 벨보이의 유니폼.
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직원이 내게 고갯짓을 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네.”
그를 따라가 오래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이 호텔은 신식 건물이 아니었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호텔이었지.
그래서인지 모든 것, 곳곳이 그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높은 층고를 보여주었던 로비에서는 세련됨이 아니라, 중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고.
엘리베이터 역시 깔끔하고 삐까번쩍한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긴 세월이 그대로 드러나듯, 오래된 미국 영화에서 볼 법한 느낌.
붉은색의 카펫이 깔린 바닥.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가 없는 거울 없는 엘리베이터.
손잡이 역시 금색이 칠해져 있지만 그마저도 사람들의 손을 타 곳곳에 색이 벗겨져 있었다.
그럼에도 이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이런 세월의 흔적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을 유지한 호텔이 여전히 인기가 있는 건.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뜻이니까.
당연히 관리는 잘 되어 호텔 룸의 상태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벨보이가 문을 열어 내게 방 안쪽으로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의 안내를 받아 룸 안으로 향했다.
뉴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야말로 ‘뉴욕 도심 뷰’.
“와아….”
나는 벨보이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감탄을 쏟아냈다.
그는 문 앞에서 내 짐을 든 채 기다리고 있었고.
“아, 맞다.”
나는 서둘러 주머니 속 지갑을 뒤적였다.
“고마워요. 여기.”
“오오, 감사합니다. 뉴욕에 온 것을 환영해요. 앞으로 행복한 뉴욕 여행 보내세요. 제가 행복을 응원할게요.”
내가 건넨 것을 받은 그는 커다래진 눈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렇게나 그가 기뻐하는 이유는, 내가 건넨 팁 때문이었다.
미국은 팁 문화가 굉장히 발달한 나라 중 하나다.
그래서 이렇게 짐을 가져다줄 때도.
식당에서 음식을 먹었을 때도 팁을 주는 건, 특이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지.
그런데 그 팁의 금액이 얼마인가가 중요하다.
지금처럼 짐을 가져다준 직원에게는 보통 1에서 2달러 정도.
물론 이것도 법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팁을 주는 사람의 마음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처럼 작은 캐리어 하나일 경우는 통상적으로 1, 2달러를 주는 게 무난한 편이라는 것이지.
하지만 나는 그에게 10달러를 건넸다.
환전하며 받아둔 잔돈, 1달러짜리도 지갑에 가득했지만.
여행의 시작인 첫날 마주친 직원에게 주는 첫 팁은 10달러를 주고 싶었다.
기분 좋게 떠나온 여행.
그리고 그 여행의 첫날, 내 짐을 가져다준 직원에게 쓰는 10달러쯤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는 내가 건넨 팁으로 행복했을 테고.
나 역시 그에게 받은 인사로 여행의 시작이 행복할 테니까.
캐리어를 한쪽에 펼쳐둔 채, 방을 살펴보았다.
혼자 온 여행이라 어마어마하게 큰 방을 잡지는 않았다.
홀로 호화롭게 여러 개의 방, 몇 개의 욕실.
서재가 딸린 룸은 내게는 그저 낭비였다.
그런 방이 내게 도움이 된다면 예약했겠지만, 모든 방을 누리지도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터.
그저 거실 하나와 침실, 그리고 넓은 욕실이 있는 이 룸으로 선택했고.
방을 돌아보자, 이곳으로 예약을 한 것에 다시 한번 만족감을 느꼈다.
“하아.”
나는 몸을 침대 위로 던졌고.
몸이 가라앉을 듯 푹신한 매트리스.
거기에 바스락거리지만 충분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고급 호텔 침구가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너무 좋잖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고, 환호를 지르고 싶을 만큼 행복했다.
“여행이란 이런 거지!”
집이 아닌 여행지에서 뒹구는 이 기분.
이제 내게는 아무런 걱정도, 스트레스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이곳에서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더 행복하게 놀 수 있을까, 라는 고민만을 할 뿐.
그렇게 누워 있다 나도 모르게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고.
자연스레 인터넷을 클릭해 내 이름을 검색했다.
오랜 습관이 되어버린 이 행동.
“아, 안 돼.”
정신을 차리며 급히 휴대 전화 화면을 꺼버렸다.
내게 달리는 선플도 많았지만, 악플도 당연히 나를 따라왔고.
거기서 받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내가, 이곳까지 와서 또 인터넷을 켜버렸다.
“여행하는 동안은 내 이름 검색도, 인터넷도 안 들어가야지.”
서둘러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고.
어느새 멈춘 비.
그리고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맑아진 하늘.
서둘러 간단하게 짐을 챙겨 호텔을 나섰다.
“어디부터 가볼까?”
***
호텔 근처로 나와 향한 곳은 뉴욕에서 유명한 스테이크 레스토랑이었다.
입구부터 유명하다는 포스를 풍기는 듯한 문.
내 몸에 몇 배는 될 정도로 커다란 문이 분위기를 장악했고.
문 앞에 서 있는 직원은 나를 반기며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이 분위기와 음식을 즐기고 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몇 명이 오셨을까요?”
그때 하얀 셔츠에 검은 보타이를 한 직원이 내게로 다가와 물었고.
“저 혼자입니다.”
“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는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안내했다.
테이블에 앉아, 유명하다는 스테이크와 와인 한 잔을 주문했고.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내 앞에 음식이 세팅되었다.
처음 테이블로 나를 안내했던 직원이 스테이크를 내 앞으로 보여주며 물었다.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어 드릴까요?”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간 고민했다.
굳이 스테이크랑 나랑 사진을?
하지만 이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여행 왔으니까 이런 것도 하는 거지.
그에게 휴대 전화를 내밀었고.
그는 진중한 표정으로 나와 스테이크, 그리고 이 분위기를 열심히 촬영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네, 스테이크 한번 버터로 적셔 드릴게요.”
직원은 수저를 이용해 녹인 뜨거운 버터를 잘린 스테이크 위로 적시듯 부었고.
그 버터의 온도에 스테이크는 다시 한번 더 맛있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 자태에 나는 자연스레 입이 벌어졌고.
입 안에는 침이 가득 고였다.
“와, 맛있겠다.”
“맛있게 드시고, 필요하신 거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감사합니다.”
그가 떠난 후, 나는 기다렸다는 듯 스테이크를 크게 찍어 입에 넣었다.
입 안 가득 터지는 육즙과 입속을 꽉 메우는 스테이크의 풍미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이게 스테이크지. 여기가 왜 세계에서 유명한지 알겠다.”
나는 서둘러 스테이크를 넘긴 뒤, 재차 앞에 놓인 고기를 잘라 다시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나는 오랜 시간 오롯이 식사를 즐겼다.
***
뉴욕과 한국의 13시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차 탓에, 저녁을 먹은 뒤 호텔에 오자마자 쓰러진 뒤 잠을 청했다.
그리고 느지막이 일어난 지금.
더 이상 지체할 것 없이 호텔을 나섰고.
센트럴 파크로 향하기 전, 근처에 있는 햄버거 집으로 향했다.
“간단하게 현지 햄버거나 먹고 가지, 뭐.”
뉴욕에 와서 늘 호화로운 식당만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미국 드라마에서 보던 집 근처 식당.
그리고 현지인들이 가득한 햄버거 집, 베이글 집 등.
그날그날 내키는 음식을 즐기고 싶었을 뿐.
아침 겸 점심을 햄버거로 채운 뒤.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 해, 터덜터덜 센트럴 파크로 향했다.
푸르른 나무들.
입구에는 가마를 끄는 말들이 있었고.
풀숲에는 다람쥐들까지 쉽게 찾아볼 수가 있었다.
차와 많은 사람이 가득한 이 뉴욕 도시 한복판에 있는 공원이라니.
그 자태에 감탄이 쏟아졌고.
나 역시 이들과 함께 센트럴 파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 손에는 나처럼 커피나 음료가 들려 있고, 함께 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산책을 하는 듯 보였다.
비록 뉴욕에 도착한 지는 이제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들과 함께 있으니, 나도 뉴요커가 된 느낌이랄까?
피식 웃음을 보이며 안쪽으로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
♪♬.
음악 소리와 함께 커다란 음성이 들려왔고.
나도 모르게 그 소리를 따라 바삐 발길을 움직였다.
센트럴 파크 안에 위치한 한 작은 공연장.
유료로 즐기는 커다란 공연장이 아닌, 길거리 공연 같은 느낌이었고.
많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이 공연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들의 공연을 조금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앞쪽으로 걸어가 맨 앞줄에 착석했고.
길거리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연기는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금세 그들의 연기에 몰입해 빠져 들어갔다.
몇십 분의 공연이 끝난 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손뼉을 세게 부딪쳤다.
길거리에서 무료로 보는 공연인데, 이렇게 좋은 퀄리티에 이런 연기를 보여줄 수가 있는 건가?
연신 박수를 보냈고.
그때, 내가 유심히 바라보던 그 배우가 나에게로 걸어왔다.
“재미있게 봐줘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최고의 공연이었어요.”
그는 내 말에 빙그레 웃으며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저희 오늘 저녁에 더 멋있는 공연을 할 예정이니까, 관심 있으면 보러 오세요.”
그리고 나는 그가 건넨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