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29 – 내가 모르던 (1)
팟-!
눈을 뜨자 보이는 하얀 천장.
아무 무늬도, 색도 없는 천장을 도화지 삼아, 방금 꿈에서 본 넓고 고요한 바다를 떠올렸다.
이내 흰 도화지 같던 천장은 파란 바다로 물드는 듯했고.
꿈에서 봤던 요트와 자유롭게 뛰놀던 사람들.
그 가운데 있던 내 모습까지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펼쳐진 그 모습들에 심장이 어떻게 뛰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기분은 뭐지?”
그 어떤 고민과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악플에 대한 스트레스.
수많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고.
차분하고 평온한 이 기분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나는 꿈에서 봤던 그 장면.
아니, 꿈에서 느꼈던 것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은 마음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어떠한 행위를 하지 않아도, 너무나 행복하고 평화로웠다.
몇십 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몸을 스르르 일으켰다.
“하아… 개운하다.”
오랜만에 자고 일어나서 느끼는 상쾌한 기분.
연신 미소를 지은 채, 침실에서 나와 욕실로 향했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내게는 다음 작품이나 광고, 프로그램이 중요한 게 아니라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 지금 또 작품 들어가면, 정말 작품에 매몰되고 말 거야….”
지금 내 입가에 지어진 이 미소가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물론 카메라 앞에서, 팬들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지었던 미소는 많았지.
하지만 홀로 있을 때, 나도 모르게 지어지는 행복감에 미소 지었던 게 언제였더라?
그리고 최서빈과 술자리를 가지며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치지 않게, 쉬엄쉬엄하라는 말.
전혀 와닿지 않은 말이었는데….
이제야 그의 말이 내 가슴 끝까지 와닿았고.
그 말을 절실히 깨달은 나는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희성아, 왔어?”
김 실장은 회사에 온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응, 형. 잠깐 회의실에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어?”
내 말에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당연하지. 안 그래도 회의실로 바로 가자고 하려 했지.”
그 역시 내게 할 말이 있던 모양이다.
회의실로 들어가자 테이블 위에는 대본들이 탑을 쌓은 듯 올라가 있었고.
그는 뿌듯한 얼굴로 내게 대본을 가리켰다.
“형, 이게 다 뭐야?”
“뭐긴. 네가 대본 보고 싶다고 해서 받아둔 거지. 저번에 말했던 사극은 아무래도 작감라인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자리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형, 나 할 말이 있는데.”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응, 말해. 원하는 작품이 있는 거야?”
김 실장은 앞에 놓인 대본을 펼치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네가 저번에 사극을 원하는 것 같길래, 이번에는 대부분 사극 쪽으로 골라뒀는데.”
“아니.”
단호한 내 말에 그는 대본을 고르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형, 나 좀 쉬고 싶어.”
그에게 말한 뒤, 나는 마른침을 삼켜냈다.
이 일을 시작하고.
그러니까 김 실장과 일을 함께한 뒤로 단 한 번도 김 실장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작품이 끝난 후, 나는 항상 그에게 대본을 요구했고.
다음 작품에 서둘러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지.
오히려 휴식을 권했던 건, 김 실장이었다.
내가 너무 쉼 없이 달린다고 걱정하던 김 실장이었지만, 늘 그렇듯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지.
뭐, 한 번씩 휴식을 취한 적도 있기는 했다.
본가에 다녀온다든지, 최서빈이 나 몰래 여행을 끊어 뒀다든지 등.
짧게 쉬었던 적은 있지.
그러나 이렇게 내가 먼저 휴식을 취하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한 건 처음이었기에.
김 실장은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모습에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쉬고 싶은데, 그래도 되나?”
아무리 내가 마음대로 하고 싶다고 한들.
개인의 몸이 아니라, WG 엔터에 소속된 몸이었기에.
쉬겠다는 통보가 아니라, 쉬어도 되는지에 대해 물어야 했고.
조심스레 그에게 질문을 던지자 이내 김 실장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사르르 번졌다.
“희성아, 잘 생각했다.”
“응?”
그의 반응에 놀란 건 오히려 나였다.
“쉬겠다고 해줘서 내가 더 고맙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 그렇게 쉬지도 않고 일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내가 항상 쉬라고 해도 일만 하고, 그러다 지치거나 아니면 몸 상할까 봐.”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미소 대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가까운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었다는 생각에 미안함도 번져왔다.
이내 굳은 표정을 풀며 그에게 물었다.
“근데 회사에서 나 쉬어도 된대?”
그는 걱정 없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답했다.
“당연히 되겠지. 내가 얘기해볼게. 너 한 번도 쉰 적 없으니까 가능할 거야. 게다가 최근에 작품 빵빵 터트렸는데, 안 될 게 어디 있어.”
“하하, 그래도 형.”
김 실장은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안 그래도 회사에서 너 안 쉬냐고 물어봤어. 내가 이야기해 볼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김 실장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뭐 하고 쉬려고. 계획은 세웠어?”
“아직.”
“뭐야, 쉬고 싶다더니. 그냥 집에서 쉬려는 건 아니지?”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내밀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쉬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어디로 떠날지, 뭘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저 쉬고 싶을 뿐.
내 표정을 보던 김 실장은 손가락을 펴고 제안하듯 말했다.
“힐링할 때는 여행만큼 좋은 게 없어. 집에서 쉬는 것도 좋은데, 오래 쉬면 무기력해지니까 말이야.”
그의 말이 맞았다.
집에만 있다면, 나는 얼마 가지 않아 결국 회사로 출근을 할 게 뻔했다.
“…여행 가야겠다.”
내 말에 김 실장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국내나 아시아권은 너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서, 혼자 여행하기 힘들 거야.”
“그러려나?”
“당연하지. 너 이미 유명해. 나 없이 혼자 여행 갔다가, 인파에 휩싸이면 그것도 골치 아파. 동남아 말고, 아예 멀리 여행 가는 건 어때?”
김 실장의 말에 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그럴까?”
***
지이잉.
[발신인: 김지훈 실장]
“여보세요.”
-어, 희성아. 일어났어?
“응, 좀 전에 일어났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너 쉬고 싶다며.
“그런데?”
김 실장이 밝은 목소리로 내게 희소식을 전했다.
-회사에 이야기했어. 여행 다녀와.
“정말?”
-응, 얼른 비행기 표부터 끊어.
“고마워, 형. 얼른 알아봐야겠다.”
-끊으면 어디 가는지, 얼마나 가는지 나한테도 알려줘.
“그럴게.”
-대신 가서 기념품 사다줘야 해!
“하하, 당연하지.”
김 실장과 전화를 끊은 후.
서둘러 비행기 표부터 알아보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출국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비행기 표와 숙소가 가장 중요했으니까.
앉아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재로 향했고.
서둘러 노트북을 열어 비행기 표를 구매했다.
“근데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갈지도 정하지 않은 여행.
“우선… 동남아는 제외하고, 이탈리아? 스위스?”
그 어떤 글도 찾아보지 않고, 세계 지도를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오는 하나의 나라.
‘미국’.
그중에서도 ‘뉴욕’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뉴욕, 항상 TV나 영화에서만 보던 곳이지, 내가 가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돈이나 시간을 떠나, 그저 내게는 꿈만 같은 곳이었다.
이제는 내가 마음을 먹으면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고.
그 떨림에 곧장 항공사 사이트에 들어가, 뉴욕행 비행기 표를 클릭했다.
몇십 분이 흐른 뒤.
“됐다!”
항공권 결제를 성공한 후, 완료 화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뉴욕행, 일등석.
“그래,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하고 나서 떠나는 여행인데. 이왕이면 좋은 좌석으로 끊어야지.”
일등석 티켓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올라갔고.
곧장 인터넷에 ‘뉴욕 호텔’을 검색했다.
“아무래도 잠자리는 중요하니까….”
뉴욕에서 호텔의 위치.
호텔 방의 크기, 침대, 화장실 등 하나씩 따져가며 방을 찾다보니.
어느새 호텔의 금액은 점점 올라가고 있었지만.
그와 비례하게 내 입꼬리도 점점 휘어지고 있었다.
“자주 떠나는 여행도 아니고, 나를 위한 여행이니까 이 정도 플렉스는 해도 되지 않겠어?”
마지막 결제 창으로 넘어가 호텔까지 모두 결제를 완료했다.
그리고 비자와 여행자 보험 등 자잘한 일들을 하나씩 준비해갔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렇게 뉴욕에 갈 준비를 모두 마쳤다.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이 정도 호화스러운 여행은 떠나야지.”
모든 준비를 끝낸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뉴욕으로 떠나기 위해 하늘에서 보낸 시간만 14시간.
하지만 이 시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비행기에서 내리기가 싫을 정도.
일등석에 앉아 여유롭게 즐기는 코스 요리와 침대만큼이나 편안한 매트리스까지.
비싼 항공권을 끊는 이유가 있었다.
여행의 시작은 그 나라 공항에 도착해서부터가 아니다.
한국에서 떠나는, 집 밖을 나오는 시간부터가 여행인 것이지.
그래서 나는 이 값비싼 돈을 주고 끊은 일등석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마저도 내게는 여행의 일부였으니까.
“하아… 너무 좋다.”
어느새 비행기는 뉴욕에 착륙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
북적거리는 사람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입국 심사대에는 시장통처럼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줄.
하지만 이 기다림은 내게 스트레스 요소는 아니었다.
이 줄마저도 내가 뉴욕에 왔음을 실감케 만들고 있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내 차례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짐까지 모두 찾은 후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공항 문을 여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뉴욕.
“흐음….”
코와 입을 모두 열어 뉴욕의 공기를 흡입했다.
투둑, 투둑 떨어지는 빗방울.
조금 흐린 날씨였지만, 입가엔 미소가 자꾸만 흘러나왔다.
흐르다 못해 뚝뚝 떨어질 정도.
“뉴욕이다!”
비가 내리는 뉴욕.
내 생각보다 더 낭만적이고 감성이 넘쳐흘렀다.
공항 앞에서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아무런 생각도 고민도 없이.
그저 비가 떨어지는 공항 앞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다음 계획을 하기 위해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까.
그게 바로 여행이지.
내 주변을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수십, 아니 수백 명의 사람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들 중에 나를 알아보거나 내게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낯선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배우가 되고 싶어 단역 배우를 할 때만 하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알아봐 줬으면.
내게 팬이라는 말을 해줬으면, 이라고 간절히 바랐지만.
이제는 이렇게 많은 인파 속에 있어도 나를 아무도 몰라주는 이 공간이 너무나 자유롭고 좋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나는 눈을 부릅뜨고 발길을 옮겼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
입술을 잘근 깨물고, 캐리어를 끌어당겼다.
“뉴욕…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