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57)화 (157/303)

157화 #28 – 1만 년의 벌(8)

챙-!

차디찬 소주가 식도를 타고 넘어갔고.

빈속이라 알코올이 내 온몸에 찌르르 퍼지는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키야, 술맛 좋다.”

최서빈은 입이 찢어져라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탁 내려놓았고.

나 역시 그를 따라 술잔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대박입니다.”

내 말에 최서빈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입술을 잘근 깨물며 술잔을 채웠다.

“거봐, 이번 작품은 내가 필이 팍 온다고 했잖아.”

“네, 그래서 제가 선배님 따라서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작품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하하.”

그는 뿌듯하다는 듯 눈썹을 들썩이며 내 잔에 소주를 부었고.

“이야, 어떻게 500만이 넘냐. 진짜 대박이다, 대박.”

영화 ‘장물아비’의 막이 내리고.

최종 스코어는 500만이 넘는, 무려 537만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다.

항상 좋은 결과를 낸 강 감독이었지만.

그가 찍었던 작품 중 가장 높은 기록을 낸 영화가 ‘장물아비’로 새롭게 기록되었지.

더불어 같은 소속사인 최서빈과 나, 그리고 김하나까지.

많은 이들의 걱정을 가뿐히 무너뜨리고 500만의 배우가 되었다.

WG 엔터의 박 대표는 이번 작품으로 인해, 다시 한번 엔터 계의 대기업임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대한민국에서 WG 엔터는 톱 급이었지만, 그 위상을 또 한 번 보여준 셈.

537만 작품의 주연 세 명이 모두 WG 엔터의 배우였으니까.

박 대표는 이번 영화로 인해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고 들었다.

“이번 영화가 우여곡절이 많기는 했는데…….”

영화 찍을 당시를 회상하며, 최서빈과 나는 술잔을 부딪쳤다.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 빈 소주병이 2병이나 쌓여갔다.

“희성이 너도 이제 몸값 더 뛰겠다.”

최서빈이 나를 향해 말하며 뿌듯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요? 다 선배님 덕분입니다.”

“내 덕분은. 다 네가 잘해서 그런 거지.”

“아휴, 아닙니다.”

그는 손가락을 튕기며 내게 말했다.

“맞다. 너 대사 난리 났더라?”

최서빈은 순식간에 얼굴에 느끼한 표정을 장착하고 나를 따라 하듯 대사를 읊었다.

“네 마음도 도둑질하고 싶다. 전부 내 거로 만들어 버리게. 하하.”

“아, 선배님!”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리쳤고.

우리는 웃음을 터트리며 행복을 만끽했다.

술을 한 잔 들이켠 후, 최서빈이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이제 뭐 하려고?”

영화 촬영이 끝난 지는 오래됐지만.

홍보와 시사회 무대 인사, 인터뷰 등 스케줄을 소화하며 아직 긴 휴식은 취하지 못했지.

“음… 아직 정한 건 없지만. 다음 작품 찾아봐야죠?”

내 말에 최서빈이 놀란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뭐? 안 쉬고 바로 또 일하려고?”

화들짝 놀라 묻는 그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당장 쉰다고 해서 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작품 좀 찾아보고,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하고 싶어요.”

“대단하다. 이러다가 배우 업계, 희성이 네가 다 쓸어버리는 거 아니야?”

“에이, 선배님 따라가려면 멀었습니다. 하하.”

최서빈은 내게 술을 따르며 조언을 건넸다.

“계속 일하는 것도 좋은데, 쉬엄쉬엄해. 쉼 없이 달리기만 하면 지칠 수도 있어. 우리가 10년하고 말 것도 아니고 20년, 30년 계속 연기를 할 거니까 말이야.”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닿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연기.

이번 생이 고작 9년 남았는데….

내게는 쉴 틈이 없었다.

길고 긴 1만 년의 삶.

그중 고작 9년이 남았기에, 그저 놀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배우로서의 나.

그리고 이전 과거의 나, 긴 세월 중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는 것 같다.

당연히 남은 9년 역시 뒤돌아보았을 때.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긴 세월 중 마지막일 테니까.

***

짝짝-.

김 실장은 회의실로 들어서는 나를 보며 손뼉을 연신 부딪쳤다.

“이야, 우리 500만 배우님 아니야? 하하.”

그의 말에 나는 민망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에이, 형. 그만해.”

내 말에도 김 실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왜, 500만 배우가 아무나 되는 건 줄 알아?”

김 실장이 말을 끝내자마자 나는 그에게 다가가 입꼬리를 올리며 읊조렸다.

“형, 537만이야. 끝자리도 다 붙여줘.”

“하하, 그래. 537만. 진짜 어마어마한 숫자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도 한참 관객 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답했다.

“내가 한 것 중에 제일 대박 난 영화가 ‘장물아비’야.”

“모르지. 앞으로 할 영화들은 600만, 1,000만이 될지도.”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마음이 가슴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실로 엄청난 관객 수를 기록한 영화였지만.

이번 작품에 100% 만족이 되지는 않았다.

찍는 내내 내가 작품을 한다기보다는, 그저 꼭두각시처럼 대본만을 읽고 강 감독의 디렉팅에 맞는 연기만을 했다고 느꼈으니까.

“형, 나 다음 작품은 조금 더 감독님이랑 소통이 되는 작품을 하고 싶어.”

부연 설명을 굳이 붙이지 않아도 김 실장은 단번에 알아듣는 듯했다.

나를 가장 가까이서, 오래 본 사람이 김 실장이었으니까.

“응, 강 감독님이 워낙 자기가 생각한 대로 작품을 뽑는 성향이 강하긴 하지. 근데 또 이렇게 항상 결과가 좋아 버리니까….”

“그건 맞지.”

“다음에는 작품도 좋고, 네가 의견도 충분히 피력할 수 있는 거로 선택하자.”

내 선택을 존중해주고 이해해주는 김 실장에게 고마움을 느낌과 동시에.

누구보다 든든한 편이 옆에 있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곧장 눈을 반짝이며 김 실장에게 말했다.

“형, 대본 좀 보자.”

그는 놀란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벌써 다음 작품 고르려고?”

“응, 대본 좀 보여줘.”

“이번 작품 잘 나왔는데, 좀 쉬었다가 해도 괜찮아.”

그의 말에도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우선 대본만 훑어볼게.”

내 성화에 김 실장은 못 이기겠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희성이 너를 누가 말리겠냐. 기다려봐, 대본 가져올게.”

“하하, 고마워, 형.”

김 실장이 회의실을 빠져나간 후.

나는 빈 회의실에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휴대 전화를 열었다.

영화는 막이 내렸지만, 여전히 영화 ‘장물아비’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고 있었다.

올해의 영화.

올해의 유행어 등 핫한 키워드에 늘 올라가 있으니까.

인터넷에 ‘진희성’ 내 이름을 검색해 새로운 기사가 있는지, 나에 대한 글들을 확인했다.

-장물아비 이번에 3번 봤는데 또 보고 싶다.

└오오, 나는 4번 봄ㅋㅋ. 진희성 연기 미쳤음.

-진희성 명대사 날릴 때, 그 아련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 꿈에 나와줘, 제발ㅠㅠ.

-최서빈이랑 진희성 조합이면 말 다 했지.

└인정. 둘이 맨날 같이 연기해주라.

└둘이 같은 소속사니까, 다음 작품도 같이하지 않을까?

└최서빈X진희성 커플 응원합니다!

나는 댓글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고.

스크롤을 내려 다른 댓글을 보던 그때.

얼굴에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근데 진희성 이번 연기 좀 이상하지 않았음? 뭐랄까… 항상 빨아들이는 듯한 마력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없는 듯한….

-소속사에서 진희성이랑 김하나 끼워 넣고 싶어서, 최서빈 주연으로 넣은 거 아님?

└맞네. 셋 다 WG 엔터 소속임.

└과연 진희성이 단독 주연이어도 영화가 잘됐을까?

-진희성 인기 거품이라던데?

-진희성 어느 순간 갑자기 떴는데, 소속사에서 밀어주는 거임?

-솔직히 장물아비 500만 넘은 거 노이해ㅋㅋ. 회사에서 표 사들인 거 아니냐?

악플….

선플이 많은 만큼, 악플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여전히 이 악플들이 적응이 되지는 않았다.

악플에 일일이 대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그저 내가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연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거품이네, 소속사에서 밀어주네, 라는 식의 말을 잠재우는 건.

내 연기로 증명하는 거,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때.

“희성아, 여기.”

김 실장이 대본을 한 아름 안고 회의실로 들어섰고.

나는 곧장 그가 내민 대본을 받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기는 드라마 대본이고, 이쪽은 영화.”

김 실장은 내 맞은편에 앉아 함께 대본을 펼쳤다.

그렇게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대본에 집중했고.

“형, 이거 봤어?”

나는 김 실장에게 대본을 내밀며 말했다.

“응, 나도 봤는데, 괜찮더라.”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대본을 펼쳤다.

“이거 괜찮은 거 같아. 조금 투박하긴 한데, 내용이 신선해.”

김 실장은 내 말에 입을 모아 벌렸고.

대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이거 감독이랑 작가가 다 신인이야.”

신인 감독과 신인 작가가 작품을 내도 충분히 성공할 수도 있지만.

아직 경험이 없기에 대박이 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김 실장에게 답했다.

“그래도 대본은 조금만 만지면 엄청나게 괜찮아질 것 같은데?”

그는 대본을 한 장씩 넘기며 읊조렸다.

“응, 대본이 좋긴 해. 이번 작품은 사극이라….”

***

시끌벅적하지 않은 고요한 이곳.

에메랄드빛의 잔잔한 바다가 눈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각기 다른 국적을 지닌 많은 이들은 서로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각자 여유를 즐기기 바빴고.

작게 일렁이는 바람은 내 뺨을 기분 좋게 스쳐 지나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잔잔한 음악.

‘행복’.

이 단어 하나로 내 마음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눈을 지그시 감고 입꼬리를 올리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잠깐….

뭐야.

여기 꿈속이잖아?

얼마나 높은지 감도 안 잡히는 맑은 파란색의 하늘.

선베드에 누워 팔로 머리를 받치고, 햇볕이 쨍하게 내리쬐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야, 너무 좋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고민도, 걱정도, 신경을 쓸 일도 없었다.

이 넓은 바다와 하늘, 고요한 이곳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너무나 행복했다.

“이게 행복이지….”

수많은 사람이 주변에 있지만.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 만에 느끼는 여유로움인지.

그렇게 몇 시간을 가만히 누워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에 떠 있는 하얀 요트에 올라탔다.

새하얀 요트와 자유롭게 바람에 펄럭이는 하얀 천.

내 손에는 찰랑이는 칵테일 잔이 쥐어져 있었고.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켜며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좋다.”

최대한 눈을 감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바람이 불어와도 부릅뜬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았지.

혹시나 눈을 질끈 감아 이 천국 같은 곳에서 잠이 깰세라, 걱정이 될 정도.

이 순간을 고스란히 즐기기 위해 나는 귓가에 흐르는 음악에 몸을 맡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