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28 – 1만 년의 벌(5)
“너… 아쉬운 거 있지?”
최서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뭐지, 내 속마음을 그대로 읽은 것도 아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게다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첫 촬영 이후론 전혀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내 놀란 얼굴을 본 최서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말해봐. 뭐가 아쉬운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당황스러운 얼굴로 묻자, 그는 내 어깨에 올리고 있던 손을 목까지 끌어당겨 안으며 말했다.
“내가 너랑 작품 처음 찍냐?”
“예?”
“이제는 네가 어떤 표정을 지어도 딱 알아. 게다가 연기할 때 네 눈빛이나 말투만 들어도 알 수 있어.”
최서빈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내 아쉬움이 연기에 드러났던 걸까?
연기와 이후 내 감정은 별개인데, 그게 티가 났다는 생각에 너무나 당황했지만.
최서빈은 내 어깨를 툭 치며 재차 입을 열었다.
“농담이고. 그냥 항상 딱 컷 사인이 난 뒤에 표정이 안 좋길래.”
“아… 저는 또. 정말 연기에 드러난 줄 알고 놀랐습니다.”
“에이, 네가 그 정도로 티를 내지는 않지. 하하.”
최서빈과 나는 차량 쪽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아쉬운 점이 뭐야, 애드리브 때문이지?”
역시나.
내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리는 최서빈, 그를 향해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그날 처음 촬영 대본 말고도 그래?”
그의 말에 나는 주변을 살펴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모든 장면이 그런 게 아니라, 가끔 그런 신이 있거든요.”
“맞아. 그럴 때가 있지.”
최서빈이 맞장구를 치며 내 말에 공감을 보였고.
“작품이 안 좋다거나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아까 그 장면에서도 마지막에 저희가 한마디를 더 붙여서….”
최서빈에게 내가 원하는 애드리브.
조금 더 나은 대사들을 설득하듯 내뱉기 시작했고.
내 말에 최서빈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래서 더 나은 방향이 있을 것 같은데, 아예 감독님께서 트라이조차 못 하게 하시니까 그게 아쉬운 거죠.”
“응, 강 감독님이 들어 보시지도 않으니까.”
“네, 그렇다고 제가 무작정 애드리브를 치면 분위기가 흐려지잖아요.”
최서빈은 눈썹을 늘어뜨린 채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지. 감독님이 거절한 상태에서 애드리브를 치면, 그거는 감독의 권위를 무시하는 뜻이잖냐.”
“하아….”
나는 저 멀리에 있는 강 감독을 보며 아쉬움을 가득 담은 숨을 내쉬었고.
최서빈은 곰곰이 머리를 굴리며 내게 말했다.
“그럼 단순히 애드리브라는 말 대신에, 건의를 해보는 건 어때?”
“어떻게요?”
그는 걷던 걸음을 멈춰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이런 대사는 이렇게 애드리브 해봐도 될까요? 라고 하지 말고.”
최서빈은 손가락을 뻗어 강 감독에게 말하는 재연을 펼치며 말을 이어갔다.
“이런 식으로 변형해서 한번 대사해 봐도 될까요? 이렇게 말해보는 건 어때?”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은 제안이었지만.
그 말에서 ‘애드리브’라는 단어만 빠졌을 뿐.
그게 과연 강 감독에게 먹힐까, 라는 의문이었지.
“가능할까요?”
내 물음에 최서빈이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옆에서 맞장구를 쳐볼게.”
“오오, 정말요?”
“응.”
나는 최서빈의 팔에 내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러자 최서빈은 새침한 표정으로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가며 툭 말을 내뱉었다.
“물론, 나한테도 마음에 들면 말이야.”
***
최서빈과 이야기를 나눈 뒤.
몇 차례의 촬영을 이어갔고, 한참 동안 애드리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신은 없었다.
모든 신이 아쉬운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며칠을 촬영에 몰두하던 중.
“다음 신 준비하실게요.”
스태프가 내게로 다가와 촬영 안내를 했고.
나는 서둘러 대본을 확인했다.
다음 촬영할 것은 미리 대본에 몇 차례 체크를 해둔 신이었다.
대본에서 가장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장면이었지.
캐릭터의 특징이 도드라진 이번 영화에서.
그들의 특성을 강하게 나타낼 수 있는 장면인데, 마지막 대사에서 그것들을 뚝 끊어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대본의 마지막 대사 뒤에 빨간 펜으로 내 생각들을 한 줄 적어뒀다.
이번에야말로, 강 감독에게 건의를 해볼 타이밍이다.
대본을 손에 꼭 쥔 채 현장으로 향했고.
현장에는 최서빈이 대사를 복기하며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강 감독은 디렉팅을 하기 위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이번 신은 중요하니까, 서빈 씨 떨어지는 연기할 때 표정 주의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난간에서 떨어질 때 웃고 있지만, 눈물은 한 방울 정도 흘려줘야 해. 알지?”
강 감독의 말에 최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정을 잡았고.
이내 강 감독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희성 씨는 여기서 어쩔 수 없이 최서빈의 손을 놓는 장면이잖아. 같은 팀이지만 희성 씨가 살기 위해 놓는 거니까, 최대한 애절하고 미안한 마음이 드러나는 표정.”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감독님.”
“응, 말해.”
“이 장면이 중요한 부분이라 많이 읽어보고 캐릭터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고.
“아무리 건물 아래에 적들이 있는 상황이더라도. 제가 맡은 캐릭터라면, 한 번쯤은 서빈 선배의 손을 다시 꽉 잡았을 것 같아서요.”
내 말에 강 감독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고.
용기를 내서 말을 시작했기에, 서둘러 내 의견을 어필했다.
“그래서 놓으려다가 다시 한번 꽉 손을 쥐고,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놓는 건 어떨까요? 그게 더 내 의지가 아니라는 마음을 어필하는 장면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
강 감독은 쓰읍, 소리를 내며 대답하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본 최서빈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오오, 저는 좋은 것 같은데요?”
최서빈의 말에 강 감독이 고개를 돌렸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견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그냥 손을 툭 놓으면 희성이가 저를 진짜로 버렸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해요.”
최서빈은 강 감독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손을 놓기 전에 다시 한번 손을 잡는 제스처를 보여주는 거. 그래야 무슨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들게 만드는 것 같고요. 희성이 의견, 저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최서빈의 말이 끝나자 강 감독이 어깨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몇 초의 정적이 흘렀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 감독의 모션에 그 고요함은 금세 깨질 수 있었다.
“그래도 굳이 그 장면을 넣을 필요는 없는 거 같은데?”
“아….”
강 감독의 생각은 여전히 확고했고.
재차 용기 내어 말한 의견이 다시 한번 묵살되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때.
“…그래도 한번 찍어보는 건 어떨까요?”
최서빈이 강 감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고.
그의 말에 나는 놀란 눈으로 최서빈이 아닌, 강 감독을 바라보았다.
강 감독은 그의 말에 잠시 고민에 빠진 듯했지만.
이내 일그러진 얼굴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한번 찍어보자.”
누가 봐도 못 이긴 척 수락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끝내 수락을 했다는 사실에 내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강 감독은 곧장 뒤돌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최서빈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우리는 빠르게 배역에 몰입했다.
“레디, 액션!”
한참의 연기를 펼친 뒤.
“컷, 오케이!”
강 감독의 컷 사인이 떨어졌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최서빈을 번갈아 보며 소리쳤다.
“좋았어. 이번에는 원래 대본대로도 하나 찍어볼게.”
“네, 알겠습니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지만.
원래 대본대로 다시 찍자는 강 감독의 말에 나와 최서빈은 눈을 마주치며 어색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내 의견을 수렴해 찍어는 줬으니, 다시 자신의 생각대로 찍자는 그의 행동에 그저 따를 수밖에.
나중에 어떤 장면을 실제로 영화에 담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의견을 들어줬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한 뒤, 다시 배역에 몰입했다.
***
한 번의 애드리브를 수락해준 뒤.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단 한 번도 강 감독은 내 의견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아주 사소한 의견만 내더라도.
늘 그렇듯 경청조차 하지 않았지.
‘나는 클래식한 게 좋아. 굳이 대사를 넣거나 수정하고, 행동을 추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이런 생각의 강 감독이었기에.
내 어떤 의견도 그에게 수락된 적은 없었다.
아쉬운 장면들이 가끔 있었지만.
이제는 그저 강 감독을 믿고 따르기로 결심했다.
이 방법밖에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일단 한 번은 내 의견을 믿고 촬영해 주었고.
앞으로 남은 모든 대본과 촬영은 그의 디렉팅에 따르기로 한 것이지.
내 의견을 들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강 감독의 디렉팅과 대본 자체가 좋았기에.
큰 문제는 없이 쭉쭉 달려가고 있었다.
“컷, 오케이!”
강 감독의 오케이 사인과 함께 나와 최서빈은 동시에 인사를 보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카메라 앞에서 빠져나오며 대화를 시작했다.
“희성이 너도 이제 한참 대기하나?”
“네, 저 다음 신도 선배님이랑 찍습니다.”
최서빈은 내 말에 눈동자를 굴리며 답했다.
“아, 다음 신은 하나 씨랑 우리 셋이 찍는 장면이지?”
“예, 맞습니다.”
그는 촬영장 한쪽에 마련된 휴식 공간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뭐 할 거야, 할 거 없으면 저기서 같이 쉴까?”
최서빈의 말에 나는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대기하는데, 뭐 따로 할 일이 있겠습니까. 같이 가시죠. 하하.”
우리는 휴식 공간에 도착해 나란히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대었고.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함께 쉬자고 했지만, 굳이 그와 무슨 일을 하기 위해 붙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저 같은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 그뿐이었다.
자연스레 우리는 각자 휴대 전화를 꺼냈고.
같은 공간에서 각자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SNS와 인터넷 기사, 여러 게시물을 번갈아 보았고.
새로 올라온 나에 관한 글들에 시선을 고정했다.
연기 대상에서 신인상과 인기상을 수상한 뒤.
기하급수적으로 팬 카페인 ‘진희성수기’에 팬들이 늘어갔고.
그만큼 나에 대한 기사들도, 사람들의 관심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내가 평소에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취미를 가졌는지, 휴식을 취하는 날에는 어떤 일을 하는지에 관한 글.
SNS의 팔로우 수 또한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지.
그 과분한 사랑에 감사하고 또 기뻐하던 나날들이었지만.
사랑을 받는 만큼.
미움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모든 이가 나를 좋아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되었지.
나에 관한 최근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중.
미소를 짓고 있던 내 얼굴이 점점 굳어져가는 것을 순식간에 느낄 수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그 모습에 최서빈은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물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최서빈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고.
나는 그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최서빈은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뭔데, 갑자기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아. 말해봐.”
“그게….”
보고 있던 휴대 전화 화면을 그에게 내밀며 작게 읊조렸다.
“요즘 이상하게, 갑자기 악플러가 확 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