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53)화 (153/303)

153화 #28 – 1만 년의 벌(4)

“다른 거 하지 말고, 대본에 나온 대로만 해요.”

강 감독의 말에 나는 별다른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애드리브인지, 어떠한 상황을 꾸미고 싶은지 들을 생각조차 없어 보였으니까.

김 실장과 강 감독에 대해 미리 이야기를 나눌 때, 그의 성향을 알고는 있었다.

고집이 강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촬영한다는 사실을 듣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심한 그의 태도에 당황한 기색을 겨우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강 감독은 내 말에 눈인사로 대답을 한 뒤.

다시 그의 자리로 돌아가 소리쳤다.

“레디, 액션!”

강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배역에 몰입했다.

최서빈과의 작은 다툼이 있는 신.

그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누가 먼저 한 대를 때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탁-.

“이러다 걸리면 네가 책임질 거야?”

최서빈은 자신이 들고 있던 짐으로 내 어깨를 밀치며 소리쳤고.

나는 그의 팔을 쳐내며 외쳤다.

“책임을 왜 내가 져, 보스인 네가 져야지.”

“잘못은 네가 해놓고 책임은 왜 나한테 지라고 지껄이는데?”

“몰라서 물어?”

나와 최서빈 사이의 팽팽한 대립.

서로의 눈을 마주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고.

몇 초의 시간 동안 카메라는 나와 최서빈의 얼굴을 담아냈다.

그리고 나는 최서빈에게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우리보다 많이 가져가잖아. 모를 줄 알았어?”

“개소리 그만해라.”

곧바로 최서빈은 내 멱살을 꽉 쥐었고.

그런 그를 눈에서 불을 쏘아내듯 노려보았다.

그때.

“아, 됐어. 작업하다가 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김하나가 최서빈과 나 사이를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최서빈은 손으로 그녀를 밀치며 말했다.

“빠져. 너도 이 새끼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거 아니야?”

그의 말에 나는 내 멱살을 잡고 있던 최서빈의 팔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우리 생각이 틀렸어?”

내 말에 최서빈의 동공은 지진인 난 듯 흔들렸고.

그의 어깨를 밀치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렇게 들키니까, 너도 화내는 거 아니야. 저번에 장물 털었던 것도, 개수가 안 맞던 거… 네가 빼간 거 맞잖아.”

“그건….”

말을 흐리는 최서빈의 멱살을 잡아 홱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듯 밀쳤다.

퍽.

최서빈은 그대로 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졌고.

나는 그를 쏘아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둘 다 그만 좀 해. 도둑질하다가 이렇게 싸워서 걸리면 꼴 우습지 않겠어?”

김하나는 나와 최서빈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우리는 그녀의 말에 서로의 눈을 피하며 분노를 삭였다.

“컷, 오케이!”

강 감독이 만족한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고.

나는 손을 뻗어 바닥에 앉아 있던 최서빈을 일으켰다.

최서빈은 내 손을 잡고 일어나며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아닙니다. 선배님, 제가 너무 세게 밀쳤나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오히려 살살 밀면 실감이 안 나서, NG야. 잘했어.”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태프들과 강 감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영화 ‘장물아비’의 첫 번째 신이 별 탈 없이 한 번에 마무리를 지었지만.

영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분명 대본이 잘못됐거나, 전개가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지울 수 없는 아쉬운 느낌.

작품의 전체적 흐름은 좋지만, 지금보다 더 좋아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던 것이지.

내가 대본을 읽고 연습을 하면서 느꼈던 점.

그걸 강 감독과 협의 후 변경이 아닌, 추가를 하고 싶었던 것인데.

강 감독의 완벽한 철벽에 내 의견을 말도 꺼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운 부분이 삼켜지지가 않았다.

뭔가 딱 2% 부족한 그 느낌.

그렇게 신을 마무리한 뒤, 애써 미소 지으며 현장을 빠져나왔다.

***

“벌써 촬영한 지도 일주일이나 됐네.”

운전석에 앉은 김 실장을 바라보며 말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게. 시간 빠르다. 벌써 촬영한 지 그렇게 됐나?”

“응, 딱 저번 주 월요일부터 시작했으니까.”

“맞네. 근데 오늘 촬영 너무 일찍이다. 피곤하지는 않아?”

김 실장이 룸 미러를 통해 나를 보며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잠도 자고 왔는데, 새벽 촬영이 힘들 것까지야.”

“이따가 촬영하다가 피곤하면 눈 좀 붙여. 오늘은 야간 촬영까지 있잖아.”

“응, 그럴게.”

나는 다시 대본을 집어 들고 연습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차는 촬영장에 도착했고.

“희성아, 다 왔다.”

“어.”

그때 김 실장의 휴대 전화가 울렸고.

“잠깐만, 나 전화 좀 받고.”

그의 말에 나는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며 답했다.

“천천히 하고 와. 나 먼저 현장 가 있을게.”

나는 그대로 현장으로 다가갔고.

입구에서 촬영에 대기 중인 김하나가 나를 반겼다.

“어, 희성 씨 왔어요?”

“네, 하나 씨 일찍 오셨네요.”

그녀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대본을 들고 있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근데 희성 씨, 오늘 촬영 오후 시작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놀란 얼굴로 김하나에게 되물었다.

“제가 알기로는 새벽에 하나 씨랑 저랑 서빈 선배님이랑 단체 신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번 영화에서 가장 많이 찍는 건 우리 셋이 함께 나오는 신이었다.

개인 촬영만큼이나 함께 촬영하는 신이었고.

그렇기에 대부분의 촬영 시간은 김하나와 내가 겹칠 수밖에 없었지.

내 말에 김하나는 나보다 놀란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거 오늘 밤 촬영으로 밀렸잖아요. 그래서 지금 새벽에 찍는 거, 저랑 최서빈 선배님 둘이 하는 신이라고 들었어요.”

김하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찌푸렸고.

그때.

“어, 희성 씨 벌써 왔어?”

강 감독이 놀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그의 얼굴을 보니.

김하나가 말한 촬영 스케줄이 맞는 모양이었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허리를 접었다.

“네, 감독님. 저 오늘 새벽 촬영이라고 들었는데, 스케줄이 바뀐 건가요?”

내 물음에 강 감독이 순식간에 찌푸려진 얼굴로 스태프를 호출했다.

강 감독의 부름에 달려온 스태프.

“희성 씨, 미안해. 잠시만.”

그는 스태프와 조금 옆으로 물러나 대화를 나눴고.

둘의 모습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닌, 한쪽의 일방적인 다그침이었다.

언뜻 들리는 목소리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스태프의 잘못이라는 것을.

바뀐 스케줄로 연락을 돌려야 할 스태프가 내게, 그러니까 김 실장한테 실수로 누락한 듯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내 촬영은 오후 늦게부터 시작이었고.

지금 이 시간에, 이렇게 현장에 서둘러 오지 않아도 됐다는 것이지.

전화 한 통이 누락되어 김 실장과 새벽부터 왔다는 사실에 화는 났지만.

굳이 호통을 치거나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

지금부터 언성을 높여 스태프에게 화를 낸다고 한들.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이 시간에 현장에 왔다는 사실조차 달라질 것 하나 없었지.

스태프는 서둘러 내게로 달려와 허리를 접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매니저분께 연락을 드리려다가 잠시 다른 일을 하고 났더니, 잊었나 봐요.”

그의 말에 나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어떻게 해드려야 할지….”

스태프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을 잇지 못했고.

김하나는 옆에서 입술을 잘근 깨물며 나를 걱정하는 듯 보였다.

나는 허리를 깊게 접은 스태프를 일으키며 농담을 툭 던졌다.

“저한테만 일부러 연락 누락하신 건 아니잖아요? 하하.”

내 말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당연히 아니죠.”

“그러니까요. 그럼 정말 괜찮습니다. 이왕 나온 거, 연습 더 많이 해서 촬영 때 NG 안 내면 되죠.”

스태프는 내 말에 재차 고개를 숙였지만.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자꾸 이러시면 제가 더 곤란해요. 정말 괜찮으니까, 얼른 가서 일 보셔도 됩니다.”

내 말에 강 감독이 스태프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는 내게 다시 한번 허리를 접은 뒤,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강 감독은 내게로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스태프 실수 때문에 미안하게 됐네. 대신에 오전 신을 얼른 끝내고, 희성 씨 촬영 들어갈게.”

“예, 알겠습니다.”

나는 미소로 그에게 답했고.

김하나와 눈인사를 보낸 뒤, 김 실장에게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다시 차로 향했다.

***

차로 돌아가는 진희성의 뒷모습.

그걸 보며 김하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옆에 있는 스타일리스트 박현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언니, 희성 씨 진짜 대박이지 않아?”

김하나의 물음에 박현지도 입을 벌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어, 그러니까. 화 한 번을 안 내내.”

“저번 촬영 때, 희성 씨한테 간식차 왔던 적 있잖아. 기억나?”

“당연하지. 그때 나 츄러스 두 개 먹었잖아. 하하.”

박현지의 말에 김하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맞네. 그때도 엑스트라로 온 단역 배우들한테까지 직접 가져다주더라니까?”

“진짜?”

놀란 듯 묻는 박현지에게 강하나가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응, 대박이지. 츤데레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냥 착하고 어른스러운 것 같아.”

“하긴. 주변에 별로인 배우들이 많긴 하지. 아니, 그렇게 비교 안 해도 희성 씨는 진짜 좋은 사람이기는 한 것 같아.”

그들은 현장으로 발길을 옮기며 말을 이어갔다.

“언니도 알지, 나 희성 씨 팬인 거?”

“어, 네가 나한테도 희성 씨 드라마 영업했잖아. 하하.”

“연기 잘하잖아. 아무튼, 근데 나 더 팬이 될 것 같아….”

김하나는 고개를 돌려 진희성의 차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련한 눈빛과 함께 김하나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고 있었다.

***

“컷, 오케이!”

강 감독의 외침에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카메라 밖으로 걸어 나왔지만.

나는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가슴 한쪽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또다시 강 감독에게 대사 애드리브나 내가 취할 행동에 대해 묻지는 않았다.

강 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만 찍기를 고수했고.

나 또한 그가 추구하는 작품의 방향이 싫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단지 한두 대사를 추가하고 싶었을 뿐.

더군다나 촬영 현장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거나.

대본을 수정하고 싶은 부분은 없었기에, 내 아쉬움을 삼키면 그만이었다.

그때.

내 어깨에 손이 스윽 올라왔고.

그 손길에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선배님!”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자신에게로 당기는 사람은 최서빈이었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곁눈질로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물었다.

“나한테 솔직히 말해봐.”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했다.

“네? 저 숨기는 거 없는데, 어떤 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말에 최서빈이 쓰읍, 소리를 내며 작게 읊조렸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로.

“너… 아쉬운 거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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