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28 – 1만 년의 벌(3)
“저 진짜 희성 씨 팬이에요!”
김하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고.
나는 그녀의 말에 놀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하나가 양손을 배배 꼬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사실… 처음에는 예의상 팬이라고 했거든요.”
“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김하나는 눈을 크게 뜨고 답했다.
“저번에 처음 뵀을 때요. 제가 팬이라고 했잖아요. 그때 당연히 희성 씨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죠. 떠오르는 신예, 아니 이미 많은 작품에 나오고 있는 것도 알았고요.”
그녀는 신이 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워낙 제 앞길 찾기에 바빠서, 다른 배우들의 모니터를 찾아서까지 하지는 못했거든요. 물론 희성 씨 작품도 찾아서 본 적은 없었고요.”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당장 할 일은 많고, 내 작품 모니터링하면서 공부하기도 시간이 부족하잖아요.”
“맞아요. 그런데 희성 씨는 옆집이기도 하고. 이제 종종 건물에서 뵐 것 같기도 하고. 뭐, 아무튼 그러다가 최근에 찍으신 작품을 한번 봤거든요?”
“블랙맨 보신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상간녀의 유혹을 먼저 봤는데, 글쎄… 제가 그날 그거 앉은 자리에서 다 보느라 밤도 샜어요.”
김하나의 말에 나는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와, 그걸 하루 만에 다 보셨어요?”
“네,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희성 씨 연기가 매 화마다 감탄이 나오더라고요.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나는 캐릭터다, 싶었는데. 그 안에 슬픔, 애환이 눈빛에서 나오는 연기… 진짜 놀랐어요.”
그녀의 계속되는 칭찬에 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 작품인 블랙맨도 봤고, 그러다 보니까 예전 작품들도 다 찾아보게 됐어요.”
“정말요?”
김하나를 본 이후로,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눈빛.
그녀의 눈이 이리도 반짝였던가?
김하나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한 얼굴로 내게 1초도 쉬지 않으며 말을 쏟아냈고.
나는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말에 리액션을 하며 경청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아무튼 결론은, 저 희성 씨 찐팬이 됐다는 거죠. 정말 팬이에요.”
그녀는 갑자기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내 팬임을 고백하듯 외쳤고.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녀에게 답했다.
“감사해요. 저도 늘 하나 씨 응원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팬이라고 해주시니까 기분이 너무 좋네요.”
내 말에 김하나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저를 응원해 주셨다니, 영광이에요.”
“제 팬이라고 해주시니까 제가 더 영광이죠.”
재빨리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이번 작품 잘해봐요.”
우리는 그렇게 맞잡은 손을 천천히 흔들었고.
김하나는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
과거를 떠올리면 두통이 찾아오는 것도, 벌써 한 달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이 두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굳이 노력하지 않았다.
아니, 노력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약을 먹는 것도.
과거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모두 소용이 없었다.
그저 천 번의 삶을 살아야 하는, 내 숙명이라고 받아들이게 된 순간부터.
이 두통과 고통은 그저 나와 동반하는 것이라 여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방안은 없었으니까.
이 힘든 고통이 내게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함께 살아가겠노라, 생각한 것이지.
1만 년 중에 마지막 9년.
그 짧은 세월을 고통과 함께 흘려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내 마지막 삶에서 내가 가장 소중하고 간절히 원했던 것은 ‘연기’였고.
연기에만 집중한 인생을 살며, 남은 9년을 보내야겠다고 판단했다.
“희성아, 오늘은 일찍 왔네?”
그렇게 집에만 박혀 있던 나는 최근 일주일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무실로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응, 이제 곧 촬영이니까, 연습에 박차를 좀 더 가해야지.”
내 말에 김 실장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미 충분해. 지치지 않게 천천히 해도 돼.”
“아니야. 이번에는 더 잘해내고 싶어.”
나는 서둘러 연습실로 발길을 옮겼고.
김 실장은 내게 대본을 흔들며 말했다.
“대본 수정한 거 어젯밤에 새로 왔어.”
“많이 수정됐어?”
“아니. 장면 일부만.”
그가 가지고 있던 대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는 대본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홱 뒤로 숨기며 미소를 지었다.
“연습실 가서 보여줄게.”
“뭐야, 뭔데 그래?”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던 김 실장은 연습실 문을 닫자마자 자리에 앉았다.
그의 앞에 자리를 잡은 나는 의자를 당겨 그의 앞으로 몸을 붙였다.
“무슨 일 있어?”
“아니, 별일은 아니고. 우리 작품 가제였잖아.”
“응, 그냥 도둑이었잖아.”
아직 제목이 붙지 않았던 대본.
김 실장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제목 정해졌대.”
“뭐래?”
그러고는 내 앞으로 대본을 쓰윽 밀며 답했다.
“장물아비.”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 수정됐다는 대본 좀 읽어볼까?”
서둘러 대본을 펼쳐들었고.
김 실장 또한 하나 더 가져온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 대화 없이 대본을 읽어 내려갔고.
하지만 대본에 내가 아쉬워하던 여러 부분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혹시나 감독이 나와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내가 생각한 몇 개의 장면 중 수정된 곳이 단 하나도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장을 덮었고.
그렇게 대본을 덮자, 김 실장도 대본을 뒤집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때?”
“뭐, 크게 달라진 건 없네.”
“응, 그냥 감독님이 걸렸던 부분 몇 군데만 수정했다 하시더라고.”
나는 대본을 손으로 툭툭 치며 김 실장에게 물었다.
“근데 형, 강홍준 감독님은 어때?”
내 말에 김 실장은 입술을 다문 채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강홍준 감독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강 감독의 작품이 한두 작품도 아니었고, 많은 작품에서 흥행을 거둔 감독이었지.
하지만 강 감독의 성적과는 별개로, 강홍준이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강 감독과 작품을 해보지 않는 이상, 그의 일 스타일과 성향에 대해서 알 리가 만무했기 때문.
김 실장은 같은 직종인 매니저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나보다 이런 쪽의 정보력은 훨씬 빠삭한 편이었지.
특히나 회사 내 선배들을 통해 배우들, 감독과 스태프들의 성격까지 대부분은 알고 있으니까.
김 실장이 입술을 움찔거리며 내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음… 너도 알다시피 강 감독 영화들 중에 망한 건 없잖아. 실력은 끝내주지.”
“그렇지. 손익 분기점만 넘기는 게 아니라, 거의 다 흥행 성공했잖아.”
“맞아. 물론 좀 안 된 작품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영화를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다 잘됐으니까.”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감도 좋고, 일을 잘하시긴 하나 봐.”
내 말에 김 실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실력은 좋지. 좋은데… 음, 뭐랄까. 좀 고지식하다더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알지 못했던 강 감독의 성격이기에.
나는 김 실장의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에 깐깐하고, 고집도 엄청나게 심하대.”
“그래?”
“응, 남의 의견. 그러니까 같이 일하는 스태프는 당연하고. 배우들의 의견도 수용은커녕, 완전 무시해 버리나 봐. 자기가 생각한 대로 찍고 일해야 하는 스타일인 거지.”
김 실장의 말에 나는 한숨을 삼켜내며 의자에 등을 푹 기대었다.
“음… 같이 일하기 힘든 스타일이네.”
내 말에 김 실장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앞으로 몸을 당기며 내게 말했다.
“근데 또 성적이 잘 나오잖아. 그러니까 다들 할 말이 없는 거지.”
“하긴. 자기 고집대로만 일하는데, 그게 늘 흥행하니까. 다들 따를 수밖에 없었겠네.”
김 실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너도 알잖아. 이 바닥은 관객 수가 곧 실력인 거.”
“맞지. 아무리 촬영장에서 화기애애하고 잘됐어도, 흥행이 안 되면 그 감독은 한순간에 무능한 감독으로 낙인찍혀 버리니까.”
내 말에 김 실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강 감독… 촬영 때 힘들기로 유명해. 자기 마음에 조금이라도 안 들면, 무조건 다시. 강 감독이 원하는 대로 나올 때까지 해야 하거든.”
그의 말에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뭐, 감독이라면 그런 열정은 있어야지.”
“근데 그 정도가 좀 심한 편이라 문제인 거지. 나중에 촬영본 보고 나서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그 신을 또 찍기까지 하니까.”
나는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입을 열었다.
“걱정되기는 하는데, 꼼꼼하고 열정적인 것 같아서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해.”
“응, 대신 그만큼 늘 성과가 좋았으니까, 다들 힘들어도 믿고 가는 느낌인 거지.”
그동안 배우들을 힘들게 할 만큼 깐깐하고 고집이 강했던 감독과 일을 해본 적은 없었다.
물론 다들 열정적으로 촬영에 임했지만.
감독만큼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들도 그와 마찬가지였기에.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수용하는 감독들이었지.
그런데 자신의 생각과 의견만을 고집한다는 강 감독이라는 말에, 살짝 걱정이 앞선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만큼 자신의 작품에 대한 확고함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강 감독과의 촬영이 기다려졌다.
***
아직 해도 뜨기 전인 깜깜한 새벽.
읽던 대본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와, 진짜 어둡다.”
김 실장이 내 말에 룸 미러로 나를 보며 답했다.
“제일 어두운 새벽이지.”
“응,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두우니까.”
나는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운전석 쪽으로 다가가 내비게이션을 보며 물었다.
“형, 거의 다 왔어?”
“어, 곧 도착이야. 첫 촬영인데, 장소 섭외 때문에 오늘이 부둣가인가 봐.”
“그러게. 컨테이너가 빼곡한 곳, 영화에서만 봤는데 직접 본다니까 신기하네.”
“맞아. 불법적인 장면에 꼭 등장하잖아.”
김 실장과 나는 곧 도착할 장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텅 빈 도로를 달렸다.
몇십 분 뒤.
현장에 차량이 멈춰 섰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하아, 촬영 첫날은 여전히 떨린다.”
내 말에 김 실장은 나와 같은 얼굴로 심호흡을 하며 답했다.
“나도 떨린다. 첫 촬영의 그 긴장감이 있지.”
“맞아. 이제 내릴까?”
“응.”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달려가 강 감독을 비롯한 모든 스태프, 배우와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진희성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많은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던 중.
조감독이 시간을 확인하며 배우들을 향해 외쳤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촬영해야 하니까, 바로 촬영 준비하겠습니다!”
“네.”
현장은 순식간에 각자의 자리로 이동해 촬영 준비를 시작했고.
나와 최서빈, 김하나는 대본을 한 번 더 확인하며 현장으로 걸어갔다.
강 감독이 메가폰을 쥐고, 우리에게 소리쳤다.
“대사하기 전에, 컨테이너 쪽으로 나오는 신부터 찍고 갈게요.”
“예.”
우리는 합창하듯 답했고.
곧장 촬영이 시작됐다.
같은 신을 수차례 찍고 난 뒤.
강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우리는 잠시 옷과 메이크업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때, 강 감독이 나와 최서빈에게로 다가왔고.
“서빈 씨랑 희성 씨 이번에 대사할 때, 톤은 최대한 긴박함을 살리면서도 대사가 날리지 않게 해줘요.”
“예,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최서빈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럼 바로 촬영 들어가도 될까? 혹시 궁금한 거 있어요?”
강 감독의 질문에 나는 망설이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저… 감독님.”
그가 눈썹을 들썩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대사가 나오는 첫 신.
나는 이 신을 연습하며 추가하면 좋을 것 같은 애드리브를 적어뒀다.
하지만 애드리브라고 해서 즉흥적으로 촬영 도중에는 할 수가 없었다.
감독과 조율을 해야 하고, 또 상대 배역이 당황스럽지 않도록 미리 합을 맞춰야 했지.
그래서 나는 생각해둔 애드리브를 하기 위해, 그에게 물었다.
“저 이번 신 마지막 대사 뒤에 애드리브를 준비했는데, 이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 감독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잘라냈다.
“안 돼요.”
단호한 그의 말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예?”
내 물음에 강 감독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답했다.
“다른 거 하지 말고, 대본에 나온 대로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