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51)화 (151/303)

151화 #28 – 1만 년의 벌(2)

최서빈이 제안한 작품에 오케이를 한 뒤.

회사에 소식을 전했고, 김 실장 역시 별다른 이야기 없이 내 의견을 들어주었다.

지금껏 내가 고른 작품의 결과가 그를 실망시킨 적은 없었고.

더군다나 회사의 가장 톱 배우인 최서빈이 출연하고, 고른 작품이기에.

회사에서도 내가 출연을 결심했다는 것에 응원과 박수를 보내주었지.

그날 이후 두통에 시달리는 몸을 겨우 적응해내며.

아주 짧은 휴식기를 더 맞이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회사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형.”

밝은 얼굴로 회사 문을 열자, 김 실장이 나보다 더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희성아!”

그는 몇 달, 아니 몇 년을 못 보고 지냈던 사람처럼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게로 달려왔고.

덥석 내 몸을 끌어안았다.

“뭐야, 잘 지낸 거지?”

“어, 그럼 당연하지.”

동시에 그와 마실 커피가 쏟아질세라 그의 등 뒤로 팔을 쭉 내밀어 커피를 사수했다.

그 모습을 지나가던 팀장이 보고, 김 실장을 향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누가 보면 이산가족 상봉한 줄 알겠어. 김 실장은 희성 씨 없이 어떻게 사는 거야? 하하.”

그의 말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그를 밀어내며 김 실장을 향해 말했다.

“어휴, 그래. 형, 우리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하하.”

“우리 벌써 몇 주는 못 봤지. 한 달은 되어가는 것 같은데?”

“그래도 우리 연락은 거의 매일 하지 않았어?”

김 실장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회의실로 가자, 긴히 할 말이 있어.”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은 채, 김 실장을 따라 움직였다.

내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김 실장은 곧장 문을 닫으며 내게 물었다.

“그래서 정말 별일은 없고, 그냥 쉬다가 온 거야?”

“그럼. 내가 무슨 일이 있겠어.”

“난 또. 갑자기 네가 이렇게 쉬겠다고 하니까, 번아웃이라도 온 건 아닌가 걱정했지.”

김 실장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고.

나는 손을 가로저으며 답했다.

“에이, 벌써 번아웃이 오기에는 내가 일을 덜 했지. 얼른 작품하고 싶어서 쉬는 동안 작품 찾아왔잖아.”

“하긴.”

김 실장은 내가 건넨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다시 말했다.

“근데 왜 갑자기 쉬다가 서빈 씨가 고른 그 작품을 같이하기로 한 거야?”

“좋은 거 같아서.”

“다른 출연진도 아직 안 정해졌잖아. 감독이랑 작가는 다 확인했어?”

그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아니. 이번에는 감독, 출연진 라인 잴 것 없이 서빈 선배한테 오케이 했어. 같이하겠다고.”

내 말에 김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답했다.

“그래?”

그러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일단 네가 원하니까 들어가겠다고는 했는데. 나도 작품 읽어보니까 내용은 좋더라.”

“응, 나도 작품은 괜찮으니까, 하겠다고 했지.”

“근데 너 그 작품 여자 주연은 누군지 알아?”

그러고 보니.

최서빈과 함께한다는 것.

그리고 내용이 나쁘지 않다는 것.

이 두 가지 이유만으로 작품을 오케이 했고.

그 외에 모든 사항은 확인해볼 생각조차 못 했지.

미간을 찌푸린 채 김 실장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래, 정해졌어?”

“어, 김하나.”

“정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에게 되물었다.

“응, 그쪽에서 그 영화 들어갈까 말까 재고 있었나 봐. 근데 너 들어온다니까, 바로 들어가겠다고 했다더라.”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의아함을 가득 품었다.

내가 작품에 출연하겠다는 것만으로 그녀가 작품에 들어오겠다니.

김하나와 나는 특별한 인연도, 그렇다 할 친분도 없었다.

그저 겹치는 것이라고는 단지 옆집에 사는 것.

그 하나뿐이었지.

이웃사촌이라는 것, 그 하나로 나와 함께 작품을 하기로 했다는 사실에.

궁금증을 품었고.

김 실장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그러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왜긴, 네가 작품 보는 눈이 좋아서 그런 거 아니겠어?”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고.

김 실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네가 했던 작품 중에 망한 거 하나도 없잖아. 잘됐으면 잘됐지.”

“…그렇긴 하지.”

나는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고.

“그러니까 네 작품 고르는 눈 보고 따라 들어간 거겠지. 희성이 네가 워낙 감이 좋잖아. 이번 작품은 또 얼마나 잘 되려나 기대된다.”

김 실장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함께할 배우들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톱 배우 최서빈에.

한결같이 꾸준한 연기력을 보여주는 김하나까지.

이런 배우들과 함께한다면, 이 작품 흥행은 따 놓은 당상인데?

***

휘이잉-.

어둠이 내려앉은 곳.

들리는 소리라고는 내 거친 숨소리와 바람 소리뿐.

눈앞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회색과 주황색의 컨테이너들이 가득했다.

빼곡한 컨테이너들 사이로 걸어가는 나는,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기 위해.

모자부터 신발까지 모두 검은색이었고.

바스락-.

다른 이의 움직임에 서둘러 컨테이너 옆으로 숨었다.

“하아, 하아….”

숨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고.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은… 꿈이라는 것을…!

탁-!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고.

숨을 참은 채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내게 손을 얹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새끼야, 여기서 뭐 해? 너 때문에 들킬 뻔했잖아.”

“…미안, 그래서 장물이 있다는 컨테이너가 어디 있어?”

내 말에 그는 손짓으로 옆 컨테이너에 숨어 있는 여성을 불렀다.

“미나야, 여기야. 빨리!”

그의 부름에 황미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내 앞으로 달려왔고.

우리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찾았어. 소파 다리에 하나같이 이니셜이 새겨져 있어. 그거 맞지, 보스?”

그녀의 말에 보스라고 불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나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잘 들어. 그 안에 장물아비가 말한 보석들이 들어 있어. 총 13개.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돼. 그랬다가는 그 컨테이너째로 들키고 말 거야.”

나는 눈에 불을 켜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게 서둘러 물었다.

“그래서 소파 어디에 숨겨져 있는 건데?”

“전부 소파 왼쪽 뒤 다리에. 다리 열면 그 안에 숨겨져 있을 거야. 절대 소파에 손상이 가면 안 돼. 알지?”

그는 나와 황미나에게 당부하듯 말했고.

나는 피식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도둑질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당연한 얘기는 넣어 두지?”

“저번에 물건 하나에 상처 나서 바로 컨테이너 걸렸던 거 잊었어? 조심해.”

우리의 대화에 황미나는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이럴 시간에 얼른 털러 가자. 시간 없어.”

셋은 동시에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 가자!”

보스의 사인에 우리는 각자 뿔뿔이 흩어졌고.

한 컨테이너를 향해 각자의 방법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무거운 장비를 등에 업은 채, 부두의 수많은 직원들 눈을 피해 달려갔다.

“하아….”

숨이 가빠왔다.

하지만 멈춰서 숨을 쉬는 것도,

숨을 크게 내뱉고 마시는 것도, 지금은 사치였다.

중간중간 눈앞에 플래시가 비췄지만.

그들의 눈을 피해 재빠르게 숨어 달렸다.

그때.

“거기 누구야!”

내 등 뒤에서 환한 플래시가 터졌고.

순간 일시 정지를 한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저벅저벅.

누군가가 내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마른침을 삼킨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거기 서!”

내 이마에서는 땀이 한 방울 흐르고 있었고, 어느새 내 양옆으로도 사람이 붙고 말았다.

“…젠장.”

“잡아.”

컨테이너에 몸을 부딪치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전속력으로 앞을 향했다.

팟-!

눈앞에는 어두운 부둣가가 아닌, 내 방 천장이 보였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뭐지.

한동안 꿈을 안 꿨는데.

이제 영영 꿈을 꾸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꿈에서 도둑이었던 나는 물건을 훔치고, 걸려서 달아나는 그 모든 긴박한 순간들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상상만으로도 지금 내 등줄기에는 땀이 흐르고 있으니까.

꿈속의 장면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대본에서 봤던 장면, 그 모든 게 꿈속에서 그대로 일어났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꿈을 꾸고 난 뒤, 아쉬운 점이 생겼다.

꿈에서 내가 물건을 훔치기도 전에 걸리는 것보다는.

물건을 가방에 가득 챙긴 뒤, 허겁지겁 도망가는 것이 정황상 더 잘 맞을 것 같은데?

그렇게 꿈과 대본을 비교하며, 내 의견들을 대본 한쪽에 적기 시작했다.

***

하루 내내 회사에서 대본 연습을 한 뒤.

집으로 퇴근한 후에도 손에서 대본을 놓지 않았다.

잠시라도 대본이 아닌,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만 해도.

지금까지 모든 인생이 촤르르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수많은 생각은 나를 총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기에.

잡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대본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렇게 어느덧 밖에는 어둠이 짙게 깔렸고.

며칠을 한 작품 대본만 읽은 결과.

어지러울 정도로 머리가 핑 돌았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거실로 걸어 나갔다.

방 안을 빙글거리며 돌고 또 돌아도.

그렇게 넓지 않은 평수 탓에, 오히려 어지러움은 증폭되기만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긴 패딩을 걸친 후.

가벼운 슬리퍼를 신고 집 밖으로 나섰다.

마음 같아서는 동네 한 바퀴, 혹은 공원이라도 걷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보는 눈이 많았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러 나오는 길에도 푹 눌러쓴 모자에 마스크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아파트를 벗어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끝내 나는 1층에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을 향해 올라갔다.

아파트 옥상은 주민들을 위해 늘 개방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이 이용하지는 않았다.

워낙 근처 공원이 잘되어 있는 탓에, 굳이 옥상에 오를 일이 없었던 것이지.

나 역시 늘 공원이나 아파트를 돌며 산책하고는 했으니까.

딩동.

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렸다.

팟-.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자동 센서 등이 환하게 불을 밝혔고.

앞에 놓인 어둠을 지나쳐 한 걸음, 한 걸음 옥상을 향해 걸어갔다.

몇 계단을 오르자, 눈앞에 보이는 오래된 회색 철문.

끼이익-.

기름칠을 해달라고 소리치는 듯한 문을 꾸욱 밀어내자, 찬 바람이 내 볼에 스쳐왔다.

“하아….”

차디찬 바람이었지만, 그 바람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바람을 들이마시며 난간을 향해 다가갔고.

팔을 그 위로 턱 하니 올려, 저 멀리를 내다보며 최대한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조금만이라도 다른 생각을 떠올리면,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기억들이 떠오르니까.

그때.

끼이이익-.

뒤에서 다시 문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에 놀라 움찔거리며 뒤를 돌았다.

“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서 있는 사람.

김하나였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는 입을 떡 벌린 채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뜨고 있었고.

나는 곧장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나 씨, 안녕하세요.”

“어머, 어떻게 여기서….”

그녀는 서둘러 내게로 걸어왔고.

자신의 머리와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저 여기로 바람 쐬러 자주 오거든요. 항상 아무도 없어서 쌩얼로 온 건데… 민망하네요.”

“아닙니다. 저도 아무것도 안 하고 왔는데요. 그리고 TV랑 똑같으신데요, 뭘.”

“하하, 아니에요.”

그녀는 쑥스럽다는 듯 눈을 피했고.

돌연 나를 바라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아, 저 안 그래도 희성 씨 보면 말하려고 했는데.”

“네?”

“저 이번에 작품 같이하기로 한 거 들으셨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연으로 들어오셨다고 들었어요. 잘 부탁드려요.”

내 말에 김하나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니요.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사실… 저 희성 씨 하나 보고 그 작품에 들어갔거든요.”

김 실장에게 들은 이야기였지만.

그녀가 직접 내게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그녀를 보았고.

김하나는 빙그레 웃으며 내게 말을 이어갔다.

“희성 씨랑 같이 작품하고 싶어서, 언제 작품 들어가시나 기다렸어요.”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빛.

김하나를 오래 본 것은 아니었지만.

예전에도 나를 보는 눈빛이 이렇게 반짝였나?

김하나를 만났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그녀의 말에 경청하고 있었고.

그녀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쌓아뒀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그래서 바로 오케이를 한 거죠.”

“아, 그러셨구나. 그렇게 생각해 주셨으면 저야 감사하죠.”

“음… 사실 희성 씨가 어떤 장르를 선택하셨어도, 저는 그 작품 따라 들어갔을 거예요.”

너무나 적극적인 태도로 변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수많은 생각이 뒤엉켜 들었다.

배우 대 배우로서 대하는 모습을 뛰어넘은 듯한 그녀의 태도.

…혹시 나에게 마음이라도 있는 건가?

눈웃음을 보내며 말하는 김하나를 보며 고민하던 순간.

그녀가 수줍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시상식 때도 말씀드리기는 했지만….”

김하나의 말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고.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소리쳤다.

“저 진짜 희성 씨 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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