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28 – 1만 년의 벌 (1)
휘잉-.
사막의 모래바람이 거세게 일었고.
그 탓에 사방으로 날리는 모래는 내 눈과 코, 입을 순식간에 덮쳤다.
“으윽.”
눈을 질끈 감은 채, 모래 때문에 따가운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휘이익.
여전히 바람은 멈추지 않았고.
세차게 부는 바람에 몸조차 가누기 힘들 정도.
나는 다리를 어깨너비보다 넓게 벌리고 겨우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순간.
바람이 잠시 멈추는 듯했고.
참았던 숨을 크게 마시고 내뱉었다.
하지만….
코로 아무런 숨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 순간 감았던 눈을 번뜩 뜨며 앞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내 꿈속이다.
바람이 잠시 멈춘 틈을 타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이곳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공간은 사막이었고.
아무리 앞을 향해 걸어 나가도 달라지는 광경은 단 한곳도 없었다.
여기도 사막.
뒤를 돌아도 사막.
너무나 답답하고 막막한 여기서 나가고 싶었고.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다다다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내며 달리고 또 달렸지만.
이 드넓은 사막은 여전히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황량한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듯했다.
“…젠장,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이야.”
결국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때.
“메세우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앞, 뒤, 위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러니까 이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뭐야, 누구야!”
“메세우스… 처량한 꼴을 보니 아주 안쓰럽기 짝이 없구나.”
“당신 뭐야. 당장 앞으로 나와!”
나는 고개를 들어 소리쳤고.
아무런 답이 들리지 않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자리에서 몸을 돌며 외쳤다.
“당장 나오지 못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사방에 소리를 질렀고.
그때.
“…으윽!”
커다란 힘에 짓눌리듯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절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엄청난 힘으로 나를 누르는 듯했고.
가히 그 힘은 내가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먹을 불끈 쥔 손이 이내 차례로 바닥에 닿았고.
다시금 불쾌하고 낮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천 번의 삶.”
“…….”
“그 삶을 다 살고 나면, 너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 말에 곧장 얼굴이 일그러졌다.
“…선택?”
“그 선택은 네게 맡기도록 하마.”
또다시 바람이 휘이- 불었고.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길었던 천 번의 삶이 끝난 후 네 생이 마감하게 될지, 아니면 또 한 번 만 년을 살게 될지. 네게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
“읍읍!”
대답하고 싶지만.
내 입을 본드로 꾹 붙인 듯 입이 마음대로 열리지 않았고.
제자리에 굳어버린 몸과 입을 움직이려 노력했다.
휘이이-.
다시 거센 바람이 내 주변을 맴돌았고.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바람의 소용돌이가 내게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읍읍…!”
거센 소용돌이는 순식간에 나를 덮쳤고.
“아악!”
내 몸은 더 이상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팟-!
천장에 보이는 하얀 벽지.
서둘러 내 얼굴과 몸을 어루만지며, 꿈에서 깬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누워 있던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숨을 급히 몰아쉬었고.
“아악.”
갑자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휘청거렸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방금 꿈에서 봤던 내용을 차분히 떠올렸다.
천 번의 삶.
그러니까 그 삶은 총 만 년이라는 것이었고.
현재는 내가 천 번째의 삶 중.
이제 막 1년이 지난 셈이다.
즉, 내게는 9년이라는 시간이 남았고.
9년이 지나게 되면, 내가 받은 만 년을 사는 삶이 끝나게 되는 것이지.
그리고 방금 꿈에서 들은 대로, 9년 후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
지금껏 살아온 천 번의 삶, 만 년이라는 시간을 더 살 것인지.
혹은 생을 마감할지 말이다.
나는 그럼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아악….”
지금은 아무런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꿈에서 깨어나자 지금까지 살아왔던 만 년 삶의 피로감이 한 번에 몰아쳐왔고.
“하아, 하아.”
연신 거친 숨을 내뱉으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마지막 번째의 삶 중 1년이 이제 막 지났고.
이제는 또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꿈을 꾸지 않아도.
꿈에서 보지 않아도.
원하는 삶은 언제든 떠올릴 수 있고, 그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만 년 동안 내가 가졌던 수많은 직업과 감정, 느낌은 단 하나도,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고.
휘몰아치는 감정과 수십, 아니 수억 개의 느낌들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머리는 터질 듯이 아파왔고.
그 두통은 걷지도,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침대에 뉘었고.
눈을 스르르 감았다.
***
지이잉.
지독히도 고요한 집 안에 유일하게 들려오는 소리.
휴대 전화의 진동 소리였다.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휴대 전화가 있는 거실로 조심스레 걸어 나갔다.
중간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고.
내 얼굴은 피골이 상접한 모양새로 겨우 한 걸음을 떼고 있었다.
입술은 메말라 주름이 거울에 보일 정도.
나오지도 않는 침을 겨우 삼키며 휴대 전화로 한 걸음 다가갔다.
[발신인: 김지훈 실장]
김 실장임을 확인하고, 곧장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형.”
-뭐야. 너 무슨 일 있어? 아파? 다쳤어?
김 실장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다급히 물었고.
“아니야. 안 아파.”
내 말에 그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뭐야. 갑자기 회사에 왜 안 나와. 매일같이 출근하다가 말도 없이 안 나오니까, 놀랐잖아. 무슨 일 생긴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좀 쉬고 싶어서.”
며칠 동안 회사에 나가지도 않고 집에서 쉬다 보니, 김 실장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숨을 들이마시며 내쉬더니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응,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좀 생각할 것도 있고. 쉬고 싶어서 그래.”
-그래, 그럼 쉬어야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오니까, 몸이 지칠 만하지. 쉬다가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그럴게.”
-아프거나, 나 필요해도 연락하고.
“알겠어, 형.”
내 목소리에 김 실장은 한숨을 참아내며 물었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내가 너네 집으로 갈까?
“아니야, 진짜 괜찮아. 내가 연락할게.”
-그래, 푹 쉬어.
김 실장과 전화를 끊은 뒤.
창밖을 바라보니 사람도, 차도 모두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나 홀로 며칠 내내 집 안에 가만히 정체되어 있다는 생각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찬물로 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린 뒤, 모자를 푸욱 눌러쓰고 문을 열었다.
새해가 밝은 뒤, 아직 세상은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나는 마스크를 높이 올려 쓰고 패딩을 꽉 채운 채, 공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평일 오전.
북적거리지 않는 이곳.
한가로이 걷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한쪽으로 떨어져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며칠 전, 꿈을 꾼 이후로는 예전의 삶을 생각하기만 해도 머릿속에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여전히.
지금도 만 년 동안의 삶 중 그 어떤 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바로 전에 겪었던 일인 것처럼,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이제는 꿈을 꾸지 않아도 뭐든 떠올릴 수 있네….”
예전에는 대본을 보고 난 뒤.
그와 관련된 꿈을 꾸고 나면,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라 연기를 잘할 수가 있었다.
그게 연기를 하는 데 도움이 됐고.
지금은 꿈을 꾸지 않아도 꿈을 꾼 것처럼 연기를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다지 기쁜 일만은 아니었다.
만 년이라는 아주 길고 긴 세월이 머릿속에 모두 맴돌고 있기에.
생각을 떠올릴수록 머리가 지끈거렸으니까.
“으윽.”
다시 떠오르는 수많은 기억에 머리를 감싸 쥐며, 벤치에 몸을 기댔다.
“하아….”
그러곤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만 년의 삶이 ‘벌’이라는 이유… 이제야 알 것 같아….”
***
꿈을 꾼 지도 이제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여전히 예전의 삶을 떠올리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깨질 것 같았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진 듯했다.
아니, 나아진 것이 아니라 지끈거림에 조금 익숙해졌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았다.
내게 내려진 만 년 삶의 벌.
그 길고 긴 세월 중 아주 짧은 9년이 남았는데.
이렇게 집에서 허송세월로 보낼 수는 없었고.
빨리 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
일찍 침대에서 일어나 집을 치우고, 정신을 차리던 그때.
지이잉.
[발신인: 최서빈 선배님]
최서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숨을 길게 내쉰 후, 전화를 받았다.
“네, 선배님.”
-어, 희성아. 잘 지내고 있어?
“그럼요. 선배님도 잘 지내고 계십니까?”
-응, 나야 항상 똑같지. 요즘 뭐 해?
“저는 집에서 좀 쉬고 있었습니다.”
-그래? 아직 작품은 고른 거 없고?
“네, 요 며칠 집에서 쉬느라, 아직 정한 일정은 없습니다.”
-잘됐다. 그럼 너 이거 좀 봐볼래?
“어떤….”
-내가 이번에 영화 대본 하나를 봤는데, 괜찮더라고.
최서빈은 업된 목소리로 내게 말했고.
“저한테 추천해 주시는 겁니까?”
-그렇기도 하고… 나랑 같이하자고.
“선배님이랑요?”
-그래, 너 이번에는 거절하지 마라. 내가 네 역할도 보고 고른 거니까. 메일 보낼 테니까, 읽어봐.
“예, 알겠습니다. 바로 볼게요.”
-응, 보고 연락해.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와 전화를 끊은 뒤.
서둘러 메일을 열어 대본을 확인했다.
노트북 앞에 앉아 대본을 읽어 내려갔고.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 동안을 움직이지 않았다.
대본을 읽은 뒤.
오랜만에 집중한 터라 쏟아지는 잠에 낮잠을 청하고.
이후 저녁에 잠도 잤지만, 최서빈이 보낸 대본과 관련된 꿈은 꾸지 않았다.
몇 번의 잠을 청해도 꿈은 꿔지지 않았다.
하지만 꿈을 꾸지 않아도 대본에서 봤던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순식간에 꿈을 꾼 듯 장면이 선명히 떠올랐다.
내가 봤던 작품 속 배역의 삶이 고스란히 그려졌고.
그 배역의 생각과 느낌, 모든 순간이 뇌리에 박혔다.
“이렇게 생각만으로도 꿈을 꾸고 난 것처럼 떠오르니까, 이제 꿈을 꾸지 않는 건가?”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생각했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노트북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최서빈이 보낸 대본을 집중해 읽어 내려갔고.
작품의 내용, 내가 맡을 배역은 흠잡을 것이 없었다.
깊게 하나하나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잴 것 없이 휴대 전화를 열어 문자함에 들어갔고.
최서빈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했다.
마지막 블랙맨 작품 이후.
처음으로 길게 휴식기를 취하고 있기에, 여기서 더 쉰다면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작품은 둘째 치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마음에, 두 번 더 고민하지 않고 자판을 두드렸다.
-선배님, 이번 작품, 함께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