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27 – 연말의 온도 (5)
“오랜만이에요!”
시상식이 시작되기 전.
‘상간녀의 유혹’을 함께했던 배우들과 스태프.
그리고 감독과 작가까지 현장에 도착했고.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에 인사하기에 바빴다.
“우리 희성 씨랑 민영 씨 둘 다 신인상 후보에 오르다니. 이미 나는 꿈을 이뤘다. 하하.”
송동규 감독은 뿌듯한 얼굴로 나와 신민영을 바라보며 말했고.
나는 그를 향해 답했다.
“다 감독님 덕분입니다.”
“누가 받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신인상이 나올 거라면, 우리 팀에서 나오면 더 좋겠다. 누구든 같이 축하해 주자고.”
“그럼요.”
송 감독이 나와 신민영을 번갈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딱 남자 신인상은 희성 씨가 타고, 여자 신인상은 민영 씨가 타면 금상첨화인데. 내가 열심히 기도할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이곳을 밝히던 불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이제 시상식 시작하려나 봐요.”
곧장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모든 이들은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모든 불이 꺼진 이곳.
화면에는 생방송으로 TV에 나가고 있는 화면이 잡혔다.
광고가 나오고 있었고.
숨을 죽인 채 현장의 모두가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들어갑니다. 3, 2… 1!”
팟-!
화면이 전환되며, 오프닝 영상이 흘러나왔고.
이내 무대의 조명이 밝게 비췄다.
♬♪.
쿵쿵쿵쿵.
온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로 쿵쿵거리는 빠른 BPM의 음악 소리.
그리고 무대 조명 아래 서 있는 5명의 아이돌.
그녀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꺄아!”
우리가 앉은 자리 뒤로 수십, 아니 수백 명의 관중이 가득했고.
그들은 아이돌을 향해 환호를 터뜨렸다.
음악과 환호성에 내 심장도 빠르게 뛰고 있었고.
우리는 손뼉을 부딪치며 무대를 바라보았다.
신인상 후보로 이 자리에 참여했지만.
상을 타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자리 자체가 내게는 너무나 즐겁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수많은 배우와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
그리고 늘 TV로만 보던 이곳에 내가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꽤 유쾌하고 짜릿한 느낌이었다.
이거야말로 내가 늘 꿈꾸던 배우들의 축제.
그 현장에 내가 참여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서인우가 팔을 뻗어 나를 툭툭 치며 말했다.
“선배, 나 저 그룹 진짜 좋아하는 거 알지?”
감동에 젖은 듯한 서인우의 눈빛.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새 양손을 꼭 붙잡고 무대를 바라보는 서인우의 얼굴과, 그걸 보며 웃는 내 모습이 화면에 잡혔고.
그 장면에 현장의 모든 배우와 관중석까지 웃음을 터트렸다.
TV에서 보던 연기 대상은 조금 엄숙한 분위기에 무거움이 더해졌다고 생각했다.
연예 대상과는 굉장히 다른 분위기라고만 느꼈는데.
실제로 이 자리에 있으니, 생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상을 받았을 때, 수상 소감을 전할 때는 당연히 누구 하나 잡담이나 딴짓도 없이 서로 집중하고 축하해 주지만.
중간에 광고가 나가거나, 영상이 나올 땐.
앞뒤로 다른 배우들과 사담도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자리가 많았다.
평소 배우들은 다른 배우들과 친해질 기회가 많지 않다.
물론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은 기회가 없어도 만들어 친해질 수 있지만.
나처럼 현장, 집, 현장, 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같은 작품을 하지 않는 이상 만날 수 있는 자리조차 만들기가 쉽지 않지.
그런데 이곳에서는 처음 보는 배우들.
거기에 내가 동경하던 많은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기에.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번호까지 교환하며 인맥을 넓혀갔다.
이런 기회가 내게는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중간중간 축하 공연 무대에도 배우들은 진중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무대를 즐기고 박수 치고 호응하며, 절로 축제 분위기를 연상케 만들었다.
계속되는 시상식에 나는 TV 속에 들어와 있다는 기분이 들면서.
너무나 꿈만 같은 느낌에 연신 미소가 터져 나왔다.
***
연기 대상의 시상 순서 중 신인상은 초반에 진행이 된다.
그래서 연기 대상이 시작한 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금세 신인상 시상의 순서가 돌아왔지.
옆을 바라보니 신민영이 긴장한 얼굴로 연신 생수를 마셨고.
그녀의 앞에는 이미 빈 생수 통이 두 병이나 쌓여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떨리는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상을 받게 되면 행복하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미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차고 꿈만 같았기에.
더 바랄 게 없었지.
첫 연기 대상에 참석해 수상까지 하게 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 연도에는 이 자리에 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 계단 성장했음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진행을 맡은 남자 사회자와 여자 사회자가 나란히 서서 미소를 지은 채.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다음으로는 신인상 후보를 만나 보겠습니다. 시상에 도움을 주실 분들입니다.”
“네, 시상에는 작년에 신인상을 받았던 배우분들을 모셔 보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그들의 소개에 전년도 신인상을 수상했던 배우 두 명이 무대 중앙으로 걸어왔다.
“와아아아!”
그들의 걸음에 맞춰 환호가 터져 나왔고.
남자 배우와 여자 배우가 맞춰진 대본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렇게 대화를 나눈 뒤.
“그럼 올해는 여자 신인상부터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후보 영상 보여주시죠!”
멘트와 함께 커다란 화면에는 올해의 여자 신인상 후보들의 영상이 켜졌다.
여자 신인상 후보는 총 4명.
MBS에서 나온 드라마 중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의 신인 여배우.
그리고 나와 함께 작품을 했던 신민영.
이외에도 다른 후보 2명이 더 영상에 담겼고.
내 옆에 앉은 신민영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메라 속에서 여유롭게 웃는 것과는 달리.
곁눈질로 흘긋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극도의 긴장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연신 마르는 입술을 움찔거렸고.
내 귓가에 들리도록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발표된 여자 신인상.
“자, 그럼 길게 끌지 않고 발표하겠습니다.”
“네, 여자 신인상입니다.”
무대에 있는 그들의 말에 현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그들의 입에 시선을 고정했다.
“축하드립니다. 드라마 ‘축제가 끝난 뒤’의 김현희 역을 맡았던 박소라 배우님!”
여자 신인상에 신민영이 아닌, 다른 배우가 호명되었고.
신민영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카메라에 담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 신민영은 서둘러 미간을 펴고 미소를 지었다.
박소라는 무대에 올라가 수상 소감을 발표했고.
내 옆의 신민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남은 생수를 연달아 들이켰다.
잠시 뒤.
박소라의 수상 소감이 끝이 났고.
“다음은 남자 신인상 후보도 만나봐야죠?”
“예, 남자 신인상 후보 VCR로 먼저 만나볼까요?”
팟-!
남자 신인상 후보 영상이 스크린에 켜졌고.
후보는 나를 포함해 총 5명이 있었다.
너무나도 쟁쟁한 후보들.
더군다나 여자 후보보다 1명이 더 많았기에, 그 열기는 더욱 치열했다.
‘상간녀의 유혹’이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신민영이 상을 타지 못했다는 사실에, 나는 마음을 조금 더 가라앉혔다.
그녀가 받지 못해 내가 받을 수 있는 희망이 생긴 것이 아니라.
올해는 다른 드라마에서 타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미 인기가 많은 배우들이 후보로 나왔기에.
누가 됐든 축하해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미소를 지은 채,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스크린에는 나를 포함해 5명의 배우 얼굴이 화면에 띄워졌고.
“발표하겠습니다. 남자 신인상….”
“네, 남자 신인상입니다. 이번에도 단 한 분만이 수상하게 되었는데요. 바로…!”
그들의 쫄깃한 진행력에 현장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아!”
관객석에서 터진 소리에 시상자들은 웃음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정말 발표하겠습니다. 남자 신인상, 많은 사랑을 받았던 분이죠. ‘상간녀의 유혹’의 진희성 배우님!”
“축하드립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진 듯 앉은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입을 떡 벌린 채 놀란 얼굴이 화면 가득 잡혔고.
“꺄아!”
“진희성!”
관객석에서 터진 환호와 연신 부르는 내 이름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인우를 포함한 우리 드라마 팀은 소리를 지르며 손뼉을 부딪쳤고.
내가 고개를 숙이며 무대로 다가가자, 주변에 있던 동료 배우들은 박수와 함께 한마디씩을 건넸다.
“축하드려요.”
“이야, 희성 씨. 축하드립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서둘러 계단을 올랐고.
트로피와 함께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마이크 앞에 선 나는 수많은 배우들과 관객을 바라보았고.
태어나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길게 숨을 내쉰 뒤, 마이크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침을 삼킨 후 목을 가다듬었다.
“아아, 안녕하십니까. ‘상간녀의 유혹’에 진희성 배우입니다.”
내 인사 한마디에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앞은 뿌옇게 밝을 뿐.
모든 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나 긴장한 탓에 연습했던 수상 소감은 머릿속에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고.
순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정말 상을 받게 될 줄은 몰라서… 지금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는데요. 하하, 먼저 MBS 연기 대상에 초대받고, 이렇게 신인상 수상까지 하게 되어 감사하고 영광이라는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나는 마이크 옆으로 한 걸음을 옮겨 허리를 깊게 접었다.
그리고 다시 마이크로 다가와 소감을 이어갔다.
“제가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후, 이런 시상식에 초대된 게 처음이라 매일 떨리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왜냐면 제게 연기 대상은 늘 연말에 집에서 TV로만 보던 방송이었거든요.”
내 말에 몇몇 배우는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고.
그 얼굴들이 화면에 잡혔다.
“방송을 보며 매년 부러워하고, 나는 언제 저런 자리에 가볼 수 있을까? 라면서 배우로서 의지를 다졌습니다. 그렇게 불태우며 연기를 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값진 신인상 트로피와 함께요.”
다시 한번 박수가 쏟아졌고.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제게 올해는 유독 더 특별했던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상간녀의 유혹이라는 작품을 만나게 해주신 송동규 감독님, 김한나 작가님….”
.
.
.
“신인상은 평생에 한 번밖에 받지 못하는 상이라, 더욱 값지고 소중한 것 같습니다. 그 값진 상인만큼 앞으로도 이 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연기에 미친 배우, 최고의 배우가 되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습니다.”
빠르게 말을 내뱉으며 주변을 살폈고.
진행석에 있던 사회자는 마이크를 들고 내게 말했다.
“진희성 배우님, 소감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직 초반이었기에, 그는 내게 차분히 다 이야기하라고 시간을 알려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저를 누구보다 아끼고 응원하고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 매니저 지훈이 형. 감사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관객석에 있는 팬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제 곁에 든든하게 계셔 주시는 ‘진희성수기’ 팬 여러분들!”
팬들을 언급하자, 관중석에 있던 내 팬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꺄아!”
“오빠!”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팬 여러분에게 부끄러운 배우가 아닌, 자랑스러운 배우가 되기 위해 앞으로도 항상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말 고맙고, 넘치도록 사랑합니다.”
그리고 옆으로 나와 허리를 다시 한번 접으며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무대 뒤로 내려와 다시 자리로 걸어갔고.
카메라는 내가 아닌, 다음 수상 후보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자리에 걸어가는 도중 나를 빤히 바라보는 한 사람.
신민영이었다.
그녀는 입술 한쪽을 잘근 깨물며 눈에 힘을 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빛에는 질투심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순간 그녀와 나는 허공에서 눈빛이 마주쳤고.
미간에 힘을 주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오히려 미소로 답을 보냈다.
씨익 입꼬리를 올리자, 신민영은 곁눈질로 나를 쏘아보고는 서둘러 시선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