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44)화 (144/303)

144화 #27 – 연말의 온도 (2)

“혹시 합석해도 돼요?”

“…네?”

합석이라는 단어에 나는 너무 놀라 말을 얼버무렸다.

술집의 구조가 모두 칸막이로 되어 있어, 이 장면을 모든 이가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괜스레 주변 눈치를 살피며 입을 움찔거렸다.

그녀들이 누구든지 간에, 함께 자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거절의 말을 건네야 할지 망설이던 그때.

서인우가 내 쪽으로 몸을 가까이 다가와 아주 작은 데시벨로 입을 열었다.

“선배, 두 명 다 괜찮지 않아?”

“뭐?”

눈이 휘둥그레지며 서인우에게 되묻자.

그가 옅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어차피 선배도 솔로고 나도 헤어졌는데….”

나는 서인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말했다.

“안 될 것 같은데… 저희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말을 내뱉은 뒤 고개를 꾸벅 숙였고.

다행히도 그녀들은 멋쩍은 미소와 함께 뒤를 돌아 자신들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다시금 우리 둘만이 남은 테이블.

서인우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헐, 선배 왜 그냥 보냈어. 진짜 괜찮던데?”

“에이, 그걸 떠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갑자기 어떻게 합석을 해.”

그는 내 말에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게 뭐 어때. 그렇게 친해지고, 그러다가 연인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거고.”

나는 손을 세차게 휘저으며 말했다.

“야, 난 이런 거 불편해. 우리가 연예인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성격 자체가 그래.”

“선배가 그렇게 낯가리는 것도 아니고, 성격도 좋으면서?”

“너 같은 ENFP면 몰라도, 나는 어렵고 불편해.”

내 말에 서인우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내 MBTI가 ENFP라 좀 발랄한 면이 있지? 하하.”

서인우의 성격은 모든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항상 밝고 잘 어울리는 편이었지.

그래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내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가까워졌으니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와 눈을 맞춘 뒤.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그리고 혹시나 이런 일 또 있으면, 항상 조심해. 우리가 구설수에 쉽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직업이잖아.”

“…맞지.”

“뭐, 모든 만남이 그런 건 아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말이야.”

내 말에 서인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안, 내가 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그랬나 봐.”

“미안할 것까지야.”

나는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술잔을 들었다.

챙-.

우리의 술잔은 허공에서 세차게 부딪쳤고.

술을 들이켜자마자 그를 향해 물었다.

“아, 그래서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봐. 민영 씨랑 왜 헤어졌다고?”

내 말에 그는 쓰읍, 소리를 내며 답했다.

“선배도 알잖아. 선배 뒷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의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

“정말?”

“응, 공감해주고 들어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중에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너무 힘들더라.”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물론 그거 하나 때문만은 아니긴 한데. 아무튼, 오래갈 인연은 아닌 것 같아서 헤어졌어.”

“그래,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해.”

서인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으며 술병을 받아 내 잔을 채웠다.

그리고 입술을 말아 넣은 채.

시선을 돌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튼, 걔 때문에 선배랑도 연락 못 하고 눈치 보였는데… 그때는 정말 미안했어.”

신민영과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 서인우와 나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아니, 못 했던 것이지.

그녀가 서인우에게 나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고.

나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섣불리 서인우에게 연락하는 게 불편했지.

하지만 이제 다 지나간 일이고, 그걸 그에게 화를 내거나 탓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괜찮아. 그래도 이별했는데, 너는 멀쩡하고?”

내 물음에 서인우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괜찮지!”

“그럼 됐다.”

나는 꽉 채워진 술잔을 그의 잔에 부딪쳤다.

그러자 술잔을 내려놓은 서인우가 나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선배, 여자 친구는 안 만들어?”

그의 말에 나는 실소를 터트리며 답했다.

“어휴, 너도 그 소리야?”

“왜 누가 또 여자 친구 물어봤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주변에서 요즘 자주 물어보네.”

“선배가 작품도 잘 되고, 항상 바쁘게만 사니까. 여유 좀 생기고 한숨 돌리라고 그러는 거겠지.”

“그런가?”

서인우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선배, 그럼 이상형은 어떻게 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서인우는 테이블을 손으로 짚으며 재차 말했다.

“에이, 대략적으로라도 말해봐. 혹시 모르지, 그런 분이 주변에 있으면 내가 소개해줄 수도 있고.”

“음….”

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눈동자를 굴렸다.

“뭐 어려우면, 고양이 상이나 강아지 상. 어떤 스타일이 더 좋아?”

“나는… 강아지 상.”

내 말에 서인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까칠하고 도도한 스타일보다는, 애교 있고 귀여운 스타일을 좋아하나 보네.”

“굳이 원하는 스타일이라면… 그게 맞겠다.”

“그럼 당연히 차도녀 스타일 말고, 순수하고 착한 이미지가 더 좋고?”

서인우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것 같아.”

그는 내 말에 턱을 괴고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음… 주변을 보면….”

곧장 서인우는 뭔가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튕기며 외쳤다.

“와, 선배!”

“응?”

“선배 이상형은 바로 떠오르지가 않는데, 선배 이상형이랑 제일 먼 사람은 떠오른다.”

“내 이상형이랑 정반대인 사람?”

내 말에 서인우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 이상형에 완전 반대인 사람. 딱 송유나잖아.”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머릿속에 송유나를 떠올렸다.

까칠한 성격, 도도하고 차가운 스타일.

거기에 눈매가 치켜 올라간 딱 고양이 상의 그녀.

나는 송유나의 얼굴을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네?”

서인우가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선배랑 딱 반대 스타일이긴 한데, 유나 씨가 또 엄청나게 예쁘긴 하지.”

그는 몸을 당기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 스타일 찾아서 소개해줄까?”

서인우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괜찮아. 나는 자만추거든.”

“에이, 요즘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난 소개 말고, 자연스럽게 만나고 싶어.”

“당연히 그게 좋지만, 어렵잖아. 내가 소개해줄게.”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유, 진짜 괜찮아. 나는 당분간 일만 할 거야. 내가 필요하면 꼭 너한테 말할게.”

“알겠어. 언제든 이야기해.”

서인우와 나는 다시금 술잔을 부딪쳤다.

***

차에서 내리자, 새하얀 함박눈이 금세 어깨 위로 떨어졌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감싸고 있었고.

주변에는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만을 기다리는 듯, 빨간색과 초록색 소품들이 가득했다.

♪♬.

거리에는 자기주장을 펼치듯 온 매장마다 각기 다른 캐럴들이 울려 퍼졌고.

그 음악들이 시끄럽기는커녕, 지나가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기 충분했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지만, 나 또한 이런 연말 분위기에 가슴이 떨려왔다.

영하의 온도는 사람을 꽁꽁 얼게 만들지만.

연말의 이 두근거리는 감정은 마음을 따스하게 녹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도.

한 살을 더 먹고 싶어 연말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지만.

특유의 연말 분위기는 사람을 기대하고 설레게 만든다.

나는 꽁꽁 언 손을 비비며 WG 엔터 회사로 향했고.

어깨와 머리에 쌓인 눈을 손으로 툭툭 털며 안으로 들어갔다.

“희성아, 왔어?”

“응, 밖에 엄청나게 춥다.”

“눈 많이 오지?”

김 실장이 내게 핫 팩을 건네며 물었다.

“고마워. 밖에 눈 꽤 오더라.”

“앉아서 좀 쉬어.”

테이블에는 대본이 쌓여 있었고.

나는 핫 팩으로 손을 녹이며 물었다.

“이거 대본 보면 되는 거야?”

“응, 쉬었다가 천천히 봐. 나 서류 하나 정리하고, 커피 좀 가져올게.”

그는 곧바로 연습실을 빠져나갔고.

나는 얼른 첫 번째 대본을 집어 들어 금세 대본에 집중했다.

빠르게 대본을 넘기며, 세 번째 대본을 보았지만.

아직까지 나를 끌어당기는 대본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꿈을 꾸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아직 작품에 들어가겠다고 한 것도 없었고.

본격적으로 대본을 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항상 이 정도쯤에는 작품과 관련된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이러다가 뭔가 큰 건 하나 터지려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을 떨쳐내고, 서둘러 대본을 넘겼다.

“확 끌릴 만한 좋은 작품 없나?”

그때.

문이 열리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 두 잔을 챙겨 들어오는 김 실장.

“어때, 대본 괜찮은 거 있어?”

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 실장은 커피를 내게 건네고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희성아, 차기작은 뭐 하고 싶어?”

“음… 일단은 영화 쪽으로 생각 중이야.”

“드라마는 안 하고?”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답했다.

“이번에 드라마 연달아 두 개를 쪽대본으로 했더니, 완전 녹초가 되어 버리더라고.”

“하긴, 두 작품 다 거의 생방송처럼 달리고 중간에 쉬지도 못했지.”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이번에는 그래도 촬영은 좀 여유로운 영화로 하는 게 낫겠다.”

“응, 그러려고.”

순간.

김 실장이 손뼉을 세차게 부딪치며 소리쳤다.

“맞다. 이번에 할리우드 오디션 들어왔어!”

“할리우드?”

나는 눈이 동그래져 물었고.

그는 침을 크게 삼키며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어, 한국인 배우 한 명 뽑으려고 하나 봐.”

김 실장이 내게 그 영화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설정 자체는 한국인이 아니라, 그냥 한국계….”

그가 한참 동안 설명한 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데 나는 아직 할리우드로 가기엔 깜냥이 부족한 것 같아.”

김 실장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미소 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아직은 국내에 집중하고 싶어. 조금 더 크면, 그때 도전해보고 싶어.”

내 말에 그는 이해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더 성장하고,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때.

김 실장의 휴대 전화가 울리자, 문자를 확인한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희성아, 잠깐만. 나 본부장님 호출.”

“응, 다녀와.”

급한 일인지, 김 실장이 서둘러 연습실을 빠져나갔고.

나는 앞에 놓인 대본을 다시 집어 들었다.

몇십 분간 대본에 집중하던 그때.

지이잉.

휴대 전화의 알람에 나는 대본을 내려놓았다.

[발신인: 최서빈 선배님]

“여보세요?”

-희성아, 바빠?

“아닙니다. 회사 나와서 대본 보고 있습니다.”

-벌써 대본 보기 시작했어?

“예, 급하게는 아니고, 천천히 작품 보려고요.”

-그래서 뭐 들어갈 만한 작품은 있고?

“아직 딱히 끌리는 작품은 없습니다. 선배님은 더 쉬시는 겁니까?”

-정한 건 없고… 아, 너 들어갈 거 정해지면 알려줘.

“알겠습니다. 선배님도 좋은 작품 결정하면, 저한테도 알려 주십시오.”

-당연하지. 같이하면 더욱 좋고.

의자에 기댄 채 웃으며 통화를 하던 순간.

쾅-.

무슨 일인지 김 실장이 헐레벌떡 달려와 연습실 문을 세차게 열었다.

“희성아!”

너무나 다급한 그의 모습에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직감이 들었고.

서둘러 최서빈을 향해 말했다.

“선배님, 죄송한데, 제가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어, 알겠어. 얼른 일 봐.

곧장 전화를 끊은 뒤, 김 실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 대체 무슨 일이야?”

김 실장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격한 목소리로 내게 소리쳤다.

“너 시상식 초대받았어!”

“…뭐라고?”

그의 입꼬리는 귀까지 올라갈 듯 찢어졌고.

내 어깨를 붙잡으며 외쳤다.

“올해 연말 시상식, 초대 연락 왔다고.”

김 실장의 말에 입을 헤벌린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뛸 듯 기쁜 마음을 겨우 눌러내며 조심스레 김 실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디 방송사에서 초대된 거야, PBC? 아니면 MBS?”

나는 긴장된 마음에 혀로 입술을 훑으며 마른침을 삼켰고.

김 실장이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말했다.

“PBC, MBS… 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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