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27 – 연말의 온도 (1)
꽉 막힌 서울 한복판 도로 위.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저 멀리 보이는 노을은 붉은빛이 퍼져가고 있었다.
빵빵-.
서로 먼저 가고 싶다며 울리는 클랙슨 소리.
그런 그들과는 달리, 나는 여유롭게 왼팔을 차 도어 틀에 걸쳐 올렸다.
오른손은 여전히 핸들을 잡고 있었고.
차에서는 음악이 빵빵하게 흘러나왔다.
“하아, 차 진짜 좋다.”
방향 지시등을 넣고 핸들을 꺾어 차선을 변경했다.
생각보다 너무 비싼 집값에 이사는 다음으로 미뤘지만.
대신 차를 바꾸는 걸 조금 앞당기기로 했다.
이미 타고 있던 차가 있기에 바꾸는 것을 고민했지만.
그럼에도 고생한 내게 선물을 하나 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힘들게 달려온 내 자신에게 주는 차 선물.
그리고 앞으로도 더 열심히 달리기 위한 동기 부여의 선물로.
차를 바꾸겠다고 결심한 뒤, 틈만 나면 차에 관련된 영상과 사진을 보며 생각하곤 했다.
이번에는 외제 차로 바꿔볼까?
기왕이면 뚜껑이 열리는 차?
차를 몰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알아보기를 한참.
하지만 오픈카를 사서 내가 과연 잘 끌고 다닐 수 있을까.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그 차를 오픈해서 달릴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앞섰고.
결국, 나는 현실과 이상을 타협했다.
그러면서도 디자인과 실용성을 고려한 자동차.
오랜 고민 끝에, 지금 운전하고 있는 이 차를 선택했다.
전기 자동차.
띡-.
음악 정지 버튼을 누르자, 차 안은 도로를 달리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이 고요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게 전기 차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고.
서서히 뚫리기 시작하는 도로를 바라보며, 액셀에 올린 발에 힘을 가했다.
지이잉.
그때 울리는 전화.
곧장 블루투스로 연결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희성아. 차 잘 받았어?
김 실장이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응, 받아서 집에 가는 중이야.”
-오오, 차는 어때?
“완전 조용하고, 엄청 잘 나가는데! 어차피 서울은 막히니까 알 수가 없네. 하하.”
-이야, 빨리 시승식하자. 나 전기 차 몇 번 안 타봤거든.
“에이, 그럼 타본 거지.”
김 실장이 놀라는 목소리로 숨을 들이마시며 답했다.
-아니지. 내가 탔던 전기 차랑은 또 다른 거잖아. 그거 엄청나게 타보고 싶었단 말이야. 외제 전기 차는 안 타봤어.
“그래? 뭐… 다 같은 전기 차인데.”
-전혀 다르지. 아무튼, 내일 만나서 차 구경시켜줘.
“그럴게. 나 집 다 왔다. 내일 회사 가서 보자, 형.”
-어, 조심히 들어가.
끼익.
김 실장과의 통화를 마치며, 차를 집 주차장에 주차한 뒤.
차에서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뒷좌석에 실은 짐을 꺼내기 위해 차 문을 열었다.
스르륵-.
순간 나보다 더 신난 것만 같은 김 실장의 목소리가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저 똑같은 전기 차일 뿐인데….
단, 특이점이 있다면… 차량 뒷문이 위로 열리는 것 정도?
쇼핑백을 양손에 들고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지하에서 출발한 엘리베이터는 얼마 가지 않은 채 1층에 멈춰 섰다.
딩동.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한 사람.
단발머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그녀는 입을 벌린 채.
나를 보며 연신 눈을 깜빡였다.
나 역시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고 입을 열었다.
“어? 김하나 배우님 맞으시죠?”
김하나.
나와 같은 WG 엔터의 배우이자, 지금 내 옆집에 살고 있는 그녀.
김하나는 내 물음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네, 안녕하세요.”
“옆집 사신다고 들었는데, 이제야 뵙네요.”
내 말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요. 저도 매니저님한테 들었는데, 회사에서도 못 뵙고….”
김하나는 손뼉을 부딪치며 말을 이어갔다.
“아, 이번에 드라마 너무 잘 봤어요. 최서빈 선배님이랑 나온 작품, 엄청나게 대박 났잖아요.”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하, 감사합니다. 저도 하나 씨 작품 잘 보고 있었어요.”
“우와, 정말요?”
“네,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말과 함께 양손을 들고 주먹을 쥐어 응원한다는 제스처를 보냈고.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답했다.
“저도 응원할게요. 감사해요.”
딩동.
그때,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고.
우리는 동시에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각자의 문으로 걸어가, 그녀를 향해 눈인사를 보내며 말했다.
“나중에 시간 되면 커피라도 한잔해요. 이렇게 집도 가깝잖아요. 하하.”
내 말에 그녀는 자신과 우리 집의 문 사이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네요. 이렇게 가까울 수는 없죠.”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다음에 꼭 커피 마셔요.”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
“이야, 문이 위로 열리는 거 실제로 보니까, 장난 아니네.”
김 실장이 차 문을 보고 입을 떡 벌린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하, 형. 그러다가 차 문 닳겠다.”
내 말에도 그는 차 문을 다시금 닫았다 열며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와아… 하차감도 장난 아니겠는데?”
“에이, 하차감은 무슨. 사람들 많은 곳에서 내린 적도 없어. 회사와 집, 회사, 집밖에 안 하는 거 알잖아.”
김 실장이 코를 찡긋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긴 하네.”
나는 팔짱을 낀 채 팔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날씨 진짜 춥다. 형, 얼른 들어가자.”
“희성아, 먼저 올라가 있어. 나 잠깐 서류 하나 받아서 갈 거 있어서.”
“알겠어. 천천히 갔다 와.”
WG 엔터, 연습실로 올라와 의자에 기댄 채 휴대 전화를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인터넷으로 들어가 ‘진희성’, 내 이름을 검색했다.
드라마가 끝난 지도 몇 주가 지났고.
아직 다른 작품에 들어가거나, 스케줄이 잡힌 것은 없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생긴 습관 중 하나였다.
내 이름을 검색해 어떤 기사들이 있는지.
어떤 댓글들과 내 이야기들이 있는지 검색하고 살펴보는 습관.
처음에는 내 이름 석 자를 검색해서 내 사진이 뜬다는 사실만으로도 신기하고 가슴이 벅찼다.
그렇게 매일 검색을 하다 보니, 이제는 신기함을 넘어 배우로서의 내 입지를 확인하기에 바빴다.
활동이 있을 때, 기사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뿌듯해했고.
작품이 끝나는 순간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사들과 대중들의 관심이 잠잠해졌다.
그런 것을 보며 더욱 작품 활동을 쉬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대중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배우는 연습을 하고 광고나 활동을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잊히기 마련이니까.
내 이름을 검색하자, 곧바로 뜨는 기사와 게시물들.
그걸 보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드라마 마지막 화가 끝난 지 오래인데, 여전히 올라오는 게시물과 기사들은 넘쳐났다.
여전히 드라마의 여운에 잠겨 있는 듯한 게시물들이 인터넷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앞으로 작품의 행보에 대한 추측들.
사생활에 대한 궁금증으로 토론을 하는 팬들.
확실히 몇 개월 전에 비해 나에 대한 언급이 엄청 급증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아도, 내 피부로 와닿는 현실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흐뭇한 얼굴로 휴대 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때.
“희성아, 오래 기다렸어?”
김 실장이 문을 열고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아니야. 볼일은 끝났어?”
“응, 희성아, 이것 좀 봐.”
그는 서둘러 내 앞에 의자를 꺼내 앉으며, 자신의 다이어리를 펼쳐 내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가쁜 숨을 겨우 삼켜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김 실장의 다이어리에는 빼곡하게 글씨가 적혀 있었고.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김 실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우리 작품 들어왔어.”
“진짜?”
항상 들어도 반가운 소리.
내게 작품 제안이 왔다는 말이다.
수많은 배우 중에 나를 택했다는 거니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내게, 김 실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입을 움찔거렸다.
그걸 본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뭐길래 뜸을 들이는 거야?”
내 물음에 김 실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들어온 작품… 한두 개가 아니야.”
그의 말에 순간 입을 벌린 채 일시 정지가 된 듯 얼어붙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 얼음을 깨며, 조심스레 김 실장에게 물었다.
“이번에 들어온 것 중에 주연도 있어?”
마지막 드라마였던, 최서빈과의 작품을 하기 전.
불륜 드라마의 주연을 맡고 난 이후 내게 주연 자리 캐스팅이 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조연의 역할로 러브콜이 쇄도했기에.
불안한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고.
김 실장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전부 주연이야.”
그 한마디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내가 그렇게 바라던 그 위치.
내게 들어오는 작품을 무조건 하는 것이 아니라, 고를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인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배우의 톱 급까지 올랐다는 건 아니다.
아직 자만하거나 만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급은 최서빈 정도까지는 올라야 가능한 단계였지.
그래도 내가 작품을 고를 수 있는 단계까지.
그러니까 정상까지는 아니지만, A급까지는 올라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형, 작품들은?”
“이거 지금 대본이랑 다 받는 중이라, 오는 대로 보여줄게. 우선 어제 왔던 드라마가….”
김 실장이 내게 작품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십여 분을 설명한 김 실장은 다이어리를 덮으며 말했다.
“나머지는 대본 오면, 자세히 얘기하자.”
“알겠어.”
그는 앞에 놓인 물을 마시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고.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테이블을 탁 치며 말했다.
“맞다, 형!”
내 부름에 김 실장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답했다.
“깜짝이야. 뭔데?”
“걔는 요즘 뭐 한대?”
김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박민준.”
내 말에 김 실장이 탄식을 내뱉었다.
“박민준, 걔 요즘 웹 드라마 하던데?”
“아….”
그는 쓰읍, 소리를 내며 작게 읊조렸다.
“내가 웹 드라마를 무시하려는 건 아닌데… 그쪽 업계는 좀 빡세잖아.”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아무 답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웹 드라마 시장이 커지기는 했지만, 아직 TV 드라마 업계와는 많이 다르니까.
애초에 박민준이 웹 드라마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무게를 감당하기는 더욱 힘들 터.
“박민준, 지상파 미니시리즈로 돌아오려면… 꽤 걸릴걸?”
“하긴, 웹 드라마에서 지상파로 넘어오는 게 쉽지는 않으니까.”
“맞아. 돌아올 수 있는 날이 있을지….”
김 실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지금 박민준은 어떤 일을 하는지 잠시 궁금했을 뿐.
더 이상 그를 신경 쓰거나 견제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 이제 박민준은 내게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박민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별생각 없이 고개만을 끄덕일 정도의 인물.
그때.
지이잉.
휴대 전화의 문자 알림음이 울렸고.
단지 그 한 통에 박민준의 이야기는 감쪽같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곧장 시선을 옮겨 휴대 전화를 바라보았고.
다름 아닌 서인우에게서 온 문자였다.
-희성 선배, 오늘 저녁에 뭐 해? 술 한 잔 어때?
***
서인우와 나는 인사라고 할 것도 없이 짧은 근황을 나눈 후,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뭔데, 무슨 일 있어?”
내 물음에 서인우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선배, 나 민영이랑 헤어졌다.”
“왜?”
조금 전 씁쓸했던 얼굴의 서인우는 어느덧 홀가분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애가 너무 사람들 뒷얘기도 많이 하고….”
그가 신민영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그때.
“저 혹시… 진희성 배우님 맞으세요?”
수줍은 얼굴로 다가와 조심스레 묻는 여성.
나를 알아본 그녀들에게 나는 미소로 답을 보냈다.
“아, 네.”
그때 옆에 서 있던 일행이 손뼉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맞네. 어머, 여기는 서인우 배우 맞죠?”
친구로 보이는 그들은 수려한 미모를 뽐내며 내 옆에 나란히 서 있었고.
서인우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알아봐 주셔서 감사해요. 하하.”
쭈뼛대는 모습을 보니, 함께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려는 모양이다.
휴대 전화를 들고 있는 그녀는 내게로 한 걸음 다가왔고.
나는 머리를 매만지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사진 찍어 드….”
내가 말을 하려던 순간.
바로 옆에 있던 그녀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혹시 합석해도 돼요?”
“…네?”